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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 박한영 스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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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서정주 1991년 11월 117호
나는 여기에 내 은사들 가운데에 가장 큰 분인 석전石顧 박한영 스님이 하신 일들을 글로 다시 쓰게 된 것을 더없이 큰 보람으로 여긴다.
그는 1870년에 전주에서 멀지 않은 한 농촌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열 아홉 살 때 이미 서당에서 유학의 사서삼경까지 땐 수재로서, 인생의 바른 도리를 찾아 깨우쳐야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주위의 모든 반대를 무릅쓴 채 전주 위봉사의 금산鎬山 스님 문하로 들어가서 중이 되었다. 그로부터 칠년 동안 불경들을 모두 살펴본 그는 약관 스물 여섯에 전북 순창의 구암사 조실祖室(불경 교수) 스님이 된 것을 비롯해서 해인사 주지화엄성 범어사 등에서도 불교 。원f繼t講院의 조실 스님으로 명강의를 펴 나가셨다. 석전 스님이 동래의 범어사에서 강의하실 때에는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사랍들의 숫자가 이백 명을 훨신 넘어서는 바람에 범어사 안에서는 모두 재울 수가 없어서 그들은 민박까지 하며 배웠다고 한다.
1908년. 그가 서른 아홉 살이 되었을 때에는 기울어 가는 국운을 걱정한 끝에 불교를 혁신하여서 이에 대처하고자 불교 교단의 유신 운동維新運動에 힘을 다하였으나, 1910년 8월에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이 나라는 일본의 식 믿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1911년에는 우리 불교마저 일본의 국교인 조동종 불교曺洞宗佛敎에 예속되려 하자 그는 이 나라 불교 대표로서 그 불합리함을 날카롭게 비판, 설득함으로써 한국 불교를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때에 정사正使로서 수행하였던 이가 한용운 스님이다.
그 뒤에 석전 스님은 당연히 이 나라 불교의 최고 대표자인 대종정 스님의 직책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뜻에 따라 여러 차례 연임하면서 동대문 밖에 있는 개운사 뒤에 대원암을 지어 거기에 조선불교 중앙강원이라는 이 나라 최고의 불교전문교육 기관을 세우고 지방 강원에서 모여든 스님들에게 불경 공부를 시키는 일까지 맡으셨다. 또한 그런 한편으로는 이때의 불교법에 따라 혜화동에 새로 생겨난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장 직까지 맡아 오랜 기간 근무하기도 했다. 나는 석전 스님이 강주講主 로 계셨던 조선불교 중앙강원에서 1933년 겨울부터 1935년 겨울까지 이 년 동안 공부를 하였는데, 문인으로서는 나보다 먼저 신석정 시인과 조종현 시인이 여기서 수학하였으며, 직접 이 강원講院에 머물지는 않았지만, 육당 최남선과 춘원이광수도 가끔 석전 스님을 찾아와서 배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더욱 이 춘원이 스님올 따라 금강산으로 가서 삭발하고 불교에 귀의한 때도 석전 스님이 이곳의 강주로 계실 때였고, 위당 정인보도 자주 스님을 수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뿐만 아니라 청담 스님도 문하생이 되었으며, 춘원의 사촌 아우로서 해방 뒤에 한국불교 역경원의 원장이 된 경허鏡虛 스님도 이분의 가르침을 받았다.
석전 스님의 세속명은 박한영朴 漢永이고, 법명은 정호鼎鎬, 법호 는 영호映湖, 석전은 바로 이 분의
필명이자 아호이다. 그런데 그 필명이 만들어져 스님에게 전해진 내력은 그의 역사적인 위상을 잘 드
러내고 있는 까닭에 그 이야기를 아래에 간략히 소개하겠다.
스님의 철대 법조인 백파白城 스님은 조선 시대에 전북 고창 선운사의 대율사로서 어느 날 추사 김정회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고 열어보니, 거기에는 문안 인사와 아울러 석전石顧· 만암이라는 두 개의 아호가들어 있었다. 그리고‘이 두아호는 내가 짓기는 하였지만 쩍 좋아 보이니 백파 스님 당신이 둘 다 가지시던지. 하나 만 가지시고 다른 하나는 상좌나 제자 가운데에 아무에게나 주시던지. 아니면 둘 다 남에게 주시던지 자유로이 하옵소서’ 하는 추사의 뭇이 쓰여 있었다. 추사와 백파는 한시대의 인물들로서 백파가 좀 연장자이기는 했으나, 서로 그 정신의 높이를 기리어 많은 서신왕복을 이어온 터였다. 따라서 비록 서로 찾아가 만난 일은 없었지만, 이런 아호를 선사하는 일은 자신의 아호를 백여 깨 남짓 지어서 쓰던 추사의 취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걸 받은 백파는 자기는 물론 상화나 제자에게도 건네주지 않은 채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가 그가 이 세상을 뜰 무렵에야 겨우 꺼내어 상좌와 제자들 앞에 펴보이며 말하였다.
“잘 들어라.여기 적혀 있는 석전과 만암이라는 이 두 아호는 언젠가 추사가 내게 지어 보내며 ‘당신이 갖던지 제자나 주던지 하라고’한으로는 나도 너희 아닌 것 같아서

상좌한테 나누어 것인데, 내 생각도 적당한 임자는 지금까지 그대로 큰스님의 것이 되었다. 왜 냐하면 석전의 뜻은 돌같이 확실한 이마를 가진 사람이니 명석한 정신력을 의미하는 것이라서 대석학이었던 박한영 스님의 것이 되었고, 아름다운 절이라는 뜻의 만암은 사원 경영을 남달리 잘했던 그 스님의 차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렇게 영원永遠을 사셨던 이분들께 영원한 복락福樂이 있으소서!
여기에 한가지 더 적어 두 지 않으면 절대로 안될 일이 있으니, 그것은 백파 스님이 열반에 드셨다는 기별을 듣고 추사가 크게 감동하여 지어서 써 보낸 비문의 제목이다. 그 ! 비문의 제목을 추사는 백파대율대기대용지비白樓大律師 大機大用之陣라고 했으니, 그 뭇은 백파라는 대율사는 큰 스님이라서 무슨 씀씀이일지 라도 크게 쓸 줄을 안다는 것이 아닌가?
추사 자신은 아호를 지어서 누군가에게 주더라도 겨우 눈 앞의 사람에게 줄 줄밖에 몰랐는데, 백파가 그 석전 만암 두 아호를 가이없는 미래로 전하였다는 기별을 들은 추사는 백파의 그 씀씀이의 크기에 매우 감동한 나머지 이 비의 제목을 그리 불인 것으로, 내게는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