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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이야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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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산책 - 재연 2001년 06월 232호
범아일여의 경지는 베다에 정통하거나 그 게송을 정확하게 외울 수 있다고 해서 도달되는 것은 아니다. 부단한 자기반성을 통해 미워하는 마음, 시기?질투하는 마음을 잠재우고 감각기관을 제어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흔히 쓰는 힌두(Hindu)라는 용어는 서기 10세기 이후 아랍 무슬림들이 인더스(Sindhu) 강 동쪽에 사는 사람들을 일컫던 말이었다. 힌두교는 곧 그 사람들이 신봉하던 종교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따라서 힌두교라는 용어는 불교 이전의 베다(Veda)교, 혹은 바라문(Brahman)교와 구별되어야 한다. 베다, 요가, 상캬 등의 사상과의 연관 관계 속에서 불교가 생성되고 발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후 베단따(Veda-nta) 철학과 힌두교 발전에 끼친 불교의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힌두교 속에서 불교의 모습은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변형되었다. 현대 인도학의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하나인 라다크리쉬난 혹은 찰스 엘리어트 같은 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불교는 힌두교의 은근한 포옹에 질식사해 버린 것이다. 이들보다 앞서 현대 힌두교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위벡카난다 같은 사람은 “힌두교는 불교의 진수를 빨아들인 다음 내동댕이쳐버렸다!”고 공언했다. 그렇다고 불교가 영영 죽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살아 있다고 해야 할까? 혹은, 죽은 채 살아 있는 것일까? 장부아함의 여러 경전에서 우리는 초기 불교 교단과 주변의 다른 종교 집단 사이의 접촉 내지는 알력관계를 읽을 수 있다. 또 이전에 있었던 사상들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볼 수 있다. 장부아함 제 13경인 Tevijja sutta(한역 장아함 12. 三明經)는 바라문교와 그 중심에 있는 바라문 사제들에 대한 붓다의 비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경전이다. 여기서 ‘삼명三明’이란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바라문이라는 뜻이다. 이 경전의 서두에 두 바라문 청년들이 논쟁을 벌인다. 그들은 끝내 서로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말한다: “이게 바로 바른 길이요, 구원을 향한 옳은 길이다. 오직, 이 길을 따라 행하는 자만이 범신, 브라흐마에 합일하게 된다!” 팽팽하게 맞서 결론을 내지 못한 그들은 결국 고따마 부처님을 찾아와 물었다.

“깨달은 분이시여, 여러 바라문 스승들이 각기 다른 길을 가르치는데, 그것을 모두 구원을 향한 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르친 대로 행하면 궁극의 목표인 범신 브라흐마와 합일되는 것일까요? 마치 여러 갈래 많은 길들이 결국 읍내에서 만나는 것처럼, 여러 바라문 스승들이 가르치는 것들도 역시 하나로 통하는 것입니까? 그게 모두 구원의 길이며, 그대로 행하면 브라흐마와 합일하게 되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브라흐마와 합일(brahma-sahavyata)한다는 것은 궁극의 진리와 하나가 되는 힌두교 수행의 궁극적 목표를 가리킨다. 이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실로 민망스러울 정도로 쌀쌀맞다. 부처님께서는 두 젊은이가 주장하는 방법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그들이 합일되기를 원하는 브라흐마 자체에 대해 묻는다. 그 문제를 밝히지 않고는 어떤 길이 옳은가 하는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여, 혹시 세 베다에 정통한 바라문 스승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직접 브라흐마를 만나본 사람이 있는가? 아니면, 그들의 스승 일곱 대에 걸쳐 어느 한 사람이라도 브라흐마를 직접 만나본 적이 있는가?” “그런 일은 없습니다, 고따마시여!”

“그렇다면, 옛적 베다의 게송을 손수 짓고 읊었던 현자들, 그리고 지금도 옛 방식 그대로 낭송하고 외우는 바라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스스로 브라흐마를 보았다거나, 어디에 있는지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곧 그 어떤 바라문도, 위로 일곱 대에 걸친 스승 가운데 그 누구도 브라흐마를 본 적이 없으며, 옛적 베다 게송을 지은 사람이나 전통 그대로 읊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브라흐마를 보았다거나 아는 척하는 사람도 없다는 말이 아닌가? 더구나 스스로 브라흐마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보지도 못하면서, ‘이게 곧 바른 길이요, 이게 바로 구원을 향한 옳은 길이다. 오직, 이 길을 따라 행하는 자만이 범신, 브라흐마에 합일하게 된다!’고 말하는 꼴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이어서 붓다는 장님을 따라가는 장님 무리,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공주에게 반해버린 바보, 알지도 보지도 못한 궁전에 오르기 위해 네 거리 복판에 사다리를 쌓는 어리석은 사람의 비유를 들어 그들의 주장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임을 이해시킨다.

또한 계속되는 대화와 질문을 통해 진심嗔心과 오기傲氣를 가슴에 품고 세속적인 부를 축적하며 살아가는 바라문 사제들이 순수 무구한 브라흐마와 영영 합일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게 한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메마른 학문으로써의 베다에 관한 지식은 그저 ‘물 없는 사막’, ‘길 없는 정글’, ‘파멸’임을 갈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브라흐마와 하나가 될 것인가? 늘 그러하듯이 지적된 문제점 가운데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브라흐마와 하나로 합일되는 길이 다름 아닌 도덕적인 삶, 즉, 부단한 자기 반성을 통해 미워하는 마음, 시기ㆍ질투하는 마음을 잠재우고, 감관을 제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것이 곧 자신의 기쁨이니, 바른 말과 옳은 행동으로 자신을 에워싼다. 정갈한 수단으로 삶을 영위하고, 감관을 지켜 정념을 유지하는 까닭에 그는 몸과 마음으로 온통 행복하다. 또한, 그는 온 세상을 자비심으로 가득 채운다. 마치 힘 좋은 나팔수가 어디서라도 자신의 나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듯이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고 깊은 사랑으로 채운다. 이것이 바로, 젊은이여, 브라흐마와 하나가 되는 길이니라!”

우리는 먼 옛적 부처님께서 바라문들을 향해 쏜 비판의 화살이 바로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처님의 비판은 특정 종교 집단에 한정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욕망을 갖고 살아 숨쉬는 모든 중생들과 그들의 사회에 적용될 수 있다. 즉 어떤 사상이 당초의 생동감과 창의성을 잃고 정체되어 있을 때, 문제를 실천적으로 검토하고 음미하지 않고 그저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의 불교 교단과 그 구성원들이 이 경전 속에 나오는 바라문 사제가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