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은 정말 천의 얼굴을 가진 것 같다.
계절에 따라 화려하게 변화하는 모습도 그러하지만 골짜기마다 봉우리마다 천 년의 세월에 싫증나지 않는 모습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항상 설악을 아끼고 사랑해서 수없이 발걸음을 해왔다. 그 때마다 설악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게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을 하고 맞아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새로운 마음으로 단장을 하고 이 곳을 찾게 되었다.
구산선문을 공부하면서 설악은 내게 또 다른 얼굴을 내비쳐 보였는데 그것이 바로 진전사터 때문이다. 이곳 진전사는 우리 나라에 처음 선법을 전한 가지산문 개산조사인 원적도의 선사가 화려한 서라벌의 불빛을 피해 선종의 단아한 가풍을 일구면서 선불교를 태동시킨 곳이다.
행정상 주소가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라고 하지만 먼 이방의 나그네는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속초공항 뒤쪽 어디메라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이 느껴졌다.
미리 이것저것을 익힌 탓인지 주변의 삶의 모습보다는 마음은 천년이 넘은 그 옛적에 머물며 선사의 향기만이 느껴지는 듯했다.
옛 절터쯤으로 여겨지는 곳에는 새로이 사찰을 복원하려는 불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절터를 지나 조금 올라가니 새로 생긴 저수지가 보였는데 아래에 간이 집을 짓고 오징어를 말리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다. 햇살에 온몸을 뻗치고서 말라가고 있는 오징어의 인생(?)을 보니 선사가 천 년의 세월을 뚫고 나타나 순례자들에게 인생의 무상을 설하시는 것 같았다.
산허리에 자리한 곳에 있는 선사의 부도탑은 단아한 신라삼층석탑과 함께 있었다.
안정감이 돋보이는 부도와 탑은 함께 세월의 무게를 당당히 버티면서 진리의 불변을 보여주는 듯했다. 사람들은 석탑과 부도의 내면에 흐르는 선사의 사상은 읽어내지 못하면서도 외형적 아름다움과 가치를 따져 탑은 국보 122호, 부도는 보물 439호라고 번호를 붙여 관리하고 있었다.
삼층석탑은 지대석과 기단석 그리고 팔부신장이 부조되어 있는 상층기단석의 비율이 매우 안정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부도는 곁에 있는 탑과 유사한 기단부 위에 앙련 굄석을 놓고 그 위에 팔각탑신석이 놓여진 구조로 되어 있어 전형이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초기 부도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참배 후 한참을 산세와 탑의 외형을 구경하다가 솔가지 우거진 부도 곁에 앉아 선사의 삶을 돌이켜 보았다.
선사께서는 이 땅에 불교가 전해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평을 펼치기 시작한 지 500여 년이 지난 즈음에 중생들의 끝없는 세속적 욕망이 순수하기 그지없는 붓다의 사상마저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면서 오염시켜가고 있었던 신라 말에 태어나셨다.
일찍 출가하여 선덕왕 5년(784) 신라에 번창하던 불교교학을 더욱 공부하기 위하여 당나라로 구법여행을 떠났다. 선사의 시작은 그렇게 화려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구도의 정열에 청춘의 모든 욕망을 뒤로 하는 모든 출가자들과 큰 차이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당나라에서 마조도일의 제자 서당지장 선사를 만나 선법을 수행하여 체득하고 남종선의 법을 잇고 더 이상 걸림이 없는 여여한 삶을 바람같이 살게 되었다.
37년의 구법행을 마치고 다시 찾은 고국 신라는 아직까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선법에 대해 전혀 모를 뿐 아니라 전혀 이해하려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 때까지 대부분의 유학승들은 사찰이 별같이 많고, 탑이 기러기떼같이 줄지어 있는 불국토 서라벌의 불빛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선사께서 일구어 온 새로운 선사상은 궁중과 귀족의 유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스님은 도성의 소란이 영구토록 닿을 리 없는 머나먼 이 곳 설악에 자리를 잡았다.
밝은 빛을 어둠으로 감출 수 없듯이 스님께서 깊고 먼 이 곳에 암자를 짓고 숨어 지냈지만 진리에 목말라하던 젊은 구법승들에게 알려져 빛을 밝혀갔다. 스님의 법은 제자 염거화상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체징 선사가 염거 화상의 뒤를 이었다. 법을 전해 받은 체징 선사는 장흥으로 내려와 가지산에 보림사를 창건하고 가지산문의 개산조가 되었으니 서건동진한 부처님의 등불이 화려하게 동방의 불국토에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다.
내친김에 스님의 혜명이 점점이 이어진 장흥으로 달렸다. 이렇게 선사의 발자취를 찾는 길을 서두르는데는 종조 문제로 심한 정체성의 혼돈을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한 작은 몸부림이기도 했다.
보림사는 세상의 소음을 흐르는 냇물이 막아 주고, 흐트러지기 쉬운 초심자의 마음을 굽이친 산세가 잘 막아 주는 안온한 곳이었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사찰에는 신라의 전형적 모습을 간직한 삼층석탑과 통일신라 후대의 철조 불상이 있어 사찰의 유구한 역사를 당당히 전해 주고 있었다. 석탑 곁에는 체징 선사께서 직접 마셨을지도 모르는 마르지 않는 용천수가 절 마당 한가운데에서 아직도 힘차게 용솟음치고 있었다.
절에는 보물로 지정된 보조선사창성탑普照禪師彰聖塔과 탑비가 있는데 보조普照는 스님의 시호이고, 창성은 탑명이다. 이 탑은 헌강왕 10년(884)에 세워졌다.
가지산문은 중국에서 선법을 받아 들여온 스님이 직접 개산하지 않고 그 후에 법을 이은 제자에 의해 개산된 유일한 산문이다.
나말여초에 형성된 선종을 표방하며 이룩된 사찰인 구산선문은 중앙귀족들로부터 소외 받아온 지방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처음 불교가 전해질 때 왕실을 중심으로 한 포교에서 벗어나고자 함이다. 고통받는 현실에서 탈피하고자 사회의 변혁을 요구하는 계층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불교는 다시 한 번 민초들과 깊은 교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불교 역시 한반도에 골고루 분포하게 된 전기가 되기도 했다.
중생의 번뇌는 다함이 없어 어떤 시대에서나 중생들은 항상 변혁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그러한 변혁에 앞서지는 못할지언정 변화의 뒷전에서 서성이고 있다면 어떠한 사상과 이념도 잊혀지고 말 것이다.
적정삼매의 선 풍토가 산사의 고요와 너무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은 수행이란 지극히 자신의 내면과의 싸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초기 선사들의 고고한 삶의 모습과 풍토가 은연중에 우리들의 모습에 영글어 있기에 더욱 그런 것은 아닐까?결코 허둥대지 않고 고독을 즐기며, 때를 기다린 도의국사의 삶이 너무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부질없는 데 조바심을 내며 살아가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 때문이 아닐까?산사는 더욱 고요하여 깊이를 더하고 굽이치는 물소리는 더욱 힘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