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조계종사’를 정리하고 있다. 그 동안 그냥 여기저기서 그냥 주워들은 소리로 대충 알고 있었는데 강의를 할 기회가 생겨 덕분에 체계적으로 한번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교학상장敎學相長’ 즉 ‘가르치고 배우는 가운데 서로 자란다’고 하더라만 그게 아니다.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 되어 도리어 나를 길러 주고 있다 첫시간에 종헌 제1조를 함께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본종은 신라 도의道義 국사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지눌普照知訥 국사의 중천重闡을 거쳐 태고보우太古普愚 국사의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다.”
고투의 문장에다가 등장하는 인물이 세 분이나 된다. 도의국사 보조국사 태고보우국사이다. 도의 스님은 신라 말 구산선문의 최초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보조국사는 송광사 쪽에서, 태고보우국사는 해인사 쪽에서 종조로 밀고(?) 있다. 성철 스님은 《한국불교의 법맥》이라는 책을 직접 저술하여 ‘태고종조설’을 주장하여 대충 봉합해 놓은 종조문제를 다시 끄집어내어 종조논쟁에 불을 붙인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종단은 물론 불교학계에서도 종조문제는 입장정리가 덜 된 상태이다. 종헌을 처음 만든 1962년도에도 이미 그 고민이 그대로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도의 스님이 문헌학적으로 한국선종사의 최초인물이라는 사실은 별다른 의의가 없다. 스님께서는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스님의 제자인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 선사의 법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마조 선사와 지장 선사를 살펴봄으로써 스님의 가풍과 사상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겠다.
두 분이 함께 등장하는 ‘마조완월馬祖翫月’(《선문염송》 157칙)과 ‘마조백흑馬祖白黑’(《벽암록》 73칙)이라는 선문답이 전해져 온다.
마조 스님은 세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달구경을 갔다. 그리고는 물었다.
“이런 달밤에는 무엇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공양을 하는 것이 매우 좋겠습니다.”(서당지장)
“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백장회해)
이에 남전보원은 소매를 뿌리치면서 가버렸다.
그러자 스승 마조는 세 제자를 이렇게 평가했다.
“경經은 지장에게로 들어갔고 선禪은 회해에게로 돌아갔는데 보원만이 홀로 경계 밖으로 벗어났구나(經入藏이요 禪歸海요 唯有普願이 獨超物外로다.)”
마조도일 스님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다.
“모든 말(四句百非)을 떠나 조사께서 서쪽에서 온 뜻을 곧장 보여 주십시오.” “나는 오늘 심기가 불편하니 지장에게 가서 물으라.”그 납자가 지장에게 가서 물었다.
“나는 오늘 머리가 아파서 그대에게 말해줄 수 없다. 회해 사형에게 가서 물어라.”“나도 거기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다.”
그 납자가 돌아와 마조에게 고하니 마조가 말했다.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도다.(藏頭白이요 海頭黑이로다) “
마조도일(709~788)의 전기자료로는 권덕여(權德輿 759-818)가 찬술한 《홍주개원사석문도일선사탑비명병서洪州開元寺石門道一禪師塔碑銘幷序》가 1차자료이다. 이는 마조가 열반한지 3년만인 791년에 지은 것이다. 여기에는 마조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십대제자로 혜해慧海 지장 등만 나온다. 특히 여기에는 뒷날 마조문하를 대표하는 백장?남전 등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마조문하의 수제자는 《돈오입도요문론》의 저자로 알려진 대주혜해大珠慧海와 서당지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당시 마조문하를 대표한 사람은 서당지장이었던 것이다. 서당이라는 이름 자체가 선원에서 주지(방장) 다음의 상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백장회해가 마조의 제자로 부각된 것은 송나라 때 와서의 일이다. 즉 마조-백장-황벽-임제에 이르는 사가四家전통의 재편에 의한 것으로 송대 초기의 주장으로 보인다.
그리고 송본宋本 《전등록》에는 ‘마조완월’에 서당과 백장만이 등장하고 있고, 명본明本 《전등록》에 오면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이 가세하는데 이는 남전문하의 조주趙州 등장에 따른 영향으로 보고 있다. 제자가 똑똑하면 스승이 함께 뜨게 된다. 어쨌든 마조문하의 수제자인 서당지장에 대항하여 각파마다 자파自派의 스승을 중심으로 전등사傳燈史가 재편되고 있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어쨌든 마조 당시에는 서당지장 선사가 상수제자로서 부동의 지위를 구축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서당지장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문하에서 신라의 도의?혜철? 홍척 등이 수학하여 신라선문의 토대를 이룩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백장 선사는 “강서江西(마조 스님을 말한다)의 선맥이 모두 동국으로 가는가”하고 탄식할 정도였다. 따라서 우리의 조계종 전등사는 서당지장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홍척洪陟의 실상산문實相山門(남원 실상사)과 혜철(體空慧哲 785-861)의 桐裏山門(곡성 태안사) 그리고 체징(普照體澄 804-880 도의 선사의 손상좌)의 가지산문迦智山門(장흥 보림사)이 서당지장의 직계라 하겠다. 아홉 산문 중 세 산문이 지장의 법손인 것이다. 우리의 조계종사는 서당지장을 중심으로 쓰여져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신라선승들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전등사서傳燈史書는 《조당집》이다. 《경덕전등록》은 신라승들에 대하여 매우 인색하다. 그저 이름만 열거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조당집》에는 10명의 신라의 구산선문 선승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그 행적과 사상을 실어 놓고 있다. 너무 자세하다보니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씨는 신라승들에 의한 저술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고려 때 광준匡儁 스님이 판에 새기면서 신라스님들의 기록만 좀 더 자세하게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문투가 한국한문체인걸로 봐서 충분한 개연성을 가진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고려대장경 판전에 세계유일본 《조당집》이 보존되어 있다. 1912년에 발견되어 세계학계에 소개되었다. 임환경 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있을 때 목판본을 인경한 것이 현존하는 인쇄본 중에서는 가장 오래 된 판본이다. 그 뒤로 하도 분별없이 찍어대는 바람에 글자의 마멸이 심하여 최근래의 영인본은 글자가 너무 희미해 알아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유일본일수록 원판을 더욱 잘 보존해야 하는데 귀하다고 너무 열심히 보급하려는 원력이 지나치다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