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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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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만우(시인) 1999년 11월 213호
오고 감의 중간이다.
가을은, 사계의 중간쯤에서 세상의 모든 빛들을 불러 모은다. 살아나는 봄빛과 살아 편안하게 머무르고 있는 저 청록의 여름 빛. 이제 그 빛들이 잠드는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은 빛과 빛들을 모아 온통 뒤섞어 자신의 빛을 잊어 버리게 한다.
봄의 현란한 갖가지 색의 어울림. 봄은 색이 빛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다. 이 빛들의 유혹에 못 이겨 산천을 헤매는 나그네의 몸짓이 봄빛에서 느껴진다. 그러다 봄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신의 본래 면목을 문득 챙겨 볼 것이다. 꽃 진 자리. 그러나 잎속으로 꽃들이 자리를 옮기고, 잎들의 팔 벌림 속에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의 숨을 간직한 생명-열매-이 자라고 있음을 본다. 봄빛은 모든 색깔이 정렬하여 자신을 힘껏 뽐내는 계절이다.
이제 잎 속으로 스며든 봄빛은 거의 청록으로 여름을 넘긴다. 가장 강렬한 저 태양의 도전을 온몸으로 저항하기 위해서는 푸른 빛이 가장 믿음직한가 보다.
정렬된 봄빛과 동색同色의 여름 빛들이 가을에 접어들면 혼란스러워진다. 자신의 빛깔을 고집해서는 가을을 맞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을은 모든 빛이 무너지는 계절이다.
모든 빛의 색들이 무너지지 않으면 가을이 아니다. 색이 무너지지 않을 때가 한 순간이라도 있었던가
빨강, 파랑, 노랑 등 모든 색이 무너지고 무너져 내린 자리에 가을은 와있다. 무너진다는 것은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고집하고 버틴다면 무너질 수 없다. 무너진다는 것은 새로운 색과 세상의 열림이다. 모든 싹이 무너져 자신의 빛깔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가을은 문을 여는 것이다.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문득 가을인 것이다. 그 무너짐은 가장 완벽한 흐름이다.
빛을 고집함으로써 열리는 세상에 봄과 여름이라면 모든 빛을 무너지게 함으로써 새로운 빛을 세계로 펼쳐 아득하게 하는 것이 가을의 모습이다.
빛의 해체를 통한 흐름. 물이 흐르고 구름이 흐르고 그대와 내가 한 세계 속에서 함께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은 나를 없게 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자신의 허상을 실상으로 고집하고 자신을 허물어뜨리지 않는 역사는 엄격히 말해서 한번도 가을 빛이 아니다. 모든 빛이 자신의 빛을 무너뜨리고 다른 빛들과 어울려 저 앞뜰에 수 없는 세계를 보이는 가을을 보면 인간은 영원히 저 가을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면 가을이다. 문득 저 완벽한 무너짐이 저 흐름이 내 마음을 바위처럼 만든다. 나는 아직 무너지지도 흐르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 가을빛과 어울릴 수 있는 것은 부끄러운 분홍빛 얼굴뿐이다. 중국의 두목杜牧은 가을빛이 이월의 꽃보다 붉다고 하였는데 먹물 옷을 입은 내 얼굴이 가을빛 보다 더 붉게 물들고 있다.
나는 마음의 응어리가 쌓여 붉고 가을은 모든 맺힘을 풀어 붉다. 붉은빛에도 이런 차이가 있다니. 얼굴을 붉힘에는 부끄러움과 화냄이 함께 한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수치가 얼굴을 붉게 한다면 원인의 잘못을 보고 느끼는 분노가 또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다. 그리고 수치와 분노가 교차하여 한 몸이 되면 나의 얼굴은 겨울에도 붉다. 뒤돌아보면 집을 떠나 자신의 참모습을 찾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를 무너뜨려 봤는가. 부끄럽다.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일체와 하나가 되는 큰 폼을 이루어 내겠다는 서원은 어디로 갔는가. 주위를 둘러보면 모아 놓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유형 무형의 퇴적물들.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기본이고 아상我相에 주렁주렁 매달린 번뇌 덩어리들이 수미산보다 높다. 조석으로 부처님에게 경배 드리면서 계의 향기와 고요함(정)의 향기와 지혜의 향기로 깨달음을 얻어 그 깨달음의 향기로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하겠다던 마음다짐이 가소롭다. 과연 지금 세상을 향내 나게 하고 있는가. 아무리 생각하고 뒤돌아봐도 얼굴이 붉어질 뿐이다.
부끄러움이 더하는 것은, 보이고 들리는 것이 집 떠난 자들의 향기와 미소가 아니라 악취와 광음狂音뿐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에 길을 나서 본다.
눈을 들어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주위를 살펴본다. 길가에 피어 있는 작은 들꽃 하나. 그 들꽃을 바라보며 잠시 얼굴빛을 잊어 본다. 참으로 아름다운 도량이고 생명이구나.
이런 자태와 이런 향기를 어떤 도량 어떤 사람이 과연 보여 줄 수 있겠는가. 산에 천년 묵은 나무들을 베어 모아 단청으로 모양을 내어 집을 짓는다고 한들 이 들꽃의 아름다움과 견줄 수 있겠는가. 그 도량에 수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법을 설한들 저 들꽃의 향기만 하겠는가 들꽃을 보고 붉어진 얼굴을 잊으려 했더니 더 벌겋게 달아오른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계곡을 따라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잠시 멈춰 앉아서 얼굴을 불 밑에 비춰 본다. 얼굴이 붉다. 저 행인은 아마 단풍 빛에 물들어 내 얼굴이 붉은 줄로 알리라.
가을 물은 맑다. 때문에 숨길 수 없다. 만상을 오는 대로 여실히 비춰 준다. 하늘을 하늘보다 더 높게 담고 저 산을 산보다 더 깊게 담는다. 떠있는 잎새 하나, 나뭇가지 하나에도 예외는 없다. 더 자상하게 본 모습을 보여 준다. 그것은 아마 저 물도 자신을 비워내고 무너뜨린 결과가 아닐까. 봄, 여름 동안 온갖 만물을 살리고 키우기 위해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다가 이제 잎과 열매들의 바람을 모두 이루어 준 다음 제자리를 찾아 저리도 맑은 것이 아닐까. 모든 생명이 자신의 참모습을 찾으라고 무언無言의 빔을 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행도수궁처行到水窮處. 왕유王維의 시 가운데 한 구절이다.
물이 다하는 곳까지 가 본다.
물길이 끝나는 곳 물이 다하는 곳이 어딘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돌린다.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가면서 반대 방향에서 주위를 살펴본다. 저 산 위의 바위가 오를 때는 부처의 형상 같기도 하고 사람의 모습 같기도 하더니 내려가면서 보니까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별다른 모습이 아닌 것도 같고, 어떤 짐승의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한다.
저 바위는 내가 산에 오를 때나 내려갈 때나 그 모습을 바꾼 적이 없는 데 내 눈에는 왜 달리 보일까. 이 단순한 물음. 정답도 이미 나와 있는 이 물음이 나를 멈춰 서게 한다.
자신을 바라보고 낚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저 바위는 나에게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분노에 대하여 말할 때다. 타인의 잘못에 대하여 느끼는 마음의 움직임을 분노라 할 때, 때때로 또 세속적으로 일어나는 나의 분노는 과연 정당한가. 분노는 탐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화를 낸다. 그리고 성냄은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어 판단을 흐리게 한다. 이 세 가지가 마음을 어둡게 하는 가장 큰 독소(三毒)인 탐貪, 진嗔, 치痴라고 배웠다. 분노가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먼저 욕망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본다. 대부분의 분노는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는 데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열등감, 그에 따라 시기, 질투 등이 분노를 촉매한다. 저 바위가 어떤 방향에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고 다른 방향에서는 짐승의 모습으로 보이듯이 똑같은 상황을 판단할 때도 시각의 차이가 있다.
이 시각의 편차가 잘못 부딪치면 천지가 현격한 크기로 변해 버린다. 이 때는 오로지 분노고 투쟁이다. 바르게 볼려면 자신을 바르게 보면 된다. 저 바위가 모든 각도에서 자신을 보여 주지 않으면, 내가 방향을 바꿔 여러 각도에서 저 바위를 보면 된다. 그리하여 바위의 참 모습을 볼 줄 안다면 저 나무, 저 꽃, 저 물 일체를 바로 보는 눈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차츰 분노는 사라질 것이고, 만물은 동근同根이요, 세계는 한 송이 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한낱 유정有情한 내 마음의 세계일 뿐. 좀더 깊이 궁구해 봐야 참다운 이야기를 활 수 있을 것이다. 길을 떠난 지정으로 돌아와서 다시 고개를 돌려 산을 본다. 분노와 수치 때문이 아닌 저 가을빛을 받아내 얼굴이 붉게 물들 때는 언제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