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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의 길-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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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소감문 - 경조 1991년 10월 116호
산창을 두드리는 바랍에 국화 내음이 물씬 묻어오는 시월의 아침이다. 선새벽부터 짖어대는 산새의 울음소리에도 여느 때가 아니게 짙은 얘수가 스며있다. 아마도 따뜻한 보금 자리를 찾아 떠나버련 장성한 새끼 산새들이 남겨두고 간 노쇠한 어미새의 애절한 회섬곡인가.
언뜻 되짚어 새겨보매 이 산문을 찾은 지도 1년 여이다. 지난해 이맘때쯤 어줌잖은 유량생활을 마감하고 시골집에 들렀었다. 7년 여를 걸쳐두고 어머님과 맞서오던 출가에 대한 타협을 매듭짓기 위해서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기도 하지만 나의 사춘기의 여울은 깊고 험했었다. 중3 시절 고교진학문재로 부모님과 심하게 대립한 적이 있다. 자신은 도회지의 명문고교를 지망했으며 부모님들께서는 가정형편을 내세워 시팔학교의 장학생을 원하셨다. 가정의 처지를 모르는건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명예와 허영에 부푼 십대의 사춘기 소년으로선 그럴 법도 했었다. 그 무렵의 시골학교에서는 도회지 명문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진학하는게 가장 큰 영예였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매 그 시절 그 상념의 조각들 이 내 삶의 분기점을 형성했으며 현재의 내 위상을 결정지워준 것 같다.
어찌하였든 부모님의 바랩에 따라 시골학교의 장학생으로 3년을 보장받은 고교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진 학과공부 한 곳으로만 집중되어져 있던 정신들이 이쪽저쪽으로 부춰지기 시작하더니 가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며 조각나기 시작했었다.
가장 큰 변화의 시발은 그때까지 가슴 속에 간직해왔던 입신양명의 출세에의 신념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 지금껏 한 몸의 영달만을 위해 책과 맞 씨름 했었지.
“진실한 삶이 무엇인가.”
“이 생명들이 모여 사는 우주의 근본 이치는 어떤 것인가.”
“왜 우등생과 열둥생과의 차별이 생겨야 하는가”
“그네들 사이의 생각의 차이는 무엇이며 삶의 차이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학교라는 사슬에 묶여서 젊음을 허비하고 참다운 삶올 영위하지 못하는가.”
“가난과 부유의 차이는 어디서 생기는가”
또한
“왜 자신의 의지도 없이 태어나서 괴롭고 서러운 생애를 살며 지켜야 하는가?”
등 모든 현상에 의문표가 불기 시작했으며, 그저 사춘기 소년으로서의 풍부한 감수성은 늘 자신이 보는 것에 대해 부정척인 시각올 강게 하기에 충분한 상념들만을 엮어내기 시작했다. 급기야 같은 생각을 품은 친구들끼리 어올리게 되었으며, 서로의 깊은 우정을 위해 단체를 결성하고 함께 행동하며 함께 세상의 모순을 파헤쳐보자는 등, 그형게 더불어 다니면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또 이념서적에 눈을 흘리고…

그런 생활이 대학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내 동포’ 내 이웃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고 듣고 겪어 보며 그 삶 저변에 깔려 있는 생명의 애환조각들을 주워 모으는 데 더 큰 매력을 느끼게 했었다.
헌데 그런 삶에서도 인간의 온갖 모순들이 엿보였으며 작은 구석얘서부터 큰 부분까지 그 어느 곳에서나 세상이 썩어가는 비릿한 냄새들이 코끝올 파고들 때는 그런 삶올 지켜보며 생존하는 자신의 모습이 애처로워지기만 했다. 랫때원l 이런 굴래의 삶을 살려했으며, 지금껏 보고 듣고 느끼면서 과연 얻어낸 것이 무엇이며, 또 무엇을 얻기 위하여 공부를 버리고 이런 삶을 택했었는지. 다시 어떤 방법이 이런 삶에서 이 비릿한 냄새를 지울 수 있는 길인가를 모색했었다. 그때의 정열로서는 부딪쳐 싸우는 짓이 으뜸일거라는 생각이 단연 앞섰으며 또 그러하매 소위 투쟁이란 것에 몰두했었다. 헌데 또다시 부당혀오는 허무감 !
서로가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싸워대는 그 현실에서는 일말의 타협이 없었으며, 또 스스로의 자기 모순률을 고치고 개선하려는 생각들은 전혀 없었다. 권력총적 사고니 노동자적 사고니 해가면서 오직 자신의 사고와 주장만이 최선인 것이었다. 서로 자기 주장만이 옳다고 여기는 그 마음이 사라져야만이 제대로의 세상이 찾아오련만 어디 근본의 사고자체가 다른데 서로 치고 받고 싸운들 끝내 얻어지는 결과가 과연 또 생당한 것인가.
이런 삶은 무슨 의미가 있올까. 추구해서 얻어낸 결과가 정당하지 못하다면 한 평생을 그것에 바쳐 살아본들 그 삶에 가치가 있을건가 어찌 살아야 자신의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있는 것인가 지금껏 정열을 쏟았댄 그 삶도 내것은 아니었구나.
“아! 춤음이 옳은 것인자”허나 고것은 절대 아니었다. 죽는건 내 의지로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세라도 간단
히 선택하고 할 수 있지만 다시 태어난다는 건 내 순수의 의지로서 다시 얻어질 수 없지 않은자 이 순간 죽음을 생각하느니 한 삶이 없었다 생각하고선 각처를 떠돌면서 세상에 흩어진 삶의 조각들을 모아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 그 즉시 짐올 챙기고 전국일주에 나셨다. 돈이 다하면 그곳에서 일율 하고 다시 또 떠도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우리 민족, 우리 조상의 영혼의 숨결들이 살아 파동치는 산맥올 두루 섭렵했으며 서민의 애환이 그득 담긴 방방곡곡의 곡주잔올 모두 들어 봤으며 농민의 서러운 땅! 노동자의 벼 세는 단칸방 집 ! 저 골짝 약초뿌리 찾으며 생명의 뿌리를 이어가는 화전민의 움막까지 -------
헌데 또 다시 요동치는 상념의 배설물들· 그 모두가 어둠의 고통들 뿐이었으며 실체와 허상이 천도된 모순의 수래바퀴라는 생각들-------
결국 지켜보는 내 자신은 영원한 떠돌이였으며, 살아가는 그네들은 또 모두가 헛것에 속아 끌려가는 삶의 노예들일 뿐이었다. 어찌 그네들의 사고와 자신의 사고 사이에는 늘 틈이 생기고 엇갈린 삶의 방식에서 서로를 경멸하며 또 그런 삶올 맴돌아야 하는까 그 맴도는 바퀴의 구심점은 과연 무엇이며, 서로가 그 구심점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며 서로의 굴레에서만 허덕이며 매여 사는가i 그 어느 누구를 잡고 물어봐야 지금의 내 의문이 풀릴 것이며 이것을 아는 그자는 무엇을 보고 이 이치를 깨달았느냐.
그런 여운 속에서 다시 밟은 우연한 곳에서 그 상념의 실타래는 풀려지기 시작했다. 영주땅 두메산골 으속한 곳의 허름한 토굴에서 그분과의 만남이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들이요, 영원한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요, 누구 누구를 막론하고 그네들이 진리라고 외쳐대는 것들이 모두 다 완전환 실체인 것이 없으며 그 속에 묶여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삶이란 전부가 고통일 뿐인기라. 그 노출된 현상만을 보고 느끼며 허무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것인바 현재의 그것올 느끼고 바라보는 그 자신의 내면에 감춰진 실체의 너 자신을 칭아야 하느니라.”
법문 중에 스님째서 이르시기를,“야 ! 이놈아’ 하고 호령을 하신다. 법문을 듣던 청중들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스님께션 다시 “예”하고 대답올 하시면서, “그래 니들을 이렇게 부르면 ‘예’하고 대답들을 하는데 그 ‘얘’하고 대답하는 그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으면 대답해 보라”한다. 청중들은 다시 조용해진다. 스님째선 다시 “그래 당신들이 지금 내 얘기를 듣고 있지만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안보이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으며 또 듣고 있는 항신들의 본 모습이 과연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더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세간에서 하는 말이 모두들 복을 짓는다 죄를 짓는다 해대지만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그 허상 속에서 지어대는 복과 죄는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란다.
아! 그 가슴 설레이는 그 충격에 난 그분을 은사스님으로 선택했으며, 그분을 의지해서 머리를 깎으려고 1년 여의 시간올 해인사에서 보냈다. 이제 스님을 의지해서 계를 받았으며, 그분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서 “예”하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그 녀석을 찾아 다시금 구도의 길을 나서게 됐다. 실히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이 한소식을 접하기 위해서 자신이 겪어왔던 허한 삶의 조각들이 영상처럼 스치우기에 이리도 허망한 얘기들올 두서없이 적어보았다.

‘대장부에게 하늘을 뚫는 뜻이 있으니 여래께서 행한바를 좋지 아니하고 자신의 길을 고고히 가는 것도 옳은 일이요 여래의 말과 행을 그대로 좋는 일도 옳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