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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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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윤수 1989년 01월 83호
아마도 스님 가운데 일반 잡지를 발행하는 이로는 성우스님이 유일한 분일 것이다. 지난해 사월에 창간된 월간 다담(茶談)지를 올 여름부터 인수하여 ‘문화민족의 자부심을 추구하는 차생활 교양지’임을 표방하며 유일한 차 전문지로서 자리잡기까지 스님과 아홉 명의 다담지 직원들이 흘린 땀은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한다.
그래도 스님은 뜻하지 않게 시작했던 잡지일을 이제는 ‘정말 잘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보편적인 서민 문화였던 차문화를 오늘에 되살려 민족의 문화운동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으로 잡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해방과 6•25를 기점으로 강대국에 의해 많은 침해를 받아 문화가 굴절되었지요. 서구문화를 재빨리 익히지 못하면 덜 떨어진 사람으로 여기는 사대주의의 사고방식이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자양분과 같은 전통문화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모자랍니다. 민족의 주체사상을 세우는 일의 일환이지요.”
십여 년 전만 하여도 배부른 자들이 즐기는 문화에 속하던 차문화가 이제는 대중문화로 정착되고 있기에 더욱 의욕을 가지고 정성들여 잡지 일을 해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독자에게 읽히지 못한 채, 책이 되돌아오면 서운하기 짝이 없다.
사실, 불교계의 잡지는 참으로 악조건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빈약한 물적 토대하며, 팔아 줄께 실어달라는 식 혹은 기사 쓰고 광고 받아 오는 식의 부당함, 간섭하는 경영자에 저당잡인 편집권 등의 오염된 실태로 불교잡지는 질적인 성장을 저해 받고 있는 셈이다. 시어미가 많고 그래서 배가 산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풍토라고나 할까.
그런 현실 탓인지 스님의 발행 방침은 단연 돋보인다. 휘청거리는 잡지계의 오염된 풍토를 걸러주고 막아주는 일을 ‘발행인 겸 편집인’이라는 공식직함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온갖 비리를 파헤치는 르뽀기사로 가득한 월간지의 ‘폭탄적’ 위력이 혼탁한 이 사회에서 필요한 만큼 이 나이 나라 사람들의 영혼을 씻어주는 잡지의 ‘청량제’ 구실이 필요한데, 이 몫을 다담지가 떠맡을 수 있기를 바라는 성우스님은 독자들과 좀더 폭넓은 공감대를 마련하려는 욕심(?) 많은 스님이다.
1963년에 통도사로 입산한 스님에게 차와의 인연은 묘하게 맺어진다. 입산 이듬해 팔월 한가위날이었다. 그날 해질 무렵에 분주한 절을 뒤로 하고서 영축산을 거닐다가 다다른 곳이 극락암이었다. 그곳에 노스님 한 분이 앉아 계시기에 들어가 예를 드린 뒤에 무릎꿇고 앉아 보니 경봉 큰스님이셨다.
‘호랑이 앞의 쥐’와 같이 얌전하게 앉아있는 성우스님에게 이 노장스님은 차 한잔을 따라주시며, 특유의 시원시원한 밀양 사투리로 “야! 이 차 한잔 묵으라. 이 차는 차가 아니라 그 이름이 차다. 이 차 한잔 묵꼬 보리도(菩提道)를 성취하그라” 하셨다.
그러시는 큰스님의 모양새는 마치 시골집에 온 손주에게 시렁에서 곶감 하나 꺼내주며 먹으라는 할머니의 표정처럼 부드러움과 편안함이 가득하였다.
“그때 차맛? 그게 차맛인지 꿀맛인지 몰랐어요. 솔직히 말하면 큰어른 앞에서 긴장하고 있는 터이라 아무 맛도 향도 못 느꼈지요.”
그러나 이 순간의 감동-사람과 사람 사이를 편하게 매개해주는 차의 신선함-은 극락암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스님에게 ‘나도 언젠가는 이처럼 남에게 차 한잔 대접해야지’하는 바램을 심어주었다. 그 뒤 범어사로 옮기고부터 차생활이 시작되었으니 햇수로 이십사년째인 셈이다.
해인사 강원의 학인생활을 하던 성우스님은 선방과 강원이 있는데 왜 율원은 없는가 싶어 큰스님들께 건의하였다. 얼마전 열반하신 고암스님이 종정으로 계실 때의 일이다. 자운스님,
성철스님 등의 지원으로 율원이 만들어져 그곳에서 두 해를 났다. 그뒤로는 선방생활을 주로 해오다가 우리나라, 인도, 중국, 일본 고승들의 열반송과 오도송을 엮어 ‘열반사상’, ‘반야사상’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데 꼬박 세 해를 넘겼다. 자료를 구하기 위해 나라 안의 선지식은 모두 찾아다녔다. 타종단 승려건 처사건 자료가 잇다는 귀띔을 접하면 천리길도 마다않고 다녀왔다. 이젠 절판되고 없는 각각 이백여편의 선시들이 실려 있어 선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필독서가 되었다.
“태교? 아! 태교 얘기만 나오면 난 신명이 나요. 불교사상에 입각한 태교학을 내가 정리했거든요.”
혹여 애도 낳아보지 않은 비구스님이 어찌하여 태교를 말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지닌 이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그 편벽된 무지함을 불식시켜 보자.
여성이 임신하면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이 병원이지만, 제일 먼저 알리는 곳은 친정어머니이다. 그건 마음의 위안을 받기 위한 까닭이다.
스님이 홍콩에 살던 오년 사이에 ‘스님, 우리 애가 많이 아파요, 경기를 일으키네요’라며 전화를 종종 받곤 했다. 어찌보면 ‘철딱서니 없는 엄마’처럼 보이겠으나, 임산부의 육체적 건강을 의사가 맡듯이 정신적 평안은 웃어른이 그리고 되도록 종교계의 성직자가 맡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는게 성우스님의 지론이다.
팔십년도에 ‘불교문학’ 특강을 대만에서 한 것을 계기로 중국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어 그곳에 머무르던 어느 날, 전국도서전람회에 참석한 스님은 입구에 들어서서 ‘태교와~’라는 책을 보는 순간, 마치 새로운 마주침처럼 반가움을 느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싶어 제목도 채 읽지 않고 성질 급하게 구입하였다.
막상 돌아와 책을 펴니 ‘태교는 미신이다’라는 책자였다.
이때부터 스님은 태교 자료를 속속들이 모았다. 방송국의 대본까지 입수할 정도의 극성으로 자료를 모았으나 한가지로 맥을 잡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앉으나 서나 그 생각으로 골똘하여 참선을 할 때도 화두는 태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참선을 하던 차에 ‘이거다!’하는 나름대로의 소신이 떠올랐다.
“인간이 이 세상에 올 때 자기가 부모를 선택해서 옵니다. 결국 전생에 지었던 업보의 인연을 따라오니 그 업보의 구원을 소멸시키면 좋겠다는 확신으로 인과업보사상과 태교와의 접목을 시도했지요.”
행여 일본에 이 학설이 나와 있어 그 아류작을 만드는 꼴이 된다면 아예 손을 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다행히(?) 태교에 관련된 불교사상은 정립되지 아니한 형편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기분좋게 귀국하였다. 그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어 나왔으니 곧 ‘태교’라는 책자이다. 스님은 모두가 한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자신이 썼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새 생명의 탄생은 우리 모두의 소중함이기 때문이다.

홍콩 교민의 사분의 일이 모여 신앙생활을 하는 흥법원이 비었다기에, ‘교민 포교라는 큰 뜻’보다는, 참선하고 글도 쓰고 차도 마신다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주지를 승낙하였다. 그러나 막상 교민들과 마주했을 때 그들에게 있어 신앙은 ‘큰 약’임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지쳐있는 이들 곁에서 힘과 용기를 주는 푸근한 스님 역할을 해왔다.
“그곳 교민들의 신앙형태는 무척 보수적입니다. 법회 때마다 반드시 천수경을 독송하고 축원은 필수적이지요. 찬불가를 부르면 반발하고, 신도가 기증한 피아노에 대하여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서구식의 편리함대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옛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이를 신봉하고 고수하려는 오랜동안의 관습에 기인하지요.”

성우스님은 외국에서 살 때는 신념과 건강과 언어와 금전, 이 네가지 조건이 겸비되지 않고서는 몸으로 때워나가는 길밖에 없다고 한다. 교민들의 양해가 있어 지금은 한달의 열흘을 홍콩에서 지내고 서울로 온다. ‘일이 즐거워서 사는 삶’이라는 스님은 한국인이 있는 곳에 한국의 사찰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호주에 달마사를 지었다. 여건이 주어지면 중국에도 절을 짓기를 원한다.
71년에 시조로 문단에 등단한 스님은 스님의 이상을 담은 선시와 신앙시를 줄곧 써왔다. 그러나 이 일에 목숨을 걸거나 인생을 걸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다고 문학을 무시하거나 새털처럼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니다. 스님은 ‘스님이 글 쓰는 일은 결코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수행이 우선이 되지 않은 채 문학이 업이 될 수 없다는 나름대로의 소신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의 숙소는 광명시에 있다. 작은 연립주택에 불이암(不二庵)이라 이름하였다. 새벽 다섯시에 참선에 들며 하루를 시작하는 스님의 일과는 여덟시 반에 출금하는 직원에 앞서 여덟시부터 저녁 열시까지 이어진다. 하루 평균 십수명을 만나면서 잡지에 대해, 그리고 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인사동 사거리에서 민정당사쪽을 향해 걷다보면 오른편으로 월간 다담지 사무실 간판이 눈에 띄는데 좁다란 이층 층계를 올라 전통찻집 ‘다경향실’을 지나면 스님이 일하는 사무실이 나온다.
스님의 방은 열려있다. 이 방문이 닫히면 스님이 참선중이라는 ‘싸인’이다. 전화가 와도, 작가가 와도 이 시간에 스님을 만나거나 통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때를 빼고 나면 ‘진실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말하는 성우스님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람들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