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종교가 인간의 정서적인 욕구를 허위의식으로, 전도된 의식으로, 지배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왜곡시켜왔다면 이제 ‘과학적 무신론’은 이러한 욕구들을 ‘올바르게 ’반영해 내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이론이었다.
소련에서의 불교연구의 역사는 1917년 이전에도 상당히 활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바벨세프’ 마나예프, 로젠베르크와 같은 연구자는 20세기 중엽까지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이 시대에 불교연구를 집대성한 사람은 P-L스체르바츠키(ShCher-bagky)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불교논리학」(1930~32)과 「불교윤리학」(1935)과 같은 명저를 혁명 이후애 출간했다. 그의 저술은 한 인도의 역사가411 의해 “최근 250년 사이에 이루어진 가장 탁월한 불교연구”로 극찬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연구는 마르크스 래닌주의적 종교연구가들에 의해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혁명 전에 시작된 작업이혁명 후에도 지속된 경우가 었는데,그 대표적 사례가 고대 불교경전의 수집과 편집이다. 이는 주로 북방(대승)불교의 경전에 집중되었는데, 그출판은 1897년부터 제정러시아 아카데미에 의해 「Bibliotheca Buddhica」시리즈로 계속되었다. 이 작업은 혁명 후 소련 과학아카데미로 이천되었으며, 가장 주요한 성과로는 1N.토프르보(TopoIVo)의 「법구경」(1960) 편찬과 AL보스트리코프(Vosmkov)의「티뺏의 역사문현」(1962) 편찬이 손팝힌다. 보스트리코프는 객르바츠키의 제자로서 7세기경 티뺏의 불교부홍과 연관된 카말라쉴라(KaIIasila)의 저술인 산스크리트어 초고풀을 팩시밀리로 편집해 놓기도 했다.
소련에서는 북방불교, 특히 티뱃불교와 연관된 문서를 수집 ·편집 ·출간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소련내 각 박물관에 불교 관련 초고 둥의 자료들이 방대하게 소장되어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레닌그라드의 허미티지(Hemt-age) 박물관에는 엄청난 자료가 있으며, 다양한 연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N.V.디야코노바(Dyakonoa)의 「돈황의 불교유적」등 몇몇 저술을 제외하면 지금까지의 생각 만큼 성과가 많은 편은 아니라고 한다.
허미티지 박물관 외에도 여러 국립박물관에 많은 불교관계 자료가 산적해 었으나, 1920년대에 이들의 목록작업을 시도하다가 중단한 다음, 오늘날에는 이 광대한 보고를 다시 정리해 나가는 수준이라고 한다. 이 자료들은 레닌그라드의 종교 및 무신론역사박물관 둥에 소장되어 있으며, 1927년에 민속학 중앙박물관 및 동방문화박물관에서 북방불교와 라마교관련 전시회를 개최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직 소개된 바가 없는 것으로알려져 있다.
이 분야는 앞으로도 세계불교사,특히 북방 티뱃불교사 해명에 중요한구실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된다.
한편 이러한 자료들이 소련내 박물관에 소장된 전체적 과정은 소상히 알려져 였지 않다. 그러나 소련의 유명한 라마교 승려인 Agvau Dorshiev가 1930년대에 당시 티뱃 달라이라마에게서 받은 경전 선물을 기중한 것둥으후 미루어 보아 몽골, 부리야트둥의 라마교 숭려들이 소장했거나 티뱃에서 가져온 것을 이들 박물관에소장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한편 이런 흐름과는 달리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원칙에 따라 새롭게 불교를 연구하려는 시도가 혁명후에 시작되었다. 소련에서 새로운연구는 레닌의 언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레닌은 1917년 말 그 당시의 지도적인 불교학자이자 열렬한 볼세비키혁명 지지자언 CE올덴부르그(이denbl1I·g)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당신의 연구주제는 일견 우리의관심사와는 판계없어 보이나, 사실은상호 밀접한 관계가 었다. 당신은 대중과 노동자들에게 다가개 그들의수새기 간에 걸친 불행과 노예적인삶-지금은 영국의 억압올 받고 있는-으혹 점철된 인도의 역사에 대해 말하라. 그러면 우리외 프롤레타리아들이 어떻게 반웅하는가를 보게될 것이며, 그때 당신은 새로운 연구영역 즉 과학적으로 매우 의미있는영역올 찾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 따라 올덴부르그와씌르바츠키 둥은 페테레스부르크에서 대규모의 불교 전시회를 열고 대중 연설을 했다. 러시아의 불교연구와 반대되는 소비에트외 불교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이 연구는 마르크스주의의 용법대로 불교외 사회 ·경제적 기원이나 성장올 보다 과학적으로 설명혜 내려는 보다목적의식적인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의 연구자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M 레이즈너(Reysner)였다. 그는 1927년 출간된 「동방의이데올로기 :동방 신정정치의 연구」에서 불교는 봉건주의와 상업자본주의 사이의 과도기에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레이즈너는 불교란 호사스런 삶에 염증을 느끼고 패시미즘의 철학에 빠진 젊은 귀족들의 이데올로기로서, 그 명백히 반(半)신비주의적이고 반합리적인 철학은 무신론적 특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곧 비판되었고 끝내는 혜기되었는데, 불교 발생의사회 ·경제적 조건이나 정치적 환경을 잘못 분석했기 때문이다. 1935년에는 우르시노비치(Ursmovich)가 기원 전 장헤기의 북부 인도에서 ‘노예소유자’계급의 위기가 있었고 그 바탕 위에서 불교가발생했다고 껄명했다. 이는 레이즈너의 셀명보다는 조금 더 진전된 분석이었으며, 기원 전6세기의 인도는 봉건제 사회가 아니라 노예소유제 사회였다는 스트루베(Sσuive)의 견해에 의해 보강되었다.
스트루빼는 그의 연구성과를 공식 출간하지는 않았으나, A.p.바라니코프(BaIalmU‘ov), G.G.일리인(nm), V.L 아브디예프(AvCUev) 둥의 저명한 소비에트 종교연구진들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공현올 했다. 이후 이들 연구자는 「고대 인디0에서 노예제의 주요 문제」(일리인), 「마우리야 왕조의특수한 국가상황」(G.M.BongaId-I£-vin) 동의 뛰어난 업적올 남겼다. 이들 연구성과는 1963년에 열린 26차동양학자 국제회의를 위해 출판되었는데, 이 당시의 행사 명칭은 〈고대인도의 문화와 역사〉였다. 1960년대 초반부터는 이러한 불교발생 기원의 문제를 넘어서 그 이념적 발전을 규명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났다. 이러환 연구에 영감올 준 사람은 소비에트의 화가인 래리크(Rer-ikh)였다고 알려져 었다. 이후 레리크의 영향올 받은사람들은 소련과학아카데미 내에서 불교 관련 주제를연구하는 여러 연구소에서 활발하게작업하게 되었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용가드-레빈, 아시아 민족연구소의 t노프(Kychalmv), 민족지학연구소의 N.츄코프스키(Zhukov-sky), 역사연구소의 Aτ야키모프(Yakimov) 등이며, 특히 레리크의 채자인 L M쿠타소프(Kutasov)는 인도철학에 관해 흥미로운 성과률 계속내고 었다.
한편 동양의 여러 종교, 특히 불교연구가소련에서 활성화된 데는 여러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2차 세계대전 후 급속하게 종교인구가 늘어나면서 이에 당황한 소비에트 당국이 ‘과학적 무신론’올 정식화한 것이 가장중요한 원인이다. 이 당시 이후 지금까지 소련에서 종교사 및 과학적 무신론의 대표적 연구자인 SA.토카래프(Tok따ev)가 「세계종교Ah중 불교부분에 대해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은이 당시의 연구성과에 의존한 바가크다. 둘째, 1950년 이후 중국에서공산주의 정부 수립이 확실시되자 중국 및 동남아시아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1929년부터 1937년사이 완전히 사라졌던 부리야트 자치구의 불교사원이 다시 둥장한 것도이 무렵이다. 소비에트 정권은 소련의 불교 공동체가 강는 외교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의 재건은 물론 그 연구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레닌그라드의 며칠이 지나고 밤 12시에 떠나는 모스크바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볼바코프 친구들의 배웅을 뒤로 하며 444사의 눈빛올 가슴에지닌 채 어제 레닌그라드의 콘체르바르트에서 들었던 하프의 앨레지가 계속 웅웅 거렸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백야 속의 푸른초원, 그것은 표현할 수 없는 러시아착하여 우크라이나 호텔에 머물고 있는 친구 원명과 진한 홍차를 마시며 아득한 미래속에 펼쳐진 진뜩한 영혼의 그림자들을 생각하면서 긴 잠에 떨어졌다. 러시아에게 희망 있으라그런 꿈을 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