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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동경(梵動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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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89년 01월 83호
어느 때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에 계시면서 큰 비구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계셨다. 그때에 범지(梵志, 불교 아니 수행자의 일종)가 있어 선념(善念)이라 하고 그의 제자는 범마달(梵摩達)이라 이름했다. 그들 사도(師徒)는 항상 부처님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선념범지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비구중을 헐뜯었고, 그 제자 범마달은 무수한 방편으로 불법과 비구중을 칭찬했다. 이와 같이 스승과 제자는 가가 다른 마음을 품고 서로 어긋났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습관, 다른 소견, 다른 친근(親近)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이처럼 어렵고 심각한 과제는 없을 것이다. 사랑의 형태는 너무나 다양해서 한 테두리로 묶을 수는 없다. 보통 사랑이라면 자기 이외의 어떤 대상에 대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어떠한 사랑도 자기애(自己愛)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형식을 통해서 결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느끼는 대상은 반드시 사람만은 아니다. 그 존재를 인식하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흐뭇한 쾌감을 느끼므로 우리는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대상에 대하여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 송이 꽃, 그 자체는 지금까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인지(認知)함으로써 마음으로부터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것을 수(受, 받아들임)라고 한다.
그런데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게 사랑이다. 사랑의 대상이 꽃이 아이고 사람인 경우에는, 마음이 한 번 불타기 시작하면, 강렬하게 상대방을 끌어당겨서 자기 마음과 연결시켜 두고 싶은 소유욕으로 가득해진다. 이것을 갈애(渴愛, 목마르게 추구하는 욕심)라고 하며 또한 초조한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데 여기서 고뇌가 싹트게 된다. 결국 그 관계가 순탄하게 발전할 경우에는 어떠한 자기 희생도 감수하려고 함으로써 여기에는 비련(悲戀)의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순수한 사랑으로 아름답게 빛을 발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만큼 어려운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한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과 그에게 배우는 제자 사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습관, 다른 소견, 다른 친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어긋났다. 습관이란 과거의 삶에서 형성된 생활태도이다. 물론 여기에 문화의 소산과 교육 정도가 포함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시간상으로 과거에 해당된다. 과거에 익힌 것들이 비판 없이 기계적으로 이어져 나가서 부자유스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 받기 위하여 자신에게 몇 가지 색을 입혀 나가는 수고가 처음에는 우습다가도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이런 수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아무런 부담 없이 하루의 책임이 끝난 뒤 포근한 이불을 덮고 편안함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 습관이다.
소견이란 현재의 삶에서 이루어 나가야 할 생활의 목표일 수 있다. 소견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판단과 선택의 소지가 되는 조건이다. 소견은 때로 패자에게 정을 주고, 참담한 투쟁과 아픈 통곡을 껴안아 주는 것이다. 쓰러진 자를 일으켜 주고 멸시 받는 자의 이마에서 흙탕물을 씻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자비나 연민뿐만이 아닌 인내와 구도의 정신으로 고뇌를 감싸안을 줄 아는 것이다. 긴 밤의 명상 속에서도 대망의 새벽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거짓말을 탐지하고 양심을 들추어 내도록 기억을 연습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소견을 버리면 과거의 쓰라림이 유실되어 혼돈 속에 잠기므로 원초의 개선 작업은 엄두도 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친 획일화를 강요함으로써 자유로운 정신을 잃고 육체와 물량의 속박에 치우치는 갈림길에서 영악해져 버리기도 한다. 지문 때문에 범인이 식별된 뒤로는 장갑을 끼고서 범행을 하게 되고 말았듯이 모든 잠재의식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미혹과 방황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새로운 소견의 주소가 요구된다.
절망을 넘어서는 데는 친근이 필요하다. 시대의 탁류가 몰고온 비정과 무질서, 퇴폐와 궁핍, 폐쇄와 이질감들과 같은 모든 불합리에서도 끝내 빼앗기지 않는 인간의 영토요 정신의 바탕인 자유를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이성의 햇빛, 순수와 양심을 일깨워내기 위하여 고독한 대결을 펼치며 쏟아내는 땀과 눈물의 현장, 온 인생을 전부 걸어도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수 없는 귀의가 그것이다. 영혼이 깨어나 밝은 햇볕 아래서 해탈을 얻고 의욕과 질서에 충만한 곳,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보다 더 절실히 온 인류를 사랑하여 일체 중생을 품어안을 바른 가치관, 부족함이 없는 믿음과 창조의 열정이 샘솟는 것을 진실로 친근이라 하겠다.
다른 습관, 다른 소견, 다른 친근은 철저하게 나의 최선의 것이 다 쇠퇴하여 무너져 버린 뒤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어쩌면 죽임일 수도 있다. 그것은 사물에 대한 자기의 부정이므로 자신에 대한 사랑이거나 집착일 뿐이다. 그러므로 비방과 칭찬은 언제나 대립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러한 옳고 그름, 밤과 낮, 항상과 끊어짐, 참과 거짓 등과 같은 주장과 소견을 믿음으로, 의지할 곳으로, 또는 최후에 이르를 목표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신 것이다.

모든 사문과 바라문들은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수(受)의 인연을 인하여 사랑을 일으키고 사랑을 내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해 그만 사랑에 물들고 사랑 때문에 항복한다. 그래서 현재의 열반도 또한 그와 같다. 그것은 그가 접촉의 인연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만일 접촉의 인연을 떠난다면, 그런 주장을 세울 리가 없을 것이다. 나아가서 현재의 열반도 또한 그와 같다.

모든 사람은 습관에 의하여 갖가지 주장을 펴나간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62견이라고 한다. 62견은 항상하다, 그렇지 않다, 하나다, 다르다는 네 가지 주장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항상하다는 상견 하나만을 예로 든 것이다. 이러한 상견이나 단견의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임(受)으로부터 이미 이런 받아들임은 접촉의 인연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서로의 사이에 접촉이 없으면 받아들일 이유는 없어지고 만다. 마치 능숙한 고기잡이가 빽빽한 그물을 작은 못 위에 덮어 치는 것과 같다. 만일 못 가운데 있는 모든 고기들이 그물 속에 들어가서 피할 곳이 없어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황에 대한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감이 있다. 접촉이 없으면 그것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진다는 뜻이다. 자유는 방황과는 다르다. 이러한 자유는 다음에서 분명해진다.

만일 비구가 6촉(六觸)의 원인인 멸, 맛, 허물, 출요에 대해서 여실히 알면 그것이 곧 최승이 되어 저의 모든 소견을 벗어날 것이다. 여래는 스스로 생사가 이미 다한 것을 아시지만 그 몸을 가진 까닭은 모든 하늘과 사람을 복되게 하고 제도하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몸이 없다면 곧 모든 하늘과 세상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을 것이다. 마치 다라수(多羅樹)의 머리를 끊으면 다시 나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도 또한 그와 같이 이미 생사를 끊어 영원히 다시 나시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상황을 분명하게 안다. 그래서 6촉의 원인과 그 사라짐, 그에 의한 즐겁고 괴로운 현상의 맛과 그로 인하여 잘못 될 수 있는 허물, 그리고 그 속박으로부터의 벗어남(출요)에 대하여 분명하고 실답게 알면 그것이 가장 장한 일이 되어서 저의 모든 소견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사람이면 누구나가 갖고 있는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이 외부의 현상에 작용하게 되는 원인과 그 작용이 일어났다 없어지는 과정을 분명히 알며, 그 내용을 받아들임으로써 일어나는 내심의 현상과 그로 인하여 새로운 경험이나 반응을 일으키는 허물 그리고 적절치 못한 순응으로부터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잘 아는 것이다.

역사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사람은 그 역사 속에서 어느 방향으로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우리가 어떤 길이든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여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될 나그네로서의 숙명이 있는 것이다. 강물이 흐르는 것은 낮은 곳으로 향한 지세에 따르고, 타는 불길은 바람에 따라 번져간다. 자연의 법칙에는 선택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는 데 고민한다는 것은 자유의지의 한 모순이라고 할까. 우리는 누구나 망서림과 방황을 경험하며 또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이내 후회하고 우수에 빠지곤 하는 일을 체험해 왔다. 원시인은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선택의 고민이 없었다. 문화가 발전하여 생활의 길이 관념의 길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오늘날에는 자연의 길이 아니요, 인위의 길이기에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길은 우리의 역사적인 현실에 가장 적합한 길이어야 한다. 또한 역사는 인간의 것이요, 인간이 주체이기 때문에 자연계의 법칙처럼 필연적이고 인과율적인 기대만으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현실적응성과 조절가능성으로 언제나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한 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오해는 한 때요 신념은 영원한 것이다. 어떤 길이 바른 길인가. 신념의 사람, 양심의 사람만이 이 길을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