ㄹ.서원안락행품(誓願安樂行品)
4안락행의 넷째에 해당하는 것은 서원안락행이니, 부처님 멸도 후의 악세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자가 마땅히 가슴 속에 지니고 있어야 할 서원에 대한 언급이시다.
서원이라면 반드시 이루고자 마음에 기약하는 일인점에서 범부 또한 다소간에 무엇인가 성취함이 있을 때는 그 나름의 서원이 그 추진력으혹써 작용하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구나 성자들이 이루어낸 불사에 있어서야 위대한 서원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미타불을 있게 한 원동력은 법장보살이던 때에 일으키신 사십팔원(四十八顧)에 있었다 해야 하고, 약사여래와 그 십이원(十=願) ·석가모니불과 그 오백대원(五百大願)에 있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면 후세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자는 어떤 서원을 일으키라 하셨는까 “또 문수사리여, 보살마하살로 후일의 악세, 법이 멸하려는 때에 이 법화경 수지 곧 하는 자는, 재가· 출가에는 대자심(大현心) 나타내고, 보살 아닌 사람에 는 대비섬 나투-어서, 웅당 이리 생각하되, ‘이런 사람들은 페 잘못 범해 여래께서 방편으로 근기 따라 설하심을 듣지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며 묻지도 믿지도 이해도 못하나니, 그 사랍이 이 경전을 묻고 믿 고 이해하지 못한대도, 내 아녹다라삼약삼보리 얻게 될 때 온다면, 어디에 있건 신통과 지혜의 힘으로써이를 이끌어 이 법 속에 주(住)하게 하리라’ 하라.”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재가·출가’와 ‘보살 아닌 사람’의 정체를 구명하는 일이다. 소위 우바새 ·우바이를 재가라 하고 비구 ·비구니를 출가라 함은 하나의 상식이나, 여기서는 이를 대자심에 결부시켜서 대비심의 대상인 ‘보살 아닌 사람’과 구별하고 있는 점에서 통상적인 용례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출가는 출가의 행위만으혹는 끝나지 않는다.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아 비구·비구니의 신분이 되었다 해도 마음은 여전히 가정을 중심한 세속의 일에 얽매어 있다면 진정한 출가는 못되는 까닮이다.
그러므로 겉모습이 재가에 속하고 출가해 속하는 것과는 관계 없이 견혹 ·사휴(思感)을 끊어 삼계(三界)에서 벗어난 이는 출가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재가라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부류는 그 정상에 이르렀다 해도 정작 무명혹(無明感)은 남겨 놓고 있는 점에서 성문·연각으로 치면 삼장교·통교의 그것이요, 보살인 경우에는 삼장교·통교·별교의 한계를 못 벗어난다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다시 원교의 제호미를 주어야 하리니, 이들을 대자심으로 대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편 ‘보살 아닌 사람’이란, 방편의 보리심마저 일으킴이 없는 범부들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들 또한 원교로 제도되어야 마땅하긴 해도, 우선 그들을 태우는 생사의 불부터 꺼주어야 하겠기에 대비심으로 대한다 하신 것이니, 자(慧)와 비(悲)가 체(體)는 하나라 해도 그 용(用)에 있어서는 스스로 독자적 영역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리하에 삼교(三敎)의 보살·이숭(二乘)이거나 애초에 구도하는 마음도 일으키지 못한 일반 범부거나, 이들 모무를 자비로 대함이 되거니와, 그러면 서원의내용은 무엇인가 앞의 인용문에도 드러나 있듯, 깨달음을 얻는 날이 온다면 이들 모두를 법화경의 진리속으로 끌어들이겠다 함이 그것이다. 일반 범부는 고사하고 성문·연각·보살마저도 구경(究竟)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까운 까닭이니, 일체를 구하려는 이런 비원이 뒷받침되지 않은들 법화경의 법사가딛고 설 땅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상으로 안락행의 설명은 일단 끝난 것이 되나, 여기서 논해진 것은 부처님이 안 계신 후세에서 범부인 법사가 어떻게 이 경올 설할 것인가 하는 일이었다. 문수·보현같은 대보살이라면 아무리 악세라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터이지만, 어차피 후세에서의법화경의 운명은 범부의 손에 매어 있기에 이 안락행이 설해진 것이니, 범부가떠맡는 바에는 신구의(身口意)의 삼업을 깨끗이 하고 서원을 확고히 하는 외에 달리 길이 있을 수 없을 것은 자명하지 않겠는가
口. 계주유(鷄珠隔)
안락행을 설해 마치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셨던지 부처님은 다시 비유를 설하시니, 그것이 계주유다.
“문수사리여, 비유컨대 강력한 전륜성왕이 위세로여러 나라 항복케 하려 하되 소국 왕들이 그 명을 따르지 아니하거늘, 때에 전륜왕이 강가지의 군사를 일으키어 가서 토벌함 같으니라. 왕이 군사들 중 전공있는 자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공 따라 상을 주되,혹은 전택 ·취락(聚落) ·성읍을 주며, 혹은 의복과 장신구를 주며, 혹은 갖가지 보배-금·은·자거 ·마노·산호·호박과 상마(象馬) ·거승(車乘)과 노비 ·인민 주었으나, 오직 상투 속의 명주(明珠)는 주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어뇨. 흘로 왕의 머리에만 이 보배 있는 터에, 만약 주면 왕의 모든 권속이 필시 크게 괴이쩍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니라.”
전륜성왕은 교화를 펴시는 부처님을 비유하니, 여러 나라를 항복케 하려 한다는 것은 오온·십이입 ·십팔계를 다스리려 하시는 일이다. 소왕은 마의 버유여서 곧 번뇌를 이르고, 그것이 명을 따르지 않는다 함은 조복(調代)되지 않은 채 날띔을 가리킨다.
강가지 군사를 일으킨다 함은, 칠현(七賢)중의 수행을 전군으로 삼고, 수다원 ·사다함의 수행을 중군으로 삼아 번뇌를 치는 일이다.
공을 따라 상을 주는 일에 대해 경은 스스로 해석하여, “여러 경 설해 주어 마음 기껍게 해 선정 ·해탈과 무루의 근력(根力) 따위 여러 법재(法財) 내리며, 또 열반의 성을 주어 멸도(滅度) 얻었다 일러 그 마음이끌어서 모두 기쁘게 해 줌이다”하셨는데, 천태대사는 전(田)은 삼매요, 택은 지혜요, 취락은 초과(初果) ·이과(二果)요, 읍은 삼과(三果)요, 성은 열반이, 의복은 인욕이요 장신구는 조도법(聊훌法)이요 칠보는 칠각지(七覺支)요, 상마·거승은 이숭의 진지(盡智) ·무생지(無生智)요, 노비는 신통이요, 인민은 유루선(有홉善)이라 하여 해석이 자못 상세하다.
그리고 상투 속의 구슬은 주지 않았다 함은, 전공에 버유된 수행이 기껏 방편의 가르침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법화경은 셜해 주시지 않으셨음을 뭇할 것이다. 그러면 상투 속의 구슬은 어떤 사랍에게 주는자“문수사리여, 전륜왕이 군사들의 큰 공 있는 자 보고 매우 기뻐하여 이 좀체로 믿어지지 않는 보배,-오래 상투 안에 간직하여 좀체로 주려 들지 않던 그것을 이제는 선뭇 내줌 같으니, 여래 또한 이러니라. 삼계 중에서 위대한 법왕 되어 온갖 중생을 법으로 교화하되, 현성(賢聖)의 군사들이 오음마(五陰魔) ·번뇌마(煩腦흩) ·사마(死農)와 싸움 벌여, 큰 공이 있어 삼독 멸하고 삼계에서 벗어나 마의 그물 깨는 것 보고’ 그때에 여래 또한 크게 기뻐하여 이 법화경, 중생들로 일체지(‘생播) 이르게 하며 온갖 세간에서는 적 많아 믿기 어려운 탓에 일찍이 설하지 않았던 가르침을, 이제는 드러내 설함이니라.”
큰 공이 있는 사랍이란 공을 깨닫되 그것마저 떠나 현실로 돌아와 그 다양한 차별에 대처해 가는 사람들이다. 구슬은 법화경의 가르침이니, 그것의 둥근 것은 중도의 원교(圓數)임을 나타낸다.‘ 구슬에는 다른 물건과는 달리 상하·좌우가 없고, 처음도 끝도 없고1 중심과 변두리도 없다. 보기에 따라 어느 곳이건 위도 되고 아래도 되며, 중심도 되고 변두리도 되니,위와 아래가 다르지 않고 중심과 변두리가 하나라 할 만 하다. 이는 방편이 곧 진실이요, 진실이 곧 방편인 것과 합치하며, 생사와 열반·번뇌와 보리가 그대로 상즉하는 도리에 어올린다.
그리고 구슬이 상투 속에 간직돼 있음을 진실이 방편에 의해 숨겨져 온 사실을 가리칸다고 해석한다면, 상투를 풀음은 개권을 가리키고, 구슬을 꺼내서줌은 현실(顯實)의 비유라 할 것이다. 또 구슬이 전왕의 정수리에 있는 점에서 생각하면, 이 중도의 최고의 진리임을 드러내신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화택유·궁자유 등으로도 다하지 않으시는 부처님의 요셜변재(賴擁才)는 다시 이 계주유에서도 십분 발휘되시니, 지성에 호소하는 데 안 그치고 시나 소설처럼 감성으로 직접 느끼게 해 주시는 점에 법화경의 특질의 하나가 있는 듯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