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입구에서 한참을 걸어 올라서 운암에 다다랐을 때, 성파스님은 한낮의 가을 햇살이 따가워서였을까. 둥근 모자를 쓴채 염색전문가 두엇과 함께 쪽빛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극락의 빛깔이며 불교의 색깔인 쪽빛은 흔히 남색 ·곤색 ·옥색 ·비취색 ·하늘색으로 불리는데, 우리보다 먼저 깨친 사람들이 극락의 세계를 수용해 아직 깨치지 못한 중생에게 담아다 놓은 빛깔이라고 한다.
스님은 한참 동안 쪽풀을 항아리에 옮겨 담으며 물을 붓기도 하고, 이미 울궈낸 쪽물을 따라내며 장독대에 서 있었다.
본절도 아닌데 장독대의 항아리가 너무 많다 싶었는데 김장 항아리에다가 쪽풀을 울궈내기 위한 항아리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나 보다.
스님이 극락의 빛깔을 만들어 내기에 세상사를 잊고 있는 동안, 서운암을 둘러 보았다.
도자기를 굽는 몇 개의 가마며, 이미 구워낸 도자기 경판을 보관한 창고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마에 불을 당기며 아궁이 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눈을 떼지 않았을 스님의 모습을 얼핏 떠올려 보았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삼배 올라고 위를 올려다 보니 도자기로 만든 삼천불이 굽어 보고 있었다. 그 숫자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끼며 법당을 물러나왔다.
법당에서 나오니 쪽물에 물들인 삼베며 명주가 빨랫줄에 펄럭였다. 이윽고 스님은 극락의 빛에서 눈을 떼며 스님의 거처로 발길을 옮겼다. 방안 여기저기 널려 있는 크고 작은 도자기들, 벽에 걸려 있는 그림과 물감들, 그리고 벽에 기대어 있는 책들의 종류와 분량은 스님이 불교문화에 얼마나 많은 관심과 공부를 하고 있는가를 짐작하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머리맡이 될 듯 싶은 곳에 도자기로 구워낸 팔만대장경 경판 한 장이 빛을 발하며 스님이 역사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스님은 지난 6월 30일 서운암에서‘16만도자대장경조성불사’업제식을 치뤘다. 팔만대장경을 16만3천판의도자기로 구워내 길이 보존하기 위한 스님의 염원이 첫발을 내디디며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분단조국의 통일발원으로 시작된이 불사는 오랜 동안의 준비 끝에 시작되었다. 스님은 도자대장경조성을 계획하자 곧흙의 성질이며 유약, 소성방법부터 꼼꼼히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도자기를 위한 도자기가 아니고 불사를 하기위한 도자기이기에 완벽하게 구워낼 수 있을 때까지 한시도 도자기에 대한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경판을 구워내는 일은 우리나라 요업계에서도 처음 있는 일인 만큼 여타의 도자기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려워 그만큼 준비 기간이 길 수밖에 없었다.
도자기에 전혀 문외한이었던스님에게 도움을 주거나 기술제공을 한 사람은 없다. 특히 이쪽 계통 사람들은 도움주는 것에 인색했다. 그래서 스님은 혼자 공부하며 도자기의 성질을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지난 10년 동안 ‘도자기를 알려고 오만짓을 다했다’라는 것이 스님의 표현이다.
도자기의 성질에 웬만큼 눈이떠질 무렵, 서운암내에 가마를걸고 삼천불을 빚어 도자기로 구워내기 시작했다.
도자기 대장경불사를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말이 준비작업이지 삼천불을 흙으로 빚어 불에 구워내는 일자체만으로도 방대한 불사였으리라. 삼천불 하나하나에 통일의 꿈을 깎고 다듬었던 그 정성에서 스님의 도자대장경불사에 바치는 열정이 얼마나 깊은가를 짐작할 수 있다.
준비작업은 도자기 자체를 공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대문화와 서양의 기독교문화의 정신이 종교적 차원에서 건축이나그림, 조각 둥에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는가를 알기 위해유럽으로 인도로 답사여행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동서양문화를 비교하며 미술관, 박물관 둥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도자대장경불사에 대한 계획을 다듬었다. 그러한 10년간의 공부와 체험 끝에도 자대장경불사는 시작된 만큼, 처음 경판이 구워져 나왔을 때 누구보다도 스님의 감회가 깊었으리라.
“소감은 무슨, 잘 구워져 나왔다고 좋고 잘 안되었다고 좋지 않고, 그런 마음을 내어서야 되겠는가 안 되면 다시 하면 되지. 그저 담담했어요 어차피 되어질 일이니까.”
입제식을 가진 후 지금까지완성된 것이 700판, 구울려고 하는것이 4천판인데 스님 혼자만의힘으로 16만장을 구워낸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상상으로 헤아리기 어렵기도 하다. 인부를구해 흙올 실어 나르고, 경판을 만들어 구워내는 일, 글씨를 새기는 일, 이 모든 것을 누구의 특별한 도움없이 스님 혼자 총괄해야 하기에 더욱 그런생각이 들었다.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으로 대장경을 조판하던 일도달리 생각하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무기를 재조하고 병사를 양성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려국은 군사력의 양성보다 대장경조성불사에 힘을 기울였던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전쟁이 단순히 물리력이나 군사작전에 의해 결판나지 않으리라는 생각, 다시 말해 긴역사적 안목과 시대정신의 총화로국민적 단결을 이루는 것이 더욱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불사에 나서게 된 것 아니냐는 거지요
오늘날 우리의 통일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서로 다·른 체제와 가치관을 가진남북의 두 집단이 서로가 서로를잡아 먹는 식의 통일올추구하는데 어떤 통일의 결말이있겠습니까. 끝없는 대립과 갈등이 상존할 것이고, 6 ·25와같은 바극이 되풀이 될 뿐이지요
분단을 고착화하는 이러한 물리력에 의한 통일을 지양하고 부처님의 가피와 시대정신의 승리가 곧 통일의 바른길이라는 신념으로 도자팔만대장경을 만드는 불사를 시작했습니다.”
불사의 의미를 강조하는 스님의 말씀에 또다른 힘과 신념이 넘처나 보여 잠시 가슴 깊이 통일의 새로운 길이 열려지는 듯싶었다.
“통일발원으로 대장경불사를한다고 해도 모두들 다른 일하는데 바빼 한사람도 거들떠 보지않아요 특히 외면하고 비방만하지. 그러나 역사는 아혼아홉 사람이 비판해도 한 사람이 정당하면, 비판했던 사람은 서리같이 사라지고 한 사랍의정의는 남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요 일각에선 불교를 호국불교다 하여 어용으로 몰아부치고 있지. 불교인 자체도그런 소리를 하는데 그건 역사를보는 안목이 짧기 때문이에요 종교가 정치를 리드하고, 정치가 종교를 융합했던 시절의 호국개념을 이 시대에 적용시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지금타종교에선 통일문제연구소 같은 기구를 설치해 통일에 대환체계적인 연구를 하며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무엇을 하고있습니까? 기껏해야 보살들을 모아 통일방생법회나 갖고있는데, 그것은 일시적일 뿐역사에 어떤 야야기훨 남길 수는없어요 혼히 불교는 무상이기 때문에 자료가 필요없다고얘기하는데, 조직사회에서는그렇지가 않아요 우리 뒤에 올사람들이 참고 오를 맛줄이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역사의흐름 속에 핫줄을 던져놓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스님은 도자팔만대장경불사를 회향하는 날, 어떻게 해서 이러한 불사가 시작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회향되었는가를 경판에 새겨둘 작정이다. 10년 후 쯤,우리는 그 행간에서 스님의 좀더 구체적인 통일에의 염원과 대장경불사에 바친 신념을 읽을 수 있으리라.
스님은 대장경불사를 하는 중에도 틈틈이 사경을 하고 었다. 전시회를 가졌을 만큼 사경에조예가 깊은 분이다.
“사경은 감지에 금니, 은니로부처님의 말씀을 새긴 것으로 부처님을 향한 가장 성스러운 일이지요. 경전을 최고로 존중한다는 의미가 담져 있어요. 종이에 쪽물을 들언 것이 감지인데, 감지는 천년이 지나도 바로 만든 종이처럼 깨끗하지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훼손되지 않는데, 쪽풀 자체가방충 ·방부제 역할을 하기때문이지요 먹지에 사경을 하면서 감지를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 안타까워 하다가 3년전에 알았어요. 먹지에 써도 되지만 7년을 고생한 생이지요.”
부처님의 말씀을 적어 길이 보존 ·전승할 수 있기 때문인지 그렇게 말하는 스님의 음성엔 잔잔한 기쁨 같은 것이 배어있었다. 그러한 기쁨은 이 땅에선 이미 멸종 되어버린지 오래인 쪽풀을 수입해 서운암 근처에 섬어 기르고 있는 것에 잘 나타나있다.
우리 문효싸산을 전숭 ·보존하려는 스님의 노력은 ‘옹기백서’를 만들려 하는 데에도 나타난다. 우리 선조들이 사용했던 옹기 수천 점을 재현 ·보존시킬 계획인데, 전문가들에게 각지에 흩어져 있는 옹기를 수집해 보라고 일러둔 상태이다. 이미 스님이 소지하고 있거나 그들이 찾아낸 옹기들을 모아 잊혀진 옹기의 이름과용도를 밝혀내 용기사전을 만들 작정이다.
또, 민속자료에 관심이 많은스님의 수중엔 이미 적지 않은 옛 물건들이 들어와 었다. 언젠가 서운암내에 민속박물관을 지어이들을 전시해 놓고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선조의 숨결이 셔련 문화를 느끼게 할생각이다.
통도사에서 출가, 통도사 주지를 지내기도 하셨던 스님은 ‘엎어버리기 잘하는 것이 내 건강의 비결’이라며 굳이 수행에 정진했던 젊은 시절을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나쁜 점은 되도록 덮어두고 좋은 점만을 보며 어른을 모실 줄 아는 세태가 점점 사라져 감에 아쉬움을 표하였다.
“세상엔 완벽한 사람이 없어요 훌륭한 어른은 아랫 사람들이 만드는 거지요. 누구에 대해 시비를 가리기 전에 자신을 봐야해요 밖을 먼저 보지 말고자신부터 되돌아 보면 시비가 있을 수 없지요. 도를 깨쳐 성불한다는 것은 놔두고라도 일상생활에서 자기 자신을 봐야지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놓아서는 안돼요”
그런 말씀으로 스님은 치열하게 몰두했을 지난 날의 얘기를 대신했다.
도자기 굽는 일에 주로 하루를 활애하신다는 스님은 인터뷰 내내 맨발이셨다. 사진을 찍으러 밖으로 나가시는 스님에게 “양말을 신으셔야지요”
여쭈었더니 “양말은 와신노?”하며 돌아보셨다. 스님의 그러한 반문은 버려도 좋을 것들을 움켜쥐고 세속의 습에깊이 물들여진 기자를 부끄럽게 했다.
“하루에 50장씩을 구워낸다 하더라도 10년은 걸리겠지. 더 빠를 수도 더 늦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스님의 뒷모습에서 문득 역사를 엮어기는 이의 경건함 같은 것이 엿보였다.
그 경건함이 우리의 역사, 인류의 역사를 만드는 계기가 된다면 우리는 불교문화를 전승 ·발전시키려 애쓰는 스님을 외면해서는 안되리라.
몇 백년, 혹은 몇 천년 후 흙을 정제 ·반죽하여 경판올 구워내던그 정성 속에 얼마나 애타는 통일의 비원이 담겼었는지를. 그리고 한 승려가 그것올 위해얼마나 많은 땀올 흘렸는지를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가을 햇살 속에 저물어가는 영축산 자락에 그런 물음을 던지며 서운암을 내려왔다.
글 / 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