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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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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 김호성 1991년 10월 116호
열반(nibbal1a)은 불교의 궁극적 의미이다. 초기불교의 열반은 탐욕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의 소멸이다. 마치 불이 꺼진 것처럼, 삼독(三毒)의 불길이 꺼 진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의 구별이 있고나서, 부처님의 돌아 가심은 무여열반으로 칭송되었던 듯하다. 부처님의 죽음을 ‘열반’이라고 부르게 된 뒤부터는 큰스님들의 죽음도 역시 열반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삼독이 삶의 장애이자 수행자에게는 시험이듯이, 죽음은 정녕 마지막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선가에서, ‘납월 삼십일’이니 ‘눈빛이 땅 에 떨어질 때’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 마지막 시험을 늘 의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때를 당하여는 명소의 지식도 소용없으며, 조그마한 복덕이 무슨 효력을 가져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실참한 선정력만이 그 큰일을 감당하게 해준다. 명소에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이때를 당하여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열반은 참으혹 염속한 우리들의 실존적인 모습이다.
한암선사. 적어도 스님만은 우리에게 그러한 열반 燦漫의 참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참으로 어려운 이 일을 두번이나 시현(示現)한 것이다. “말할 때 는 깨달은 것 같아도 경계를 당하면 오히려 미(迷)해진다”고 한 서산(西山)스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참으로 스님의 경계는 불가사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두번에 걸친 열반의 삶은 모두 전쟁이라는 한계상황에서 일어난다. 그만큼 선명하게 부각되어 온다. 전쟁의 한계상황만큼 우리의 진면목올 유감없 이 드러내주는 상황도 없올 것이다. 명소의 위선이 그 가면을 벗게 되는 순간들이다.
첫번째 열반의 삶은 오대산 내의 100여 명 대중과 산판에 었던 1,600여 사랍들이 모두 오대산올 떠나 남으로 피난하였을 때 일어난다. 그때 오대산 내의 사암과 민가들이 적의 은신처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작전상 소각의 명령이 떨어졌다. 적이 사찰을 이용해서 이쪽에게 손실을 강요할 때 말하자면 사찰은 흉기 또는 거대한 하나의 엄폐물에 지나지 않으며, 사찰은 다시 지을 수도 었다는 논리였다.
하여튼 소각의 명령을 받고 심야에 대원들을 이꿀고 상원사를 찾은 장교는 그 뜻을 스님께 아뢰었다.
명령이라는 장교의 말을 들은 스님은 장교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이르고 나서, 가사 장삼을 입으시고 나서 법당으로 향했다. 불상 앞에 정좌하고 난 뒤 합장하였다. 한참을 그러한 자세로 앉아있던 스님의 입에서 나지막하나마 아주 또렷한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제 불을 지르시오”
“뭐라고요?”
“이제 불올 지르시요”
“스님,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이들의 실갱이는 조금 더 계속된다. 스님은 그 젊은 장교를 다음과 같이 책한다.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나는 불제자, 곧 부처님의 부하, 어쩌 깨닫지 못할까. 그대가 장군의 명령을 따르듯이 나는 부처님의 명령에 따라야 된다는 것 ”
이때, 스님은 부처님과 함쩨 열반에 들고자 마음 먹었던 것이다. 군인이 호국을 위해 명령에 따르듯이, 스님은 호법을 위하여 열반에 들고자 한 것이다. 호국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여느 경우와는 달리 호국을 위해서 불법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속제(佑請)를 위하여 진제를 포기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속제를 위해서 진채를 포기할 수 없을 때 진제의 입장올 취하는 사람은 순교 외 길을 선택한다. 또한 이때 보여준 스님의 태도는 스스로를 죽일지언정 남올 죽이지 아니하면서, 남을 감화시키는 비폭력(ahInsa)의 구현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이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떼어 내게 하여 소각하고 돌아간다. 이래서 상원에는 월정사를 비롯 다른 암자들이 모두 소각될 때에도 소각되지 아니하고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생사의 경계(境界)를 맞이하여 의연히 죽어가겠다는 모습, 그것이 구경열반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러한 스님의 생사일여(生死一如)와 비폭력의 실천이 소셜가 선우 휘로 하여금 「상원새」라는 단편소설을 쓰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상원사」라는 소설이 그때의 상황을 리얼하게 재현하여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었다 (이 「상훤사)의 일부가 한때중등교육의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었다는 사실은 주목되어야 한다).
두번째 열반의 삶은 대중들이 피난을 떠나면서 스님도 함께 가시자고 권했을 때 보여진다.
“생사좌당(향f짧當).”여기서 열반을 넘어가겠노라는 말씀이었다. 끝내 오대산을 떠나지 않는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첫째, 스스로 열반에 들리라 마음먹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죽음이 온들 피할 게무엇이란 말인가.
둘째, ‘오만(五萬)의 성중(聖聚)들이계시는 생지(聖地) 오대산을 버리고, 부처님을 적막강산에 버려두고 다 떠날 수는 없지 않은자 누구라도 남아야 한다면 내가 남아야지’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원래 오대산에 들어갈 때 종신(終身)하기로 한 터이고. 그것이 셋째 이유가 되겠다. 처음의 발원이 아직 살아있었먼 것은 아닐까.
모두가 피난을 떠난 지 두달 쯤 지난, 1951년 3월초 스님께서 미질을 보이셨다. 7일 동안 눕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앉으셔서 병마를 항복 받으시었다. 그리고 제7일째 되던 날 아침에 죽 한그릇과 차한잔을 드시고 손가락을 꼽으며 이르기를 “신묘, 2월14일이로다”하시고, 사시에 가사와 장삼을 입으시고 선상에 단정히 앉아서 의연한 자세를 강추고 열반에 드셨다. 이른바 선가에서 말하는 좌탈입망(坐脫立亡)이다.
보조스님은 「진심직설」의 ‘진심출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대로 스님의 열반을 두고 하신 말씀인 듯하다.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하는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는 것만 같지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는 것은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사가 없음을 알지도 못하거늘 하물며생사가 없음을 체득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며,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오히려, 범인(凡시들은 생사가 없음을 알지도 못하거늘 스님은 생사가 없음을 몸소 활용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참으로 회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스님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던 맹세 그대로, 다시는 오대산 동구미를 나오지 않고, 스스로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되어 훨훨 날아갔다. 스님의 「비명(陣銘))을 쓴 제자 탄허 스님의 말씀대로, ‘반고씨(盤古民) 이전의 궁극의 세계로’ 들어가신 것이다. 파리닙바나(painibbana), 완전한 열반으로 그러나, 부처님은 열반을 통해서 우리에게 살아 있듯야 스님 역시 이러한 열반을 통하여 언제까지나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스님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더 새록새록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시인 서정주(徐廷柱)가 말했듯이, ‘죽은 채로 살아있는’ 그런 열반의 삶을 통하여. 서정주는 「方漢岩輝師」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스님의 열반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난리 나 중들도 다 도망간 뒤에 노스님 홀로 남아 절마루에 기대 앉다. 유월에서 시월이 왔을 때까지속을 비우고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버워선 江南으로 흘러 보내고 죽은 채로 살아 비인 용기 항아리 같이 반듯이 앉다.
먼동이 트는 새벽올 담고비인 용기 항아리처럼 앉아있는 걸 해온 병정들이 아침에 다시 보다.”(全文) 이때가 1951년 양력 3월 22일, 음력으로는 2월 14일이다. 세수 만 7땅{l, 법랍 54세.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1951년 5월 8일(음력 4월 3일) 49재를 맞이하여‘살아남은 자’들은 모였다. 피난 수도 부산시 토성동묘심사(妙ι츄)로 적막강산 오대산에서 혼자 돌아가시게 한 최책감을 저마다 가슴에 담고서 모였다. 그리고 ‘고교정방한암대종사봉도법회(故數正方漢岩大宗師奉掉法會)’를 가졌다. 이를 위해서 경남교구 종무원스님들이 중심이 되어서 ‘고교정방한암대종사봉도회’(대표:훨다可스님)가 조직된다. 또 봉도회의 성립과 임원, 조사, 조문객의 시주 내역, 지출 둥이 정리된 「고교정방한암대종사봉도회록」이 출판되었다.
이 귀중환 자료는 경봉(鏡峰)스님께서 소장하고 계시던 것으로 현재, 명정(明正)스님이 보관하고 있다.
이 봉도법회의 조사 중에서, 월정사 주지로서 스님을 늘 모셨던 이종욱(李鐘都)스님의 조사 한 구절이 당시의 슬픔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심정을 가장 잘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 인용해 둔다.
“아 ! 스님이 가시오니 오대산은 이제 공허하여지고 삼천만은 귀의처를 잃었습니다. 도를 구하는 자 어데가서 문도하오며 마음을 닦는자 누구에게 지도를 받아야 하오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