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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 신해(法性偈 新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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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91년 10월 116호
일미진중함시방(一般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깨빼是)

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새계 머금었고
일체의 티끌 속도 또한 다시 그러해라.

나의 이 한 폼은 여러 가지 인연이 모여서 이룩된 것입니다. 한 물체가 이룩되거나 커다란 구조물이 이루워 질 때에도 여러 조건과 물질들이 함께 균형을 이루어서 성립이 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연법 또는 법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여러 조건과 인연은 나를 또 연으로 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건물이 모래 ·쇠 ·물 등 다양한 조건들로 이룩되어지지만 이 건물이라는 이름 속에 포 함되고 섭수되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연(緣)으로써 나를 이루지만 나 에게는 체가 없습니다. 만약에 체가 있으면 변화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체가 없다는 것은 조건의 화 합이 흩어지면 소멸되고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로써 연을 이루지만 연에는 성(性)이 없다고 합니다. 성이란 그것이 가지는 성질, 즉 특성으로써 다른 것과 구분이 되는 바탕을 말합니다. 그 런데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그 어떠한 것도 그 본질 이 빈 것을 근거하므로 생인 바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묘로 모든 법의 었다 없다 하는 것은 본래 하 나엄올 알아야 합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둘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있는 것 자체가 연에는 체가 없고 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인 것이요,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었다 없다는 모든 법에는 원래로 둘이 없는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의미보다는 보이는 의미에 중심을 두어서 “나타난 일을 가지고 법을 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있을 때에 있는 것이 아니요 도리 어 없는 것이며, 없올 때에 없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있는 것입니다. 있다 없다는 상대적인 관점입니다. 이 상대적인 관 점과 관념을 떠나면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는 법입니다.
한 사람의 개인이 결코 독립할 수 없고, 하나의 집 단이 결코 독립할 수 없으므로 모든 인연이 이룩하는법이라고 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동체의식(同體意議)은 우려 동양인, 더욱여 불교인에게는 강하게 의식되어져 왔습니다. 그것이 옛날 우리 조상들의 소박 한 인심 속에 간직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실존적인 삶을 추구하는 불교적인 인간상(人間像)에 는 이러한 바탕인 원래 하나요, 본래 둘이 없는 인심이 소박하게 꽃피어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걱정하고 입지 못해 추위에 떨면서 잠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의식주가 충봉하지 못했던 농경시대에는 그 땅이 어디 로 옮겨가찌 않는 둘이 아닌 하나임을 알았기에 그것을 가진 사람은 임시 관리자로 자부하여 뽐내거나 자 만하지 않었었습니다. 그러한 걱정이 없어진 오늘은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업을 것이 없고 잠자리가 있는 데에도 꼭 내것이라는 소유의 욕심이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고 내 것만을 생각하는 각박함으로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불교의 엔생관은 이러한 인간의 연기관에 입각함으로써 중생(生)은 모두 정이 있는 이들이므로 누가 더하고 어노 것이 못하지 않는, 똑같이 존경하고 숭배할 의미를 부여받았습니다.
오늘의 깎박한 사회전반에 흐르는 이 이기적 욕심은 심지어높 목숨마저도 남의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생각을 가짐으로써 사회는 더욱더 각박하고 삭막하여 사람을 만나거나 찾아오는 이들까지 두려운 존재로 여쳐지게 되었습니다.
사회는 날로 발전하고 선진국민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부작용이라고 안일하게 넘겨 버리기에는 너무나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 즉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즐겁고 흥겨우며 새로운 도약의 디덤돌이 되지 못하고 두려워해야 하고 피해야 하는 이 풍조는 분명 크게 잘못된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근원은 자기것에 집착한 나머지 남의 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야할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괴로운 결과를 떠나려고 한다면 그 원 인올 더하게 하는 일인 업(業)올 미혹(遠훨)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한 표현이 바로 “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머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이라고 표현하는 한 마디에는 시방세계의 모든 무게 가 오직 자기 한 사람에게만 부여된 듯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의 괴로움, 또는 한 괴로움은 그 자체가 하나이지만 그 무게나 부피는 세계와 우주를 모두 젊어진 듯이 고통을 부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시간까지도 두절시키는 오직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편안하고 훈훈한 인심과 사람을 만나도 믿고 스치거나 자리를 같이 할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많이 가진 것과 적게 가진 것 때문에 평가 를 받기 보다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가에 대하여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또한 불이익 올 당하는 일이 없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인연이란 손바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 두꺼운 손바닥의 두께와 손동의 앓은 피부는 각기 그 기능이 다르듯이 두꺼운 손바닥이 감촉을 잘 느끼고 앓은 손동은 오히려 감촉에는 덜 민감함을 가지듯이 각기 조건이나 원인이 똑같은 의미로 인생의 여정에 누구에계나 똑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여겁니다. 그것은 연으로 써 나를 이루고 있지만 이 연에는 성(性)이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표현이라고 여겁니다.
그것은 손바닥의 기운을 따라서 또는 발의 움직임 에 따라서 그 사람의 위치는 바뀌는 것이고 그 놀림이나 노력에 따라서 의미는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노력한 만큼의 소득은 나 보다 힘있는 자에게 빼앗겨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는데, 더러는 그렇지 못하고 자신만이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은 과연 우리네들이 가졌던 옛날의 소박한 인심과 같은가 다른가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푸념이 우리시대를 넘치고 우리의 사회를 넘어서 다른 나라 다른 시대로 옮겨졌을 때, 오직 비판을 함께 받는 것이지 어느 부류만올 분류해서 잘했다 못했다고 판가륨 지워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소위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결실을 거두기 위하여 서로의 마음과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이기적 욕심올 버리고 원대 한 포부를 가지고 모두가 잘 사는 미래 사회를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제법(諸法)은 본래 동하지 않는 것. 이 이치를 알면 열 사람이 한 사람의 도둑을 잡지 못한다고 해서 후회하거나 뉘우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개의 욕심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해서 없애지 못한 것은 그 잘못이 바로 욕심임올 아는 것으로부터 없앨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손바닥이 두터우나 제 할 일이 있듯이 욕심이 이기 심이기는 하지만 만약에 건전하고 빠른 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은 능히 욕심이라고 보는 그 마음 도 또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버리려는 이기섬, 욕심을 통하여 새로운 삶 의 법올 터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옛날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실의 일을 통하여 본질에 돌아가는 굳은 의지의 실천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라교 일체의 티끌 속도 또한 다시 그러하다는 것이 그것 입니다. 이 살벌하고 각박한 시대에 남올 어떻게 믿을 것인가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랍들의 공통 된 의구심이라면 마음올 둑 터놓고 내가 먼저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남에게 미루는 생활이 아니라 내가 먼저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모든 사람 동물, 심지어는 무생물에게 까지라도 즐겁고 반가운 마음으로 안녕하고 인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