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向靑山去 나는 청산을 향해 가는데
綠水爾何來 녹수 너는 어디서 오는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 경전의 태반은 이렇게 시작된다. 먹거리를 벌어 식사대사(食事大事)를 마친 후에 ----·.
사실 노동의 의미를 규정함에 있어 제일의제는 먹거리의 확보다. 금강산 식후경이란 말도 있듯이 움직임의 분별, 즉 존재의 각성은 에너지의 부단(不斷)에서 출발한다. 그대들이 찾고자 하는 도의 단초(端初)는 그대 눈과 감각으로 이루어 놓은 먹을 것들의 단초와 맥락을 함께 한다.
때문에 엄정하게 도를 규정함에 있어 먹거리 또한 동가의 위치를 보전하지 못하면 구두선(口頭輝)의 입장을 공고히 다져주는 것이다. 해서 불전(佛典)은 결식의 행위를 빠뜨리지 않는다. ‘가난한 자에게 걸식함은 복을 짓게 함이요 부자에게 걸식함은 복을 잃지 않게 함이다’ 라는 합리성도 간과하지 않는다. 허나 먹고 자고 일하는 자연스런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어쩌면 의 ·식 ·주에 대한 자본주의적 논리를 용납하는 자비심의 남발이 아니었을까?
소유와 분배의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구조의 갈등, 그로 인해 뿌리지 않는 자들이 배부르고 베짜지 않는 자들이 따스한, 이때 쯤에서 법을 벌어 부처의 혜명(慧命)을 잇는 엄숙함 보다 밥을 벌어 목숨을 잇는 다정함을 돌이켜 볼 때다. 들판에 서서 추수가 끝난 들녘에 셔서 한 톨의 곡식을 지켜볼 일이다. 그 자리에서 법회를 열고 산회(散會)를 할 일이다. 진정한 농부는 농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르게 먹을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김립은 유랑도중 가련(可憐)이라는 예명을 지난 동기(童技)를 만난다. 대취(大醉)해서 가련이의 치마폭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可憐行色可憐身 가련한 행색의 가련한 몸이
可憐門前計可憐 가련이의 문 앞에서 가련이를 찾는구나
可憐我意傳可憐 가련한 나의 마음을 가련에게 전하면은
可憐能知可憐心 가련이는 능히 나의 가련한 마음을 알 것이다
인간이 뿌리고 거두는 것은 휴머니즘이다. 그러나 그 휴머니즘이 올바르게 자리하려면 서로가 서로를 가련히 여기는 측은한 마음이 겸해야 될 것이다. 뿌리고 거두는 자는 거두어 거래하는 사람을 어여삐 여겨 하늘과 땅과 햇빛의 어울림을 눈 여겨 살펴야 할 것이고, 거두어 거래하는 자는 역사의 흐름과 인정(人情)의 명암을 제 3의 눈을 통해 투시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가련한 행색과 가련한 마음들이 쉴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온통 가련행색과 가련심이 맞부딪고 있는 이 땅 구비구비에 현란함은 슬픔이 아니고, 황홀한 윤회로 터 잡아 줄 이 누구인가?
농요와 민요가 사라져 버린 지금-이미 유명 가수들의 유행가가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지역적 특성의 농요와 민요를 통일 시켜버린 지 오래다-각자의 일터에서 인간과 하늘과 대지의 숨결을 담아 하늘 높이로 땅 넓이로 바다 깊이로 간절하게 가련하게 여기는 한 소리를 터뜨릴 자 누구인가?
鴉番楓葉夕陽動 까마귀 단풍잎 움직이니 석양이 흔들린다
만물(萬物)의 움직임이 바람으로 화할 때가 다가온다. 안온한 동면(冬眠)이 따스한 봄바람을 대비할 것이고 생명들이여, 평안한 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