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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뒤에 한 줄기 띠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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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 법전 1999년 11월 213호
단임마래임마거但恁麽來恁麽去이어늘
불로기상급신통不露奇想及神通이로다.
예기독왕가향로預期獨主家鄕露하나
임행수사무인회臨行垂示無人會로다.
그저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갔을 뿐
별다른 모습이나 신통을 나투지는 않았구나.
혼자서 고향 길 떠 나겠다고 머리 기약하고서
떠날 때가 되어 법을 보였으나 아는 이가 없구나.

세삼 고인들의 임종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옛 선지식들은 임종순간까지 공부를 하였고 또 법거량을 하였습니다.

위산潙山스님께서 임종을 앞두고 법상 위에 올라갔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을 날이 많지 않으니 그대들은 저마다 자기의 견해를 밝혀라.”
이때 지화志和라는 상좌가 대중 속에서 나와 절을 하였습니다.
이에 선사께서 말씀하였습니다.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하고 정당임마시正當恁麽時하여 환아지화상좌본래면목還我志和上座本來面目하라. 착하려고도 생각하지 멀고 악하려고도 생각하지 말라. 이럴 때를 당하여 지화상좌의 본래 면목을 나에게 보여달라.”
이 법문은 오조의 의발을 빼앗기 위하여 뒤따라온 혜명스님에게 육조스님께서 대유령에서 해준 바로 그 법문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를 당하면 곧 제가 몸과 목숨을 던질 곳입니다.”
“그대가 그렇다면 공空에 떨어지겠도다.”
“떨어질 만한 공空이 있는 곳으로 본다면 그 어찌 체가 몸과 목숨을 던질 곳이라 하겠습니까?”
“그 정도에서 말고 한단계 더 높여서 물어 보게.”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물을 만한 스승이 있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가거라, 이 놈아. 너는 복이 엷어서 불법을 붙들어 일으키지 못하겠구나.”
그리고 내쫓아 버리는 선사의 기개를 마지막까지 잃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보화스님아 거리에 나가 사람들더러 장삼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매번 장삼을 주였으나 보화스님은 그 때마다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임제스님께서는 원주를 시켜서 관을 하나 사오게 하고는 보화스님이 돌아오자 말씀하셨습니다.
“내 그대를 위하여 장삼을 장만해 두었네.”
그러자 보화스님은 곧 스스로 그것을 짊어지고 나가서 온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외쳤습니다.
“임제스님께서 나에게 장삼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동문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리라.”

시내 사람들이 다투어 따라가보니 보화스님께서 말하였습니다.
“오늘은 가지 않겠다. 내일 남문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리라.”
사흘을 이렇게 하니 사람들이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흘째 되는 날 따라와서 보려는 사람이 없자 혼자 북문으로 나가 관속으로 들어가서 길 가는 행인더러 뚜껑에 못을 치게 하였습니다. 삽시간에 이 소문이 퍼져서 시내 사람들이 쫓아가서 관을 열어 보니 봄은 빠져 나가버렸고 공중에서는 요령 소리만 은은히 울려 갈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흔적 없이 가고자 한 것이 조사의 가풍인 것입니다.

고령신찬古靈神贊 선사의 열반 모습도 바로 법문입니다.
신찬스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에 머리를 깎고 목욕을 하고 종을 쳐서 대중을 모아 놓고는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소리 없는 삼매를 아는가?”
“모릅니다.”
“그대들은 딴 생각 말고 자세히 들으라.”
이에 대중이 귀를 기울여 들으려 하거늘 이에 선사께서는 조용히 입적하였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신찬스님은 백장스님 밑에서 공부를 한 뒤 다시 본사로 돌아와서 자기 스승의 눈을 열어 준 선사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은사가 목욕을 하다가 신찬에게 등을 밀라고 하니 선사께서는 등을 밀다가 말고 한마디 하였습니다.
“법당은 좋은데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
그의 스승이 이상히 여겨 고개를 힐끗 돌려 바라보니
“영험이 없는 부처가 방광放光은 할 줄 아는구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날 그의 스승이 창 밑에서 경전을 읽는데 벌이 들어왔다가 창호지에 부딪치면서 나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선사께서 이를 보고 게송을 읊었습니다.
세계여하광활世界如許廣闊이어늘 불긍출不肯出하고
찬고지鑽故紙하니 여년驪年이라사 득출거得出去하랴.
세계가 저렇게 넓거늘 나가려 하지 않고
묵은 종이만 두드리니 언제나 나가게 되려나.
이에 놀란 스승이 제자에게 법문을 청하는 장면이 전등록에 생생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신찬스님은 임종시에 열반이 곧 소리 없는 삼매임을 대중에게 일깨워 주었던 것입니다.

조주스님께서 한번은 죽은 스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죽은 사람 하나를 무수한 산사람들이 보내는구나”
그리고 이어서 다시 한 말씀을 하십니다.
“수많은 죽은 자들이 산사람하나를 보내는구나.”

그때 한 스님이 물었습니다.
“마음이 살았습니까? 몸이 살았습니까?
“몸과 마음 모두 다 살아 있지 않다.”
사실 다비식을 치루면서 죽은 사람이 법문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못 알아듣는다면 살아 있는 그 사람들이 바로 죽은 사람입니다. 보기에는 죽은 사람을 산 사람이 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고 산 사람도 살아 있어야 그게 제대로 된 다비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자주 다비식을 치루면서 그것을 공부와 연결시키지 못한다면 그건 바로 죽은 사람의 다비식이 아니라 바로 나의 다비식인 것입니다. 이건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이 살았느니 몸이 살았느니 하는 질문 자체가 어리석을 뿐입니다. 그래서 조주스님은 당연히 몸도 마음도 다 죽었다고 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정말로 살아있는 사람이기 위해서 이렇게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스님이 물었습니다.
“죽은 중이 떠나서 어디로 갑니까?”
“탈은 져도 하늘을 여의지 않느니라.”
또 다른 스님이 물었습니다.
“죽은 중이 떠나서 어디로 갑니까?”
“배가 다니는 것은 모두가 키를 잡은 사람에게 달려 있나니라.”
또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죽은 중이 떠나서 어디로 갑니까?”
“맛 좋은 술은 외딴 시골에 없나니라.”
또 다른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죽은 중이 떠나서 어디로 갑니까?”
“불탄 뒤에 한 줄기 띠풀이니라.”

대중이여 !
이 네 가지 화두 가운데 하나는 하늘을 받들고 땅을 버티는 것이요, 하나는 뱀의 굴 마구니의 궁전이요, 하나는 털을 쓰고 뿔을 머리에 인 젓이요, 하나는 근본 종지를 곧장 드러낸 것입니다. 만일 가려낼 수만 있다면 나고 죽음아 한 경지요, 움직임과 고요함이 한 근원이거니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다른 인연을 대치하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자기의 행을 닦기 바랍니다.

감차堪嗟라! 거일안여옥去日顔如玉이더니
각탄회시빈사상卻嘆廻時鬢似霜이로다.
슬프도다 떠나는 날은 얼굴이 옥 같더니
돌아올 때는 귀밑머리가 서리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