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의 재발견
그간 우리는 여산(盧山) 혜원(慧遠, 334~416)이 불교의 달인(達人)이라는 통념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을 위해서 혜원의 불교와 인간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새삼스러운 놀라움과 자괴감(自愧感)을 느꼈다. 패를 갈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혁신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연출해내는 정귀혹란은 변함없이 지루한 인간사회의 정경(情景)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 불교계의 정체(停體)된 현실인 것이다. 혜원시대의 불교계 역시 오늘 우리 불교계와 다를 바 없이 오염과 혼란이 겹쳐진 상반상성의 시대였다. 그러나 혜원은 자신의 불교와 인간을 통해서 불교승가는 어떻게 자신의 위상(位相)을 확립하고 어떻게 세상에 복무해야 하는지 명쾌하게 보여준다.
그는 우리에게 ‘무슨……위원회’, ‘……이름’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일상이 드리우는 어두운 음영(陰影)을 정면에서 응시하고 붓다의 교법을 레디칼하게 수행하는 수도자(修都者)의 전범(典範)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녕 그 뿐이겠는가? 아니다. 혜원은 아무런 실천적 대안도 없이 혁신만을 부르짖는 어설픈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불교승가 본래의 수행력과 의식의 생산력이야말로 모든 오염과 혼란을 벗겨내는 근원적인 힘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글의 결론부터 먼저 말한다면, 우리는 혜원과 그의 불교를 통해서 내적인 프롤레타리아트(the intenal proletaIiat)의 불교적 전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전형은 어느 시대이건 첨예한 모순과 갈등을 풀어 가는 건강한 도덕성과 행동이 바로 내적인 프롤레타리아트들에게서 나온다는 역사순환의 명제와도 일치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인간은 마치 회전무대 위의 배우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혜원불교의 성립
위대한 불교숭려이며 중국정토교(中園爭土敎)의 개조 혜원. 초기 중국불교사에 있어 불교의 중국동화(中園同化)를 대표하는 인물, 전설적인 여산(盧山) 백련결사의 수장(首長) 혜원. 그는 334년 산서성 안문군 누번현(山西省確門郵樓廳)에서 태어났다. 속성 개씨. 대대로 관족(冠族)의 가계. 그가 태어난 시대는 분열의 시대였다. 혜원이 태어나기 이십여 년 전에 그 유명한 영가(永嘉)의 난(亂)이 발발, 서진왕조(西音王朝)를 무너뜨린 북방호족이 무려 이백여 년 이상 전 중국을 분열시킨 오호십육국의 장(章)이 열리게 된다. 수많은 군벌왕조가 급조되고 무너지는 이른바 망국(亡國)의 시대였던 것이다.
소년기의 혜원은 관리가 되기 위해 유교를 학습한다‘ 그것은 당시 북부 중국을 제패한 후조(後趙)의 실력자 석륙(石動), 석호(石虎)가 한족유사를 관리로 임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혜원은 열세살때 중국학술계의 중심지였던 낙양(洛陽)으로 유학을 떠나 스물한 살까지 육경과 노장(老莊)를 공부한다. 그러나 혜원은 호족지배하에 있던 중국의 사회 현실에 절망한다. 잦은 전란과 이민족의 무력에 눌려 강가지 수모를 겪는 한족의 고난을 지켜본 혜원은 관리로서의 입신(立身)을 포기한다. 그리고 황하(黃河) 남쪽의 저명한 은자(鷹者) 범선자(泡宣子)에게 사사하며 은둔 생활을 보낼 결심을 하게 된다. 난세의 은둔이란 그저 단순히 숨어 지내는 것만이 아닌 저항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그러나349년 석호(石虎)가 죽고 북부 중국은 더욱 극심한 내란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강남으로 이어진 교통로가 막히면서 혜원의 강남행(江南行)은 무산되고 만다. 그 무렵 혜원은 태행산맥의 항산에 주석하면서 포교하던 명승 도안(道安, 312~385)의 이름을 듣는다.
도안은 신이의 고승이었던 불도정(佛圖遭)의 제자. 반야와 아비달마에 정통하였으며 선(輝)의 실천 자이기도 했다. 당시 스물한 살의 청년 유생(關生) 혜원은 도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첫대면의 자리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나의 참된 스승이 여기 계시다(一面盡敬 以寫師也)” 자신의 시대에 절망하고 있던 청년 유생 혜원은 도안의 학문과 초연합에서 위대한 인간상을 본 것이다. 도안에게 〈반야경〉 강의를 듣고 난 혜원은 불교의 세계에 눈을 뜨고 이렇게 말한다. “유교와 도가 구류가 모두 속 빈 겨와 쭉정이 같음을 알겠다” 그리고 도안의 문하에 폼을 던져 출가한다. 이 시기에 배출된 지도적 사문들은 혜원의 경우처럼 한문 의 영재(英才) 출신이 많다. 그들은 자신들의 에너지를 모두 불교에 바쳤으며, 그들의 정열적인 헌신과 노력에 의해 훗날 수당불교의 화려한 막이 오르게 되는 것이다.
혜원은 스승 도안에게서 불교의 교리, 실천, 연구 방법, 교단생활을 연마하며 위대한 불교승려로서의 대업(大業)을 준비한다. 대가들의 젊은 날이 그렇듯이’ 혜원의 수행은 실로 초인적인 것이었다. 그의 전기가 실련 〈고승전〉은 혜원의 수행을 ‘정사풍지. 이야속주라고 기록한다. 선수행과 교학연구에 전념, 밤을 낮삼는 날들이 계속된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도안문하의 수도자들은 궁핍했다. 혜원은 밤에 둥불을 켤 돈조차 없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담익이라는 스님이 혜원의 둥촉비(燈爛費)를 보시했다. 이를 안 스승 도안은 웃으며 말한다. “담익. 자넨 정말 사람을 볼 줄 아는구먼” 도안과 담익은 혜원의 정진력에서 인간의 가치를 보았던 것이다. 어느 사람에게서 인간의 가치를 보고 그 인간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인생 이란 확실히 즐거운 것이다. 삼년 뒤 도안은 젊은 혜원에게 강좌를 맡긴다. 젊은 혜원의 강의는 실로 청민(淸敏)하기만 했다.
노련하기 이를 데 없는 도안조차도 “중국불교의 앞날은 저 사람 혜원에게 있을 뿐이다”라고 명할 정도였다. 350년. 정세의 불안이 더욱 심각해지자 도안교단은 항산을 떠나 산서성 양양으로 이동한다. 이제 혜원은 애숭이 유생이 아니었다. 서른두 살의 기품 있는 불교승려로서 그의 연구와 수도는 이미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379년 진왕(奏王) 부견(符堅)의 군단이 양양을 침공한다. 점령군은 평소 부견이 존경해 마지 않던 도안을 장안으로 강제 연행 한다. 도안의 장안행(長安行) 이후의 일이지만 중앙아시아의 쿠차를 쳐서 쿠마라지바를 영입하고자 했던 부견이 사람에게는 인재수집벽 같은 집념이 있었다.
그는 어느 곳에 누가 있다는 사질을 알기만 하면 본인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군단을 동원해서 그 인물을 수집해버리는 묘한 인간상을 보여준다. 부견의 인재수집벽 때문에 도안교단은 사방으로 흩어져야 했다. 이십오년 간이나 강은 역경 속에서 스승 도안을 모시던 혜원과 오백여 명의 제자들은 스승과 혜어지게 되자 한 사람, 한 사람 스승 앞에 나가 무릎을 꿇고 마지막 가르침을 받는다. 도안은 제자들에게 일일히 마지막 가르침, 각 제자의 부족한 점과 더 노력해야 할 점을 지장하게 일러준다. 아무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스승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도안은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은 혜원에게는 한마디 말도 해 주지 않는다. 제자들이 도안에게 물었다. “왜 혜원스님에게는 한마디 가르침도 주시지 않습니까?” 도안은 쓸쓸히 말했다. “혜원은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사람이데.” 도안은 제자 혜원이 성취하게 될 대업(大業)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혜원불교의 완성은 바로 이와 같은 스승의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여산 동림사
도안은 북쪽 장판으로, 혜원은 스승이 맡겨준 제자들을 데리고 강서성 구강현 여산 동림사로 이주한다. 혜원의 여산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후 여산이라는 지명은 혜원의 위치를 확정해주는 대명사로 바뀌게 된다. 혜원은 자신이 입적하는 416년까지 33년 동안 한 번도 여산 밖으로 나가지 않는 철저한 산림수행자로서의 인생을 꾸린다.
그러나 혜원의 여산 은둔은 단순한 은둔이나 망명이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당시 이미 일가를 이룬 승려들과 세속의 지식인들, 길을 앓고 방황하던 청년들이 그를 찾아와 인생을 묻는다. 여산 혜원의 교단에는 불교승려들 뿐만 아니라 당시 기라성 같은 중국사상계의 인재들, 유유민, 장야(張野), 주속지, 종병(宗炳), 사령운, 도연명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 정부의 관료 계층과 쌍벽을 이루는 최고 인텔리 집단이 바로 여산 혜원의 교단이었다.
이러한 인텔리집단 즉 내적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의식이 바로 여산의 백련결사, 〈사문불경왕자론〉을 낳았던 것이다. 그리고 여산의 혜원교단에 모여든 재야 지식인들은 중국사대부 특유의 권력지향적 의식을 버리고 자신들의 시대에서 가장 건강한 도덕성을 갖춘 수행집단으로서 광범위한 존경을 받고 있었다.
사문불경왕자의 시상
398년 광주자사(廣州刺史) 환현(369~404)은 천사도교의 반란자 은중감의 세력을 격파하기 위해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여산을 통과하게 된다. 역(易)에 정통한 반란자 은중감 역시 혜원의 교단을 방문하고 “나로서는 혜원의 식심명실(識深明實)함을 따라갈 수 없다”고 탄식한 인물이었다. 그는 도교도 였지만 혜원의 불교에 깊은 존경의 염(念)을 바치고 있었다. 당시 서른한 살의 지방군벌이었던 환현이 육십육 세의 혜원을 방문하여 예를 표하려고 하자 그의 주변에서는 “이미 은중감이 혜원에게 가서 예를 표했습니다. 공(公)께서는 가시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환현은 말했다. “무슨 소리 ! 은중감은 이미 죽은 놈이다.” 주변의 만류를 이렇게 일축해버린 환현은 혜원올 찾아와 예를 표하고 묻는다.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발부는 훼손치 않는 것이 효(孝)의 근본이거늘 어찌 머리를 깎는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은 어디까지나 유교윤리의 입장에서 던져진 것이다.
혜원의 대답은 간단했다. “삭발출가는 입신행도를 위한 것. 그대의 효도와 다를 바 없다” 이에 환현은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환현은 화제를 은중감의 반란을 토벌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자신의 행위가 정당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혜원은 묵묵 부답. 아마도 혜원븐 중원(中原)의 대란(大홉t)이 갖는 정치적 명분보다도 굶주림으로 인해 사람이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인민들의 고통에 대해서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답답해진 환현은 다시 붙는다. “스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요?”
혜원은 거침없이 말한다. “나는 그대의 명안(平安)과 은중감 역시 무사(無事)하기를 바랄 뿐이요-” 환현은 산을 떠나면서 측근들에게 말한다. “나는 실로 저런 인물을 태어나서 처음 본다(實乃生所未見).”
노(老) 혜원은 이미 정란의 비참함에 절망하고 젊은 나이로 수도생활을 시작한 몸. 철저한 반전주의자였다. 환현은 이제 막 권력에 눈뜨기 시작한 젊은 야심가였다. 그런 환현이 혜원에게서 대교단을 이끌고 있는 노(老) 수도자의 고고한 기개와 피애를 구별하지 않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자비에서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그 후 이 환현이라는 인물은 군사적 성공을 거듭하여 동진(東륨)의 제위(帝位)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태위되어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불교교단의 숙정을 지시하는 〈권태도서(動態道)〉를 포고한다. 그 유명한 혜원의 〈사문불경왕지론)〉은 바로 이 환현의 반승단 정책에 맞서기 위해서 씌어진 것이다. 환현은 종교가 왕권에서 독립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승가내부에도 문제는 있었다. 그래서 혜원의 승가관은 철저한 엄선주의였다. 환현의 정치에 의한 종교지배에 맞서서 종교의 자립성을 주장하며 저항한 혜원 자신은 종교의 자립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먼저 불교교단올 순수하고 열정적인 종교집단으로 육성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마치 혜세의 〈유리알 유회(Das Glasperlenspiel)〉에 나오는 교육자치주 카스탈리엔(Kastalien)을 연상시키는 여산 혜원의 백련결사는 바로 왕권의 광폭한 지배로부터 불교의 자주성을 확립하기 위한 실천적 대안이었다. 표면상 혜원, 환현간의 예교논쟁(禮敎論爭)은 중국유교의 국가주의적 예교와 인도불교의 초세속성이 맞부닥친 사상적 대립이었지만, 그 본질은 국가권력의 광폭한 지배하에서 불교교단의 독립과 역할을 주장한 한 호교적(護觀) 불교사상가와 막강한 정치권력을 가진 한 반승단주의자의 논쟁이 있던 것이다. 고(苦)와 악(惡)으로 찌든 사회, 시대일수록 도덕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건강한 정신의 집단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그 시대의 희망이다. 혜원의 여산교단은 바로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도덕적 가치를 확립한 정신의 집단, 불교의 카스탈리엔이었던 것이다. 이 점이 바로 혜원불교의 매력이며, 아무런 실천적 대안도 없이 참여나 혁신만을 외치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디음 호에서 혜원불교를 계속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