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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향원 수법(修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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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원자 1991년 09월 115호
올 여륨, 수법스님의 여름 나기는 여느 해보다 곱절 힘들었다. 다른 해보다 장마가 길어 늦게까지 기숭올 부린 더위 탓도 있었지만, 8월 속초에서의 찬불가와 가곡의 밤 전국순회연주회에 모언 청중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굳이 청중이 적었던 이유를 떠올리며 누구를 탓하고 싶지 않지만, 수법스님은 연주회를 갖기 위해 한여름의 폭염 속에서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며 분주했던 자신의 노력이 하찮은 이유로 외면당한 것 같아 못내 섭섭하다.
“이유를 밝히기조차 부끄러워요 물론 청중의 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대수롭잖은 이유로 힘들게 준비한 연주회에 청중이 많지 않아 마음이 면치 않더군요 물론 연주회가 끝나고 신심과 환희심을 일으키는 청중을 대하고 섭섭한 마음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속상하더군요”
그러하리라. 무대에 서 노래하는 이들에게 청중석 어느 한 구석이 뭉텅 비어있는 것을 보는 것 만큼 맥 빠지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하물며 음악회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한여름 내내 비지땀을 흘려야 했고, 무대에 서 노래까지 부른 수법스님에게는 빈 좌석을 보아야 하는 일이 더욱 가슴 아팠으리라.
그러함 때문이지, 속초에서의 연주회가 끝난 뒤 8월의 그 더위에도 스님은 방에 연탄불을 지피고 지친 톰과 마음을 뉘였다.

수법스님은 문향원의 안주언이며 불교성악회 총무로 이 모임의 살림을 꾸리고 있다. 노래에서 벗어나고자 출가를 했는데 출가해 다시 노래를 하고 있으나 아무래도 수법스님에게 있어 노래를 부르는 일은 떼어놓을 수 없는 인연의 한 자락인 것 같다.
성악을 전공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하듯 스님도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할 때만 해도 프리마돈나를 꿈꾸며 화려한 비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울이 고향이었지만 6 ·25 때 피난 가서 그냥 시골에 머물렀던 탓으로 시골에서 고등화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유수한 명문학교 출신들과 경쟁을 거쳐 입학한 서울 음대는 스님에게 있어 소중한 비상의 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학년이 되면서 되지도 않는 소리를 계속 해야 할 것인가 하는 회의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차선의 재능에 대한 회의와 갈등으로 오랜 방황 끝에 스스로 프리마돈나에로 향하던 날개를 접었다.
그러나 동경음학교 출신의 어머니와 성악가였던 이모, 그리고 동아음악콩쿠르에서 1등을 해 기염을 토하던 언나를 보며 자신의 꿈을 키워왔던 스님에게 노래를 버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해서 일단 프리마돈나에 대한 꿈은 접어두었지만, 학교를 마친 뒤에도 교회합창단에서 노래를 하며 어떤 안타까움을 달래고 있었다.
그럴 즈음, 스님이 다니던 교회의 외국인 목사가 미국의 신학대학 종교음악과의 입학을 주선해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갈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음악으로 기독교 선교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마음에 걸려 다시 한번 노래를 향해 날아오르려던 날개를 접었다. 사실 노래를 하다 보니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를 한 것일 뿐 기독교를 종교로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유학을 포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녀시절부터 키워왔던 음악에의 열정을 합창단에서 노래나 하며 삭아기에는 스님의 노래에 대한 목마름은 컸고, 그 목마름의 깊이 만큼 젊은 시절을 고뇌하고 방황했다.
“그때는 내 소리가 싫고 재능이 없는 것 같아 방황을 참 많이 했어요 얼마나 스스로에 대해 날카롭게 발톱을 세우고 있었던지, 음악에 대한 책이나 그 밖의 물건을 전부 태워버렸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자신에 대해 관대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까지 자신을 비하시킬 필요는 없었는데 ------.”
그러다가 부모님을 따라 절에 간 인연이 그러한 노래에 대한 오랜 방황을 종식시키게 했다.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고는 있었지만 사실 스님에게 더 가까운 종교는 기독교보다는 불교였다. 조계사에서 있었던 사촌언니의 결혼식에 꽃을 뿌리고 따라 들어갔던 유년의 추억과 무슨 날이 되면 빼놓지 않고 머리에 무엇인가를 이고 대문을 나서던 어머니의 뒷 모습을 보면서 알게 모르게 불교와 인연을 맺고 있었던 것일까. 처음 절에 따라가 보았던 절의 정경이 그리도 좋을 수가 없었다. 그때 보았던 황혼에 잠기던 절을 둘러싼 숲이며 바람소리, 그리고 목탁소리와 절방의 호롱불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다.
“사실 그때는 불교의 내면세계는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도 참선이라는 것이 나의 노래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할 것만 같았어요 그리고 좀더 나은 삶을 열게 할 것 같더군요”
그 뒤 출가를 해 몇 년간 경전공부와 참선공부를 하면서 부처님이란 한 존재에 대한사랑과 신뢰로 노래에 대한 갈등이나 열정을 가슴 깊은 곳에 묻고 있을 무렵, 스님을 다시 노래의 마당으로 불러낸 사람은 효동선원의 정덕스님이었다.
불교음악을 대중화시켜 불교현대화에 주력하던 정덕스님은 성악을 전공한 수법스님에게 불교음악회 출연을 부곽했고, 그 인연으로 음악회를 뒤에서 돕다가 불교음악의 종합적인 것보다는 우선 성악만 따로 떼어내어 대중화시킬 필요를 느끼게 됐다.
그리고 우리 불교음악의 현주소가 아직도 다른 종교의 음악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져 있음을 통감한 스님은 결국 출가전보다 더 깊이 다시 노래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불교음악이라면 보통 범패만을 연상하기 쉬운데 그건 그렇지가 않아요. 범패의 어산, 착복, 바라부분 중 어산만이 불교음악에 해당하죠. 그리고 범패말고도 불교음악에는 국악부분의 영산회상과 찬불가가 있지요.
내가 성악을 했기 때문인지 현대 서양음악 부분인 찬불가를 부르게 되었고, 또 현대음악으로 대중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단 음악에로의 마음이 다시 열리자 스님은 성악을 전공한 대학생과 졸업생, 그리고 스님과 뜻을 같이한 몇몇의 기성 성악인과 함께 현재 불교성악회의 전신인 불교성악 동호인회를 만들었다. 그 뒤 회원들은 각기 사찰의 합창단 지도, 독창회, 작곡발표회 등을 가졌으며, 스님은 대원정사에서 불교음악 강좌를 개설해 불교음악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정열을 쏟았고, 효동선원에서 3년 동안 범패를 공부해 범패의 아우트라인을 익히기도 했다.
1986년 초 신촌 오페라하우스에서 불교생악동호인회 창립 제1회 정기연주회를 가진 이후 지금까지 16회의 연주회를 가지며 찬불가와 가곡을 듣고 환희심으로 충만해하는 대중들과 만났다.
연주회 일정이 잡히면 수법스님의 하루는 스물 네 시간으로도 표자라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연주회를 열기 위한 전반적인필을 스님이 도맡아 해야하기 때문이다. 팝플렛 제작에서부터 연주장 물색, 홍보 등으로 한달의 딴 이상을 지방에서 보내는 스님은 늘 연주회를 위한 홍보를 펼 때마다 마음을 다치곤 한다.
종단에 상관없이 연주회가 열리는 지방의 각 사찰을 방문하여 홍보를 하는데 3분의 2는 호응을 하지 않는다.
‘이런 노력으로 절을 지어 편안하게 살지 왜 이러고 돌아다니느냐’며 돌아앉는 스님네나 심지어 ‘음악회를 여러 번 했으니 떼돈 벌었겠다’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하는 스님네를 만날 때 수법스님은 그렇게 비애로울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이젠 이 일을 그만두어야 겠다’고 다짐하며 절문을 나서지만, 다시 스님을 다음-연주회를 위해서 분주하게 만드는 이들은 다름 아닌 청중들이다. 찬불가와 우리가곡을 들으며 벅찬 감동을 기립박수로 토해 내는 청중들, 그리고 연주회가 끝난 다음 무대 뒤로 찾아와 ‘불교에 희망이 있다’며 신심을 내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스님은 연주회를 그만 하리라던 다짐을 슬그머니 놓아버린다.
“사실 뜨거운 마음으로 호응하는 청중이나 보수도 없이 출연하는 회원들이 아니었으면 지속하기가 힘들었을 거에요. 자신의 일로 바쁜 회원들이 출연료 한푼 받지 않고 무대에 선다는 것은 신심이나 불교문화 포교에 대한 소신 없이는 힘든 일이거든요‘”
청중이나 15명의 회원말고도 스님이 고마움을 가지고 있는 분에는 성악회의 고문인 석주스님과 자문위원인 월주스님, 홍교스님, 효경스님, 제원스님등이 있다.
오십보다는 육십의 나이에 더 가까운 스님은 지난 해 큰 수술을 받고 난 다음 많이 쇠약해진 탓일까, 이제는 그간 자신이 하던 일을 맡아 활 사람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불교음악에 애정을 가지고 있고 불교문화 포교에 헌신적으로 몸을 바칠 수 있는 스님이 나타나면 성악회 일을 내어주고, 스님은 뒤에서 도와주리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일이 그렇게 수월하지만은 않은 듯 싶다. 얼마 전에는 성악을 전공한 비구니스님이 어느 선원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수소문해 알아 보았으나 ‘참선공부에 몰두하고 싶다’는 답이 와 아마도 한참은 더 스님이 성악회의 안살림을 꾸려야 할 것 같다.
“참선 공부하려고 출가했지 노래하려고 출가한 건 아니지요 그런데 다시 이렇게 노래에 발목을 잡혔으니 이 일이라도 열심히 해 불교문화 포교에 일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미력하나마 불가에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하는 일이 부끄러워요 지금의 제 노래는 노래가 아니죠 평생을 바쳐서 공부해도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내기란 어려운데, 오십이 다 되어 노래를 다시 시작했으니 제대로 소리가 나오겠어요 숨이나 소리의 조절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을 느끼면서도 무대에 오르니 더욱 부끄럽죠 십년만 젊었어도 이탈리아의 음악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해보겠는데 ------.”
스님은 그러한 아쉬움을 성악회회원으로 속해 있다가 독일과 이탈리아로 유학 간 후배 스님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달래고 있다. 연주회에서 얻은 수익금으로 유학중인 몇몇 스님들을 지원하고 있는데, 그분네들이 돌아와 승가대학에라도 불교음악과를 개설하고 불교음악에 기여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부처님의 소리를 듣는 집, 문향원은 시내쪽에서 자하문 터널을 빠져 나오면 바로 왼쪽 골목의 어귀, 낡은 한옥에 자리하고 있다. 피아노 한 대가 좁은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연주회 녹화테이프가 책상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 말고는 여느 스님의 방과 다를 게 없다.
기자가 투명하고 아름다운 스님의 음성을 들으며 문득 이천 오백년 전에 오셨던 부처님의 음성은 어떠했는가를 잠깐 생각하는 사이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수법스님은 수화기를 들어 연주회 준비로 지방에 머물 동안 스님을 실어 나를 운전기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뭐, 우리에게 추석날 꼭 집으로 돌아와야 할 까닭은 없지요 나야 근처 마땅한 절에 묵어도 되겠지만 기사님은 집에 돌아와 추석을 쇠도록 하세요”
9월 말, 울산에서 있을 17회 정기연주회를 위한 홍보로 스님은 벌써부터 바빠지기 시작했다.
한여름 방에 불을 지펴가며 지졌던 욱신대는 다리를 이끌며 곧 울산으로 내려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님은 수술 후 ‘절대 집에서 안정해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를 까마득히 잊은 채 푸대에 올라 신들린 사람처럼 찬불가를 부르며 부처님과 대중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갈 것이다.

글/이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