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구안락행(口安樂行)
4안락행의 둘째는 구안락행이니, 말세에서 이 경을 설하는 법사가 그 언어활동(구업)에 있어 다음 같은 일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규정이시다.
첫째는 「딴 사람 · 딴 경전의 허물을 들어 말하지 않는」 일이다.
다른 경전도 부처님에 의해·설해졌고, 또 이렇게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바에는 각각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운 깊은 도리를 간직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어떤 경을 비난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심판하는 격이 된다.
설사 법화경에 이르러 이전의 경전모두가 방편의 가르침이었다고 밝혀진 바 있다 해도, 이것은 이전의 경전들을 얕보아도 괜찮은 근거는 되지 못한다. 방편의 가르침은 방편의 가르침이기에 더욱 소중한 까닭이니, 방편을 통하지 않는 교화라는 것이 어디에 있었던가 이것은 뭇만으로는 꽃 하나 꺾을 수 없고, 꽃을 꺾기 위하여는 반드시 손을 써야 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진실인 일불승을 삼승의 형태로 설해 오시다가, 법화경에 이르러서는 그 삼승 속에 깃들어 있던 일불승의 진실을 일깨운 것에 지나지 않으시니, 이에 삼승이 온통 일불승으로 지양되었다 해도 삼승을 떠나 일불승이 별도로 존재함과는 다르다.
따라서 일불승의 눈으로 다른 경전들을 다시 바라 보는 태도, -이를테면 지금껏 소승의 법인 줄만 여겨오던 사제니 십이인연이니 하는 그것이 사실은 일불승의 내용이었음을 재인식하는 태도가 요청되는 것일 뿐, 결코 법화경만이 제일이라 하여 다른 경을 졸렬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길로 치달려서는 안된다. 이는 법화경을 위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법화경의 정신에 전면적으로 역행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바에야 거기서 무엇이 이루어지겠는가 둘째는 「다른 법사를 업수이 않는」일이다. 우리는 분별심을 일으켜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이 체질화되어 있다. 그러기에 어떤 것을 얻고, -특히 그 얻은 것이 매우 가치 있는 것이라 할 때, 금시에 우쭐해져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기 쉽다. 그리하여 자기가 대승 중에서도 원교(圖敵)에 서 있다하여 별교이하에 속하는 법사들을 경멸한다면, 공을 깨달았다 하여 공에 매임이 공의 정신에 위배되듯, 이는 스스로 자신의 원교가 한낱 공허한 관념에 지나지 않음을 표명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셋째는 「남의 호오장단을 말하지 말며, 성문승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 그 잘못을 말하지 말며, 또 이름을 들어 그 아리따운 점 찬탄치 말며」라고 설헤진 일들이다.
혹은 남의 단점은 말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 장점을 칭찬하는 것이야 도리어 잘하는 일이 아니냐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마주하여 그장점을 말하는 것은 이유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설사 그런 뜻이 없다 한다 해도 상대를 우쭐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범부란 유동적인 것이어서 오늘의 청백리라 해도 언제까지나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라면, 이 같은 칭찬은 처음부터 경솔한 판단에서 나온 것인데다가 남을 곧잘 칭찬하는 사람은 타인 앞에서는 같은 사람을 헐뜻기도 하는 예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남의 호오장단을 말하지 않음」만은 못한 것이다.
이는 범부의 처지이므로 그렇다 치고, 성문승에 속하는 현인 ·성자의 경우는 어떻겠는가 천태대사의 지적처럼, 칭찬할 때는 더욱 소승에 집착하여 대승으로 나아가는 뭇을 영영 일으키지 못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으며, 이를 비방하는 경우에는 대승·소승을 함께 상실토록 할 위험이 따른다. 결국 비방과 찬탄에도 흔들리지 않음은 불퇴전의 대보살에 있어서만 가능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넷째는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일이다. 이는 소승의 무리라느니, 대승이긴 해도 방편에 머물어 있을 뿐, 일불승의 도리는 모른다느니 하여 싫어하는 마음이 움직인다면, 처음부터 그들을 법화경의 교화에서 제외시키는 것밖에 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이 네 가지가 다 사람들의 뜻을 거슬리지 않으려는 배려인 점이 중요하니, 그러기에 남의 호오장단을 말하는 것을 삼가는 것에 의해 순순히 법화경을 받아들이도록 하라는 취지일 것이다.
ㄷ. 의안락행(意安樂行)
4안락행의 셋째는 의안락행이니, 마음가짐(의업)에서 본 안락행이다. 이렇게 마음가짐과 연관되므로 먼저 지행(止行)을 보이고, 뒤에서는 관행(觀行)에 언급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지행 ·관행은 곧 지관(止觀)이라 일컫는 그것이어서, 어지러운 마음을 멈추어서 집중함이 지행이니 선정에 해당하고, 이 동요되지 않는 마음으로 진리를 관찰함이 관행이니 지혜가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지행에서 요구된 것은 「질투 ·기만의 생각을 품지 않는」 일이다. 질투는 자비에 역행하는 감정이니, 그런 태도에서 법화경을 통한 교화가 이루어질 리 없다. 또 기만은 지혜의 빛을 가리는 행위인 점에서, 이는 이타(利他)뿐 아니라 자리(自利) 또한 불가능하게 만든다 해야한다.
둘째는 「불도(佛道) 닦는 자를 욕해 그 장단을 캐지 않는」 일이다.
불도를 닦는 것은 오직 보살만의 일인 점에서 별교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법화경의 원교에서 있다 해서 별교의 보살을 얕보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취지이리니 그렇게 하는 것에 의해 자칫 그 선근을 손상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배려이겠다. 또 별교라 하여 물리친다면 그것이 어떻게 원교일 수 있겠는가.
셋째는 괴롭혀서 의혹에 빠뜨리지 않는 일인데, 경전에서는 다음같이 설해졌다. ‘만약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로 성문 구하는 자·벽저불 구하는 자·보살승 구하는 자 있을 제는, 이를 괴롭혀 의혹케 하여 그 사랍에 이르되 “너희 도에서 심히 멸어 끝내 일체종지는 능히 얻지 못하리니, 어째서어뇨 너희 방종한 사람으로 도에 정진 안한 탓이라”곤 하지 말라.’
이는 삼승에 공통하는 처지인 점에서 통교의 무리임을 알 수 있거니와, 이들 또한 배격 받는다면 대 소승을 함께 상실할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넷째는 논쟁을 삼가는 일이 내경에서 「여러 법 논의하여 다투지 말라」고 하심이 그것이다. 같은 불법안에서 서로 논쟁을 일삼는 것은 진정한 불법이 분별을 넘에선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니, 논쟁으로 인해서야 논쟁이 그치는 날이 어떻게 올 것인가.
이상이 지행에 관련되는 것인데 대해 관행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첫째는 「일체중생에 대비(大悲)의 상(想)을 일으키는」 일이다. 이는 앞의 지행의 질투 ·기만하지 말라는 요구를, 대벼섬만이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모든 여래에 자부(慧父)의 상을 일으키는」일이다. 앞의 지행에서는 불도를 닦는 자를 욕하지 말라 했거니와, 불도를 닦는 자란 누구인가 현재는 설사 낮은 단계에 머물어 있다 해도, 불도를 닦고 있는 점에서 볼 때는 엄연한 미래불(未來佛)이시다. 처음부터 부처님이신 분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니, 어느 부처님이시건 중생의 처지에서 몸을 일으켜 불도를 수행하시는 것에 의해 부처님이 되신 것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불도 수행자들이야말로 미래세의 부처님이신 터에, 그 수행이 완전치 못하다 하여 어떻게 업수이 여기겠는가.
셋째는 「모든 보살에 대해 대사의 상을 일으키며, 시방의 모든 대보살들을 심심(深心)으로 공경하고 예배하는」 일이다. 이는 앞의 지행에서 괴롭혀 의혹케 말라는 것에 해당할 것이니, 법화경의 처지에서는 삼승이 다 보살이어서 중생을 제도하고 있음이 되는 까닮이다. 그렇다면 의당 스승으로 받들어야 할 뿐, 그 어디에 단점을 지적하여 괴롭힐 여지가 있겠는가.
넷째는 「모든 중생들에 평등히 설법하는」 일이다. 이는 앞의 지행의 대목에서 논쟁하지 말라는 것에 해 당하니, 편벽을 떠남이 평등이기에 논쟁을 잠재움이 되는 것이다.
지행 ·관행은 상호 의존하는 관계이어서 지행은 관행으로 이어지는 것에 의해 완성되고, 관행은 지행을 전제하여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지행에서 요구된 네 가지 일과, 관행에서 설해진 네 가지 사항은 공통됐던 것이니, 물이 흘러가듯 심상히 설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부처님의 세심한 배려가 깔려 있었음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