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강(田間)스님과의 법거량(法擧樑)
“내가 26세 되던 또다른 어떤 날, 금강산 지장암에 계신 한암(漢岩)스님을 배방하였다.
한암스님이 나에게 묻기를, ‘육조(六祖)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印可)를 못하겠으니 자네는 어떻게 하였으면 인가를 받겠는고? ’ 하시었다.
나는 박장삼하하고 편거(便去)했다.” 〔김정휴, 田뼈購評傳-우리는 살아있는가 죽어었는가)(서울:노루, 1985), pp100-101)
2. 추담스님0| 전하는 무언의 가풍
“고(故) 방한암 선사는 도인으로 내외에 칭송이 자자했던 분이다. 수십년 전 일본인들은 조선인으로 소위 도인이라 하여 수양(修養)이 훌륭하다 하니, 과연어떠한 인물을 두고 그러느냐고 여러 가지로 주목도하고 시험도 해보았다.
그렇지만 원래 숨은 도인이라 아무리 고관대작이라도 불러서는 면회할 재간이 없고, 찾아가서도 문 밖으로 마중나오는 법조차 없으니, 할 수 없이 구실로는 고승을 방문한다 하고, 방내(房內)에 들어가 놓고는 심중에 여러 각도로 선사의 인물됨을 보는 것이다.
대면해 놓고 보면, 자기의 영(靈)은 선사의 형안(炯眼) 속에 들어가는 것 같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연히 외경스러운 마음이 난다고 한다.
단죄한 채로 무언(無言)으로 객(客)의 내의(來意)를 기다린다. 찾아간 편에서 말이 없으면, 한 시간 앉도 무언이고 종일 앉아 있어도 말이 없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뜻을 훤히 알고 있는 것이다. 육체는 반석과 같이 부동(不動)하면서도 정신은 일순(一睡)도 놓지 않고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추호도 소홀히 대할 수 없게끔 하였다. 한 마디 물으면 춘풍화기(春關癡)와 같은 기상으로 곧 대답해 주는 것이다. 여하한 난문제(鐵鍵)라도 다 능히 대답한다.
원지로나 또는 대답함에 요령을 얻어 분명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이외에 딴 이야기는 없고, 한낱 침묵 뿐이다. 한 시간이 가도 무언, 두 시간이 가도 무언, 혹 불합(不合)한 시간이라든지 질언(質言)에 따라 방망이로, 혹은 싸리비로 쓸어 깨끗이 하고 있으니, 대하기 전부터 주의해야 된다는 것이다.
일진과풍(-陣過風)과 같이 표연하고 청초한 분위기 속에 요령 없는 우문이 아닐까 생각하여 자주 묻기조차 두렵다고 한다. ------후략------” 〔秋置, ‘永生의 趙울-故方漢岩輝師-’, 利輝짧法集』(서울:홍법원) pp.369~37이
3. 회초리 경책
“------전략------내 소년시절이 끝나려는 이십 안팎의 일이다. 그때 나는 사교업선(擔敎入輝)은 아니지만, 「화엄경」올 마치고 염송(站煩), 전동(傳燈)도 끝내고 오대산 상원사로 방한암 선사를 찾았다. 그곳에는 백여 명 가까운 운수선객(雲水輝客)이 수선(修揮)하고 있었고, 나는 그 말석에 앉아 참선이랍시고 시작하였다.
그 때의 내 오만방자하고 혼천동지, 무애자재하던 눈 앞에 한암스님의 조용하고 안한하며, 안상(安詳)하고 정적인 일상생활은 염증이 났다.
내가 바라던 임제선풍의 살활 무애한 가풍을 아무데도 창을 길 없어 실망이 크던 차에 매일매일의 「금강경」 강론은 더욱 나의 오만방자함에 불을 질렀다. 그까짓「금강경」쯤 다 알고 있는데 무슨 강론이란 말이냐.
어느 날 보청고(普請鼓)가 울렸는데 나는 그 울력에 나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막혔던 오만함이 터져나왔다. ‘한암같은 칠통이나 가서 울력하라고 해. 나 같은 견성도인은 안해도 된다구.’ 그 이튿날 아침 공양이 끝난 뒤다. 한암 큰스님의 우렁찬 노성이 떨어졌다. ‘너 이놈 영암, 종아리 걷으렸다.’ 그리고 택성을 불렀다(택성은 후일의 탄허 큰스님이다). ‘가서 뱃단 드려라.’나는 히죽 웃으며 한암스님 앞으로 가서 종아릴 걷었다. 그 동안 한아름이나 되는 회초리가 탄허스님에게 안겨 들어왔다. 한암노사는 불문곡직하고 매를 후려쳤다. 물푸레가 서너 개 두동강이 났다. 나는 또 한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바로 한암스님의 엄제선풍인 것을-------그때 업승스님이 윤고암스님이었는데, 내 웃음을 보고 히죽이 웃고 계셨다.
한암의 매질은 더욱 거세어졌고 내 종아리에는 핏발이 섰다. 나는 한마디 했다. ‘이것도 매라고 치시우 근질근질하던 차례 청량산을 먹은 것 같소이다.’ 그때에야 한암노사의 노기가 풀린 듯, ‘에라 이놈, 물러서라’하셨다. ------중략---
그 후 한암스님은 6·25를 만났다. 권속과 운수들이다 남천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노사께서는 좌당생사, 이 말씀을 관철하셨다. 실로 앉아서 생사를 뛰어넘으신 것이다. 조동선풍이 아닌 엄제선풍의 기봉이 칼날처럼 빛남을 본다. ------후략------”
控足:이 내용은 효산스님에게서 필자 역시 들은 바이다. 다만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몰랐었는데, 조영암 스님임이 밝혀졌다. 화산스님에 의하면, 대중울력의 동참이라고 하는 청규(淸規)를 지키지 아니한 것에 경책을 내렸다고 한다. 이렇게 방을 내리는 일은 이 때가 유일한 경우였던 것 같다.
평소 온화하고 자비로웠던 스님의 또 다른 모습이다.
4. 을촉년 대홍수
---전략------그 뒤 잠시 광주 봉은사에 주석하설 때 을축년 대홍수를 만나 도도한 황류(黃流) 속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들 수백 명을 건져 구제의 손을 뻗쳤으니 금세(今世) 활불(活佛) 아니시고 뉘라 이렇게 자비심으로써 제생(濟生)의 도를 다하얐으랴.
----후략------”
지금도 여름 장마철이면 매스컴에서 언급되는 기록적인 을축년(1925) 대홍수 당시 스님은 봉은사 조실로 계셨다. 오대산으로 들어가시기 직전의 일이다. 필자 역시 스님이 을축년 당시에 자비행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봉은사의 비(陣)나 나 청호(羅淸湖) 스님의 당시의 보살행을 담은 『불괴비첩(不慶陣帖)』에도 스님의 이야기는 없다. 덕암스님의 이 글이 유일한 문중(文證)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당시 주지였던 나청호 스님과 함께 또는 당시 조실로서 주지에게 제도중생을 말씀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곧 봉은사를 떠나서 오대산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에 나청호 스님 중심으로만 기록된 것은 아닐까. 앞으로 자세한 고중으로 보다 분명히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