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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인물열전(人物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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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1년 09월 115호
친일승(親日僧) 이회광(李晦光)(2)

한일합방이 된 지 불과 일 개월 뒤에 체결된 이희광과 조동종의 연합조약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약내용은 일곱 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다.
1. 조선 전체의 원종사원 대중은 조동종과 완전하고 또 영구히 연합동맹(連合同盟)하여 불교를 확장한다.
2. 조동종 종무원은 조선원종 종무원의 설립인가를 담당한다.
3. 조선원종 종무원은 조동종의 포교에 대하여 상당(相當)한 편리를 준다.
4. 조선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으로부터 고문을 초빙한다.
5. 조선원종 종무훤은 조동종 종무원으로부터 포교사 약간명을 초빙하여 각 수사(首寺)에 배치하고 일반포교 및 청년승려의 교육을 맡기며 또 조동종 종무원이 필요해서 포교사를 파견할 때는 조선원종 종무원 조동종 종무원이 지정하는 다른 수사찰 또는 사원에 숙사(宿舍)를 정하여 일반포교 및 청년승려의 교육에 종사하도록 한다.
6. 본제맹(本縮盟)은 상방의 의견이 맞지 않을 때 폐지 ·변경 혹은 개정한다.
7. 본 계약은 원종 종무원 인가일로부터 실행한다. 위의 연합조약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조동종은 단지 원종 종무원의 인가를 돕는 외에는 별다른 역할이 없는 반면 조동종은 우리의 사찰을 조동종의 포교 활동에 이용할 뿐 아니라, 우리의 청년승려에 대한 교육과 일반인의 교화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한국의 불교를 차츰 일본 불교화로 나아가려는 구체적이고도 치밀한 사전 계획이었음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계약이었다.
더욱 가증스럽고 놀란 일은 이같은 일본불교의 야망과 속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조약을 이회광은 국내의 누구와도 협의나 상의함이 없이 전혀 독단적으로 체결하고 돌아와서는, 위의 한국불교에 굴욕적이며 불리한 7개 항의 조약문은 보여주지도 않고 다만 일본의 조동종과 대등한 관계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고 선전하면서 찬성하는 날인을 받으려고 13도의 중요사찰을 돌아다녔다.
까마득히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대부분의 사찰들은 찬성하는 날인을 하였다. 그러나 조약의 전문(全文)이원종 종무원의 서기(書記)에 의하여 통도사에 전해지고 곧 전국에 알려지면서 많은 승려들은 분노와 함께 반대하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민족주의 불교운동을 활발히 전개시킨 한용운을 비롯하여 박한영 ·진진웅(陳震應) ·오성월(吳握月)등이 백양사와 화엄사, 범어사 둥 전라도와 경상도의 승려들이 주축이 되어 이회광이 체결한 조약 자체를 반대함은 물론 아울러 이회광과 그가 설립한 원종 또한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이회광이 돌아온 이듬해인 서기 1911년 1월 영남과 호남의 승려들은 순천 송광사에 모여 친일노선을 걷고 있던 원종에 대항하여 임제종을 세우기로 결의하는 한편 임시로 종무소를 송광사에 두며 관장으로는 그 당시의 원로였던 김경운스님을 선임했다.
그러나 김경운스님께서 너무 연로하여 집무하기가 어려웠으므로 한용운스님께서 관장대리로 종무를 맡아 보았다.
그 당시 원종 종무원은 지금의 조계사 전신인 각황사에 있었다. 이 각황사는 한국승려가 서울을 자유롭게 출입하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 표시로 이회광이 도일(獲日)하기 전에 세우고 그곳에 원종 종무원을 옮겨 설치하였다. 따라서 각황사는 도성출입을 가능하게 해준 일본인 승려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담긴 사찰이었다. 이회광은 일승에 대한 감사의 정을 한식(韓式) 건물로 표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던지 1914년에 가서는 각황사를 조동종 별원과 같이 일본식 건물로 개조했는데 따라서 각황사는 원종 종무원과 함께 친일(親日)을 상징하며 한일불교합병의 요람이었다.
한용운이 이끄는 임제종의 활동이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활발해지고 민족불교운동 또한 기틀을 잡아가자 이회광과 일본불교세력은 갖가지의 구실로 임제종의 진로에 방해를 했으며, 결국 1912년에는 총독부에 의하여 범어사 임제종 종무원의 간판이 내려지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원종과 임제종의 대립이 첨예해지자 총독부는 1911년 한국불교를 독립, 발전시킨다는 명분을 내걸고 사찰령을 발표했다. 사찰령에 의하여 원종과 임제종은 해산되고 30본산제(本山制)의 새로운 교단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종지의 명칭은 선교양종으로 했다. 이렇게 종지를 정하는데 이회광의 역할이 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임제종은 해산하지 않고 사실상 범어사를 중심으로 민족불교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이회광 등도 사전에 한국불교의 종지를 선교양종으로 할 것이란 것을 미리 알고 총독부의 의견에 동조하도록 하였음은 물론 사찰령에 명시된 본말사의 사법의 제정에 있어서 일본승정의 예를 그대로 따름으로써 본말사법 자체가 식민지 통치에 편리하도록 제정되었는데, 특히 이는 각 사찰의 특성이 감안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본사와 말사의 관계가 종교적 원이 아닌 행정적 편의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오늘날까지도 종단 자체가 관료화되고 편의 주의에 떨어지게 되어 한국불교의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일본승정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한국불교사법과 함께 일본풍의 대처하는 풍습이 본산 주지를 중심으로 번져가고 있었는데 급기야는 사법의 대처금지 조항을 삭제하기에 이르렀고, 1919년 용주사 주지 강대련은 사이토 총독에게 불교기관확장의견서(佛敎觸購張意見書)라는 탄원서를 통하여 한국승려도 일본승려와 같이 취처할 수 있도록 탄원하고 있으며 나아가 어이없게도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결혼까지 주장하는 망발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이 당시의 승풍이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로써 몇몇 친일승들의 망종적인 언행은 현대 불교시에 있어 크나큰 쟁점과 대사회적인 물의만을 불러일으키고, 종국적으로는 한국불교가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 아래에서 갖가지의 분규로 약화되고 파행적인 모습으로 허덕이는 결과로 남게 한 정화운동의 시발(時發)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친일승들의 망종행위를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강대련이 ‘불교기관확장의견서’와 같은 망발을 일삼고 있을 때 이회광은 또 다시 일본 임제종의 일개 포교사인 아토후지(後顧瑞岩)와 만나 한·일불교의 융화를 표방하고서 혼국불교를 일본 임제종에 부속시키는 운동을 일으켰다.
한때는 원종이라는 이름으로 다케다와 더불어 일본조동종과 연합하려다 실패했던 이회광은 이번에는 일본 임제종 묘심사에 귀속시키려고 음모를 꾸였던 것이다.
특히 1920년 2월 일본에서 돌아온 이회광은 김용사 ·고운사 ·은해사 ·동화사 ·기림사 ·통도사 ·범어사 등 경상도의 7개 본산주지를 대구로 초청하여 그의 음모를 구체화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번에도 10년 전 조동종과 연합할 때와 같이 본산주지들에게 묘심사와의 관계를 감추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불교교육사업을 진홍하며 불교를 개혁하기 위해 불가불 종명(宗名)을 개칭하고 종무원을 설립, 사찰재산을 정리해야 하므로 본산에 통문을 보내 종명개칭신청서와 이유서에 연명하도록 종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30본산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유학생 청년단과 전국의 승려들은 강대련에게 그 경위를 묻자, 강대련은 총독부 나가이 종교과장을 찾아가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자 나가이는 “조선사찰은 사찰령에 의하여 조선총독이 결단할 일이므로 결코 이회광이나 본국의 영향으로는 별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나가이의 말을 그대로 공문에 설어 각 본산에 회신하자 전국의 많은 승려들로부터 이회광은 빗발같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이회광은 구구한 변명을 하고 강대련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는 동의 추한 작태만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이회광의 친일과 매교 행위는 더 많이 있지만 지면 관계상 이 정도에서 그의 행적을 추적할까한다.
종문에 귀감을 드는 일만 해도 한량 없거늘 하물며 추문에서랴 ! 특히 희대의 매교자 이회광의 행적을 인물열전에 올리는 일부터 별로 내키지도 않고 바람 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역사는 고칠 수 없으므로 차라리 추문을 들어내어 뒷 사활을 경계함 또한 교훈이므로 두 회에 걸쳐 연재를
하였다.
광복 이후 오늘까지도 계속되는 종단 내부의 분규와 불화합의 불씨가 이때 이미 잉태되어 있었음을 생각할 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종단의 어지러운 내분과 종정문제로 불화를 보이고 있는 시기이므로 적어도 한국불교 근대사를
다시 음미하면서 역사는 맹엄하고 엄정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아울러 오늘의 이회광, 강대련과 같은 매교자가 되지 말기를 바라면서 두서 없는 글을 맺는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박경훈 선생이 쓰신 중앙신서 「불교근세백년」을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