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조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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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조병활
2001년 06월 232호
1954년 9월 30일. 선학원에서 승단정화를 위한, 역사적인 제1회 ‘비구승’ 임시종회가 열렸다. ’54년 9월 28~29일 개최된 제2차 전국비구승대회서 선출된 종회의원들이 모여, 종단 집행부를 구성하는 회의였다. 종정에 만암 스님, 부종정에 동산 스님, 도총섭에 청담 스님, 아사리에 자운 스님, 총무부장에 월하 스님, 교무부장에 인곡 스님, 재무부장에 법홍 스님이 선출됐고, 종회의장?부의장엔 효봉?적음 스님이 각각 뽑혔다. 한국불교는 이 때부터 ‘본래면목’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고난’ 속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때인 ’54년 10월 3일. “교단의 중요한 사상적?역사적 법통을 다루는” ‘종조논쟁’이 선학원에서 일어난다. ‘태고법통설’을 따르는 퇴경 권상로와 ‘보조법통설’을 주장하는 불화 이재열이 한자리에 모여 쟁론을 벌인 것이다.
‘근ㆍ현대 종조론’은 주지하다시피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하편(1918. 신문관)에 적혀 있는 “보조후시설조계종(普照後始設曹溪宗. 보조국사 이후 비로소 조계종이 설립됐다)”이 시발이 됐다. ‘조계종 종조를 어떤 분으로 할 것이냐’(조계종 종조설)는 논의는 이후 일제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됐고, 지금도 그 여진은 남아 있다. 현 대한불교 조계종은 종헌에 도의국사가 종조임을 명기하고 있는데, 이 설은 일찍이 한암 스님과 퇴경 권상로에 의해 제기됐다.
이렇게 개화된 종조설은 1930 ~ 40년대 이르러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면서 조계종사 연구의 수준을 한 단계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가 이 때 마련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1930~40년대 논쟁은 ‘태고종조설’과 ‘지눌종조설’로 대별大別된다. 신라 말 구산선문의 조사들에서 종조를 찾으려던 흐름과는 별도로 태고국사나 보조국사를 직접 종조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표출된다. 당시 태고종조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포광 김영수(1884~1967). 포광은 <진단학보> 8?9집(1937?1938)에 발표한 ‘오교양종에 대하야’ ‘조계종에 대하야’ 등을 통해 태고종조설을 강하게 주장했다.
‘태고종조설’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보조종조설’이다. 보조종조설은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처음으로 등장하지만, 논리적 틀은 불화佛化 이재열에 의해 다듬어졌다. 석불화?이재병 등의 필명도 사용했던 불화는 법운 이종익(1912~1991)과 함께 보조종조설을 체계화 하는 데 앞장섰다. 태고법통설에 대한 문제제기는 본래 일본인 불교사가 에다 토시오(江田俊雄. 1898~1957)가 ’35~’36년 ‘태고 법맥의 착란錯亂을 논한다’(<금강> 1호) 등을 발표하며 시작됐지만, 불화?법운 두 사람에 의해 체계화됐다.
이들이 주장한 ‘보조종조설’은 ’54년 9월 28일 비구승들이 채택한 ‘불교조계종 헌장’에 정식으로 등재된다. “신라선종 사굴산파조 통효범일을 원조遠祖로 하고 고려 조계종조 보조지눌을 종조로 한다”는 내용이 ‘불교조계종 헌장’ 종조 조항에 올려진 것. ‘보조 종조’는 물론 ’41년 공포된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에 명시된 “종조는 태고보우로 한다”는 것과 상치된다. 때문에 퇴경?불화가 ’54년 10월 3일 선학원에서 ‘종조’를 놓고 격론을 벌였고, 종조논쟁은 이후 정화운동에 ‘태풍의 눈’으로 대두된다. ‘보조종조설’에 대해 ‘환부역조설’이 제기되는 등 ‘사상적 풍운’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불화의 노력에 당시 교단은 응답이 없었지만, 보조국사를 종조로 추대해야겠다는 불화의 ‘신념’은 ‘다양한 형태’로 계속됐다. ’54년 8월 24~25일 선학원에서 열린 제1회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 참석해 축사까지 한 불화는 일생의 화두였던 ‘보조 종조’를 ‘불교 조계종 헌장’에 채택되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여기에 “종조를 보조국사로 한다”는 청담 스님의 성명서가 더해지자, 만암 종정은 “환부역조한 비구승단과 결별한다”며 백양사로 내려가 버렸다. 정화운동 전열이 일시 혼란해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 당시 종정 동산 스님의 교열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서 ’55년 발행된 <조계종원류>를 통해, 불화는 퇴경?포광의 ‘태고종조설’을 또 다시 공격했다.
불화?법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55년 8월 12일 전국비구승니대회를 통해 제정된 ‘조계종 종헌’은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를 종조로 하고 고려 태고보우국사를 중흥조로 한다”고 명시?공포된다. ‘도의 종조’는 이후 ’62년 출범한 통합종단 대한불교 조계종 종헌에도 그대로 계승됐다. 물론 ’94년 개혁회의가 새롭게 초안한 종헌에도 ‘종조 도의ㆍ중흥조 태고’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불화?법운의 ‘보조종조설’에 대한 반박은 당연히 제기됐다. 성철 스님(조계종 전 종정)과 지관 스님(현 원로회의 의원. 가산불교문화연구원장), 입적한 전 태고종 총무원장 이운제 스님(전 건국대교수) 등이 주된 논박자였다. 성철 스님은 《한국불교의 법맥》 (해인총림. 1976)에서 “모씨가 창안한 보조법맥은 절대로 성립되지 않으며 청허?부휴 양대 문하에서 상전相傳해온 임제태고 종통의 정당함을 증지證知하게 되었다”며 “그리하여 대한불교조계종은 석존을 시조로 하고 조계혜능을 원조로 한 임제 하 태고의 법손임이 분명하다”고, 불화?법운 두 사람의 종조설을 일축했다.
지관 스님도 《조계종사 시안일부》 (동국대. 1976), 《조계종사》 (동국역경원. 1976) 등을 통해 “보조종조론에 대한 만인이 이의할 수 없는 명확한 전거가 나오지 않는 한, 대한불교조계종 종조는 이미 4백여 년 전에 환암, 구곡의 법손인 청허?부휴 양대 문하에서 모두 한결같이 태고 환암 → 구곡 → 벽계 → 벽송 → 부용 → 서산 등으로 확정하였으니, 태고 종조를 변개變改할 수 없다고 본다”며 태고종조설을 지지했다.
어찌됐든, 일제시대 이래 일기 시작한 ‘종조?법통논쟁’은 한국불교에 대한 재인식의 일환이었으며, 한국불교사 연구에 새 지평을 확장?제공한 점이 있다. ‘종통宗統 문제’는 결국 ‘종사宗史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종조?법통논쟁’에 참여한 논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방대한 양의 자료를 섭렵하고, 논지를 정리한 연구성과물들을 펴냈는데, 이것이 한국불교?불교사 이해에 ‘신선한 인식’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논쟁 과정에서 특정의 ‘종조?법통론’에 대한 옹호론?배척론을 일방적으로 펼친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종조?종통을 꺼내면 “또 공연한 시비를 일으키려고 저러나” 하는 우려가 지금도 엄존儼存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시각은 한국불교?불교사에 대한 인식이나, 종학宗學발전을 위해서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보다 발전적인 한국불교사 이해를 위해, 이제는 종조?종통 문제에 관한 ‘자기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태도가 학자들과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된다. ‘종조’ 부분을 언제까지 ‘이상한 상태’로 남겨둘 수만은 없지 않은가. 조계종헌에 모셔진 종조 도의국사는 제대로 현창顯彰하지도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