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신안락행(身安樂行)
법사품에서 시작된 유통분에서는, 그 동안 여러 도리와 인연과 실례를 들어가며 후세에서 「법화경」을 펴도록 권고하시는 부처님의 말씀이 계속되었다. 부처님께서 아무리 일대사인연을 밝히시는 것에 의해 삼승이 온통 일승으로 지양되어 하나로 바뀌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해도, 이것이 후세에 존속되는 여부는 전적으로 중생의 손에 달린 문제라, 그러기에 되풀이 해 유흥의 권고에 그토록 열성을 보이신 것이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을 살리고 죽이는 권 한이 중생에게 돌아온 셈이어서 그만큼 어깨가 무겁거니봐, 그러기에 문수보살로부터 “후일의 악세에서 어떻게 이 경을 설해야 하오리까” 하는 질문이 있게 되고,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것이 사안락행 (四安樂行)이니 악세에서도 「법화경」을 편안히 설할 수 있는 네 가지 실천이다.
그 첫째는 신안락행(身安樂行)이다. 이것은 이를 것도 없이 삼엽(三業) 중의 신업(身業)의 변에서 안락행을 규제하신 것인데, 행처(行處)와 친근처로 나누어서 이를 설명하셨다. 그러면 행처란 무엇인가.
“문수사리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행처인가 만약 보살이 인욕의 경지에 능히 머물어 부드럽고 겸손하여 조급치 아니하며, 마음 또한 공포 없으며, 다시 대상에| 집착 않으며, 온갖 사물의 실상을 관찰하되 그것에도 집착 않고 분별 않으면 이것이 보살의 행처니라.”
「볍화경」을 펴는 데에는 으레 허다한 난관이 예상된다. 사람들은 예나 이제나 무명 속에서 탐욕 따위 번뇌를 불태우며 살고 있는 터에, 부처님의 마지막 진실인 「법화경」을 이들에게 설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돌을 던져서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키는(無風起浪) 행위가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사제니 십이인연의 도리만 해도, 범부들이 의지해 오던 모든 것을 뺏는 가르침이다. 그들이 행복이라 여기는 것의 정체가 기실은 고(苦)라 폭로하고 그들의 끝 모르는 생존욕을 긍정하는 대신 이를 끊으라 충고했으니, 범부 측에서 볼 때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대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용케도 그 같은 가르침을 송두리째 받아들인 소수의 성자들이 있어온 터에 「법화경」은 다시 그들에게 남은 철저한 가난마저 박탈하려 하니, 이것이 어떻게 순순히 받아들여지겠는가
그러기에 「법화경」을 펴는 법사에 있어서는 인욕이 무엇보다도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요건이 되는 것인데, 이것이 그리 간단치는 않다. 왜냐하면 상대가 부당한 반용을 보일 때에 이를 참는 것은 자기를 비굴의 위치에 서게 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그런데도 참아야 한다는 당위 때문에 참아낸다면 그런 인내가 언제까지 갈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억지로 참는 그것이 벌써 심하게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상태고 보면 이것이 인욕의 바람직한 상황이 못됨은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욕은 공의 도리에 투철하여 참아야 활 대상도 없어지고 참는다는 의식도 사라진 상태여서 곧 인욕조차 없어짐이 인욕의 극치임이 된다.
이때에는 이미 진여 ·실상 속에 서있는 것이니, 인욕 만이 아니라 모든 바라밀이 완성된 차원이라 할 것이다.
부루나는 설법제일로 일컬어진 불제자이거니와, 그가 본국에 돌아가 교화를 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의 일이다.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1“그 나라는 인심이 사나운 고장이다. 그런 속에서 너는 어떻게 대처하겠느냐.”
“저는 마땅히 인욕으로 대하겠나이다.”
“그들이 욕한다면 어떻게 하려느냐.”
“주먹으로 얻어맞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겠나이다.”
“때릴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때에는 몽둥이로 얻어맞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겠나이다.”
“몽퉁이로 맞았을 때는 어떻게 하려느냐.”
“칼에 맞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겠나이다.”
“칼에 맞았을 때는 어떻게 하려느냐.”
“오온의 독으로 가득찬 이 몸을 떠나게 된 것을 다 행으로 여기겠나이다.”
진여 ·실상에서 나온 인욕이 아니던들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부루나가 언변만으로 설법제일의 자리에 오른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으니, 「법화경」의 이 부분은 마치 그를 두고 설하신 말씀인 것처럼도 보인다.
이렇게 「법화경」의 법사가 입각해 있어야 할 내면적 규정이 행처인 데 대해 수행에 장애를 주는 자에 게는 접근하지 말라 하여 교제 범위를 외면에서 규제한 것이 친근처다.
첫째는 ‘국왕과 왕자·대신 ·관장’이니, 권력자들이다. 그들과 가까이하다 보면 비위를 맞추게 되기 쉽고, 한 걸음 나아가 그 권세를 이용하려는 마음이 움직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 하여 거침없이 행동했다가는 어떤 해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어느 것이든 간에 큰 구속이 아닐 수 없으니, 출가자가 접근할 곳은 아니다.
둘째는 외도니, 불교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과 문필가 따위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를테면 승려의 신분으로 노장(老莊)을 논하고 주역을 입에 담는다 할 때, 거기에 설사 불교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한대 도, 그것들은 본래부터 팔정도나 육바라밀을 닦아 열반을 추구하는 가르침이 아닌 터에 혼란 이외의 무엇이 되돌아-올 것인가. 또 문필은 끼치는 해독이 더욱 크다. 글이란 옛날의 대선사에서 보는 것처럼 깨달음의 경지의 단적인 표현일 때에만 뜻을 갖는 것이니, 그것은 공안으로 전하는 언구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시의 형식을 빌리는 바에는 표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고, 이것은 수행지례 있어서 큰 위험이 되어야 효}는 점에서, 선의 경지를 시로 표현하는 일이 보편화되면서 선은 현저히 질적인 저하를 보인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 희갑이라 해서 수 쓰고 친구와 이별한다 하여 한 수 읆조리고 하여, 일반 문사와 같아진다면 출가자로서의 면목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명백한 파계니, 법사의 접근할 바가 아님은 당연하다.
셋째는 권법 ·씨름·연극 따위의 흉한 놀이다. 구경거리는 마음을 외부로 치닫게 하고 거기에 몰입하게 하며, 승부를 가리는 경기는 어느 한편을 들게 하는 점에서 더구나 마음-의 명정을 해친다.
넷째는 도살·목축·어업 ·수렵에 종사하는 자다. 이들은 모두가 남의 생명을 뺏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 사람들이니 그 잔인함이 출가자의 길과는 멀다. 다섯째는 소승의 사부대중이다. 그들의 편벽된 견 해는 해가 될지언정 이익 될 것이 없을 것이라는 배려겠다.
여섯째는 애욕의 대상이다. 경은,“여인의 몸에 애욕을 일으키는 상(相)올 취하여 설법치 말며, 또 보고자 원치 말며, 만약 남의 집에 들어간대도 계집아이 ·처녀 ·과부와는 더불어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법화경」올 편다는 출가자가 애욕에 휘말리지 말아야 함은 당연하다.
일곱째는 불남(不男)이니 성불구자다. 이런 사람은 생각 또한 건전성을 앓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니, 이들에게는 출가도 허용되지 않았었다. 여닮째는 위해를 멀리함이다. 곧 남의 집에 홀로 들어가지 않음이니, 부득이하여 훌로 들어가는 경우라면 일심으로 부처님을 염할 것이 요구되었다. 아홉째는 남의 혐오를 살 짓을 피하는 일이다. 경은 여인을 위해 설법하면서 이를 드러내 웃는다든가 가슴을 나타내 보이는 일을 예로 들었다. 열째는 나이 어린 제자를 양육하는 일이니, 자식을 사랑하는 속인의 상태와 같은 애착에 떨어짐을 경계 하심이겠다. 그런데 이 열 가지 부류는 한결같이 「법화경」에 의해 교화되어야 할 대상틀이다. 그리고 이들을 교화하려면 접근해야만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점에서, 경은 심한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듯이도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범부인 법사를 예상했기에 경계하신 말씀이시니, 경이 원융하다 하여 그것을 설하는 사람모두가 원융할 수는 없는 점에서, 도리어 매우 적절하신 지침이라 여겨진다. 「법화경」올 남에게 셜하기도 하면서 받들어가는 것은,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 아닌 우리들 범부인 것이다. 그렇다면 남의 집에도 혼자서는 안 들어가는 따위로 늘 자기 몸을 조신히 가지려 할 때에야 소기의 목적을 다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성실성이 쌓이고 쌓일 때에만 국왕을 만나면 국왕을 제도하며, 외도를 만나면 외도를 제도하는 대역량도 생겨나리니, 구차한 듯한 이 열 가지 규제 속에 도리어 「법화경」올 살리고 죽이는 열쇠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