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어느 손 이야기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어른을 위한 동화 - 정호승 1999년 10월 212호
참으로 부지런한 손이 있었다. 그는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잠시도 쉬는 일이 없었다. 봄이 오면 그는 들에 나가 밭을 매기도 하고, 못자리에 볍씨를 뿌리기도 하고, 잘 자란 모를 논으로 옮겨 섬기도 했다. 팔을 베다가 낫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릴 때도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 상처는 오히려 영광이었다. 상처에 새살이 돋고 굳은 실이 배기는 자신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부지런히 일하는 손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손이라는 믿음과 긍지를 늘 잃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의 그런 마음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하루종일 가마니를 짜고 들어온 날 저녁이었다. 손은 몹시 피곤했다. 하루 종일 열댓 장이나 되는 가마니를 짜느라 지쳐 꼼짝도 하기 싫었다. 뜨뜻한 구들목에 자신을 집어 넣고 추위와 노동에 시달린 몸과 마음을 좀 쉬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손은 곧 부엌 한쪽 구석으로 내려가 가마솥에 끓여 놓은 뜨거운 물을 한 대야 퍼서 발을 씻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실 늘 발을 씻겨 온 손으로서는 발을 씻기는 일이 뭐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발을 씻기면 자연히 자신의 몸도 깨끗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단 한번도 발을 씻기는 일을 싫어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 따라 손은 꼼짝도 하기 싫었다. 손이 뜨거운 물에 닿는 것조차 싫고 짜증스러웠다. 그렇지만 그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손은 발을 씻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밤, 손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피곤한 가운데서 정성껏 씻겨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은 조금도 고마워할 줄 모르고 쿨쿨 잠만 자고 있었다. 손은 그런 발을 보자 몹시 마음이 언짢았다.
나는 왜 늘 발을 씻겨 주어야만 하지? 발이 나를 씻겨 주변 안 되나?
손은 비로소 왜 자신이 늘 발을 씻겨 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곰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발은 나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잖아. 늘 나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고마워할 줄도 모르잖아.
잠이 오지 않는 가운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손은 생각할 수록 늘 자신의 융숭한 대접만 받고 주인 노릇까지 하려고 드는 발이 섭섭하다 못해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난 발의 하인이 아니야, 난 나야. 내일부터 난 발을 위해 살지 않을거야.
손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그러나 손은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발을 위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루 종일 가마니를 짜고 돌아와 쇠죽을 끓이거나 군불을 지핀 뒤에 조금도 쉴 틈 없이 또 발을 씻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손은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자신이 몹시 못마땅했다. 자신이 오직 발을 위해서만 사는 것 같아 몹시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손은 몇 날 며칠 곰곰 생각하다가 아파 드러눕기로 마음을 먹고 일부러 문턱에 자신을 밀어 넣어 오른손을 찧어 버렸다. 당장 손등이 시퍼렇게 부어 오르고 피멍이 들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픔이 엄습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발도 어쩌지 못하겠지. 이제 발을 위해 사는 일은 없을 거야.
손은 은근히 그렇게 된 자신이 즐거웠다.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앓아 누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끝에 속으로 상처를 덧나게 만들었다. 손은 상처가 나을 때까지 오랫동안 앓아 누워 있었다. 그렇게 앓아 누워 있는 동안 손이 알게 된 것은 병고의 고통보다는 게으름의 즐거움이었다.
게으름은 그를 즐겁게 했다. 그는 그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아 숟가락을 드는 일조차 싫어할 정도로 게을러지려고 애를 썼다. 배가 고파서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어쩌다가 겨우 숟가락을 들거나 젓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손의 생각과는 달리 손이 게을러지자 발도 적당히 게을러지고 있었다. 어디 크게 아프지도 않으면서 발도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 있기 일쑤였다.
손은 그런 발을 보자 몹시 속이 상했다. 손 중에서도 오른손이 더 속이 상했다. 하루는 오른손이 왼손을 보고 말했다.
“왼손아, 우리가 왜 발을 위해 살아야 하니? 난 저 발이 미워 죽겠어. 어떻게 하면 좋겠니?”
“그냥 이해해. 우린 누구를 위하든 위하면서 살도록 태어났어. 그게 우리의 숙명이야.”
왼손은 문틀에 다친 상처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오른손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아니야. 난 이제 발을 위해 살수는 없어. 난 발의 하인이 아니야. 난 그 동안 쥐가 나면 발을 문질러 주기도 하고, 더러우면 씻어 주기도 하고, 발톱이 길게 자라면 깎아 주기도하고, 발가락이 아프면 열심히 약을 벌라 주기도 했어. 그런데 발은 나를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어. 그 동안 내가 너무 어리석었던 거야.”
“사랑에는 그런 맹목성이 필요한 거야.”
“아니야. 난 네 생각과는 달라. 맹목적인 사랑이란 있을 수 없어.”
왼손과 오른손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발은 그들의 이야기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발아. 넌 왜 나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니?”
참으로 섭섭하다는 눈으로 오른손은 발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발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멀뚱한 손을 한번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오른손은 발의 그런 무표정한 얼굴을 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언제까지나 발을 위해 살아야 한다면 아예 지금 발을 없애 버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밤, 오른손은 왼손 몰래 도끼를 들고 발을 잘라 버렸다. 그러자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손은 일찍이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통증을 견딜 수 없어 그만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손과 발은 서로 한 몸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발의 고통이 결국 자신의 고통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손이 미처 알지 못한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