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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손 빈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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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금장태 1991년 08월 114호
“거친 밥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즐 거움이 그 가운데 있으니, 의롭지 않은 데 부귀한 것이야 나에게는 뜬구름 같도다.” 세상이 먹고 마서는 아귀들로 가득 차서 귀와 코를 소란하게 하고 눈과 입을 어지럽게 한다.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혀끝의 감각이 지시하는 데로 때도 없이 맛을 찾아 사방으로 몰려다니고, 서울거리 먹자골목에는 어느 날이나 사람들이 들끓는다. 그래도 헛헛한 배를 부여잡고 혼자 즐거워하며 하늘에 덧없이 흘러 다니는 구름을 비웃고 있던 대장부가 예전에는 공자나 안회만이 아니었을 터이다. 산사에는 고승대덕들이 참선하고, 초야에서 는 산림처사들이 독서하지 않았던가.
문외한에게 비추어지는 선(輝)이란, 우리 자신에 본래 있는 한마음을 우뚝하게 세우고 환하게 밝히며, 그 걸림돌이 되는 잡박한 생각의 환상을 깨뜨려 스스로 깨닫게 하는 길이 어딘가 한다. 여기에 조주스님의 ‘선어(購홈)도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날 방문객이 아무것도 들지 않고 빈 손으로 찾아왔노라 변명하자, 그는 “내려놓게(放下著)”라고 대꾸하였다. 그가 던진 이 말 한마디는, 손에 갖지도 않은 물건을 생각하는 마음의 환망함을 예리하게 지적해 준다. 그래도 어리둥절해진 방문객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내려놓겠습니까”라고 반문하자, “그렇다면 가져가게”라고 대꾸하였다. 그것은 다시 칼끝으로 관념의 허상을 찔러서 물건에 사로잡히지 않는 빈 마음을 돌아보도록 거듭 깨우쳐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역설적인 말 한마디는 전광석화같이 우리의 생각을 파고들어, 온갖 사물과 사정에 얽매여 울고 웃고 다투고 뽑내는 마음의 껍질을 한칼에 깨뜨려 버리며, 그렇게 함으로써 허허한 본래의 마음을 알아보는 눈을 번쩍 뜨게 해준다. 이러한 선(輝)의 세계는 오늘을 사는 세속인에게 신선한 지혜의 생으로 접근하고 썼음을 본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오늘의 세상풍속을 둘러보자. 육신이 마음을 부리고 물질이 정신을 휘몰아가고 있다. 분명 주객이 전도된 꼴이지만, 이미 주인이 누군 지 객이 누군지 관심조차 없다. 폼에 좋다면 풀 뿌리, 벌레며 지렁이, 뱀을 가리지 않고 삼키며, 바다를 건 너 외곽에 원정 나가 뱀탕집을 진치고 점령하였다지 않는가. 그 몸을 길러서 무엇에 쓰자는 것인지. 다만 왕성한 정력으로 한 몸의 환락과 장수에 이바지하자는 것인가.
평생을 기울여 남들 위에 올라서기 위해 안감힘을 쓴다. 점수를 다투어 자식을 가르치고 명문학교를 골라 입학을 시키는 이유야 출세해서 대접 받고 살아야 한다는-확고한 믿음과 철학의 실천일게다. 그래서 판 검사되어 벌벌 떠는 사람들 위에서 염라대왕 노릇하고 싶은 것인가. 돈을 싸 들고 다니며 출마하여 선량이 되어선 칼자루 잡고 마음대로 휘둘러 보고 싶어하는 군상은 민주시대의 신종 무당들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놓치면 나락에라도 떨어질 줄 알고 붙들고 있는 것들의 정체를 직시하자. 번쩍거리는 보석으로 치장하거나 재물을 산같이 쌓아놓고 거들먹거리는 사람이나, 그것을 탐내어 쫓아다니는 사람은 결국 재물속에 자신을 파묻고 마는 게 아닌가. 으리으리한 저택에 성벽처럼 높은 담장을 치고 있는 사람은 그 속에 스스로 갇히지 않겠는가. 소유하는 재물이 자기존재를 확인해 주는 줄 착각한다. 그러니 재물을 빼고 나면 그 존재는 허물어지고 말게다.
신앙도 초월적인 대상을 극도로 높이다 보면 자신 은 먼지나 잿더미처럼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경전이나 성현의 권위도 전적으로 의존하여 맹목적으로 추종하면 자신의 존재는 무의미하게 되고 만다. 물론 초월적 대상의 권위 앞에 자신 올 던지고서 안심 입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을 발견하고 키워서 우뚝하게 서는 삶과는 전혀 다른 차 원이 맹차는 자기 마음 속에서 성품을 확인하고 하늘을 보았다. 따라서 그는 하늘을 섬기는 방법으로 ‘자신 의 마음을 잘 간직하고 성품을 가르는(存L養性)’ 길을 제시하였다. 마음은 마치 안개처럼 피어 오르고 바람처럼 사방으로 불어다녀서, 흩어지는 성질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맹자는 배운다는 것은 ‘흩어지려는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求放心)’일 뿐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마음을 어떻게 확인하나. 마음을 물에 비유하면, 겉에서는 파도가 일고 있어도 속에는 깊고 잠잠하듯이, 순간순간 일렁거리는 감정의 파도는 마음의 표면 일게다. 때로는 미풍에 잔잔하게 출렁거리고 때로는 폭풍우에 광란하듯 감정의 파도는 쉬지 않고 일어나지만, 물의 바닥이 항상 깊고 고요하듯, 마음에는 고요한 바탕과 움직이는 표면의 양면이 있는 게 아니랴.
「중용」에서는 우리의 마음과 광대한 우주나 만물과 의 관계를 긴밀하게 연관 지우고 있다. 바깥에서는 폭풍이 불거나 비바람이 치거나, 대양의 심연처럼 마음-의 고요한 바탕인 ‘중심(中)’과, 중심을 따라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마음의 ‘조화(和)’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제대로 자라는 우주의 음악적 대조화를 이루게 된다고 본다. 그야말로 우주의 중심에 마음이 자리잡고, 마음의 중심에 우주가 자리잡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마음을 어떻게 간직하나. 맹자는 마음의 깊은 속에 서려있는 기운을 ‘둑 터져 시원한 기운이라 하였다. 이 마음의 둑 터진 기운은 빛이 퍼져나가듯이 곧게 뻗쳐나가는데, 찰 길러주면 우주에 가득 찬다고 하였다. 한 사람의 여섯 자 작은 몸 에 깃든 마음이 우주의 크기와 같아진다면 사람도 우주만큼 커지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인간은 세계의 어떤 사물에도 예속되지 않을 것이요 당당하게 독립한 주인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본마음에는 재물과 지위나 명예란 너무 보잘것없는 것으로 마음을 구속하기는커녕 마음을 꾸미기에도 부족하리라.
그러나 마음은 그 속에 아무것도 없어서, 무슨 형 체나 말로는 규정되지 않는 ‘번 마음(虛心)’이다. 이 마음은 그저 텅 비고 투명하며 살아 있는 것이라 한 다. 그러기에 마음은 모든 사물을 다 받아들여 지각하고도 여전히 남음이 있다. 그러면서 마음은 온 세상을 구석구석 다 비칠 수 있는 환하게 빛나는 것이라 하였다.
바로 육조(六祖)스님이 말하는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 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난 것도 아니며 죽 음도 없었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고 한 말씀과 통하는 것이 아니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