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 평생 넘게 살아왔지만 요즘처럼 세상이 흉흉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누구나 마음의 눈을 뜨면 요즘 번번히 벌어지는 험악한 일들의 원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모르기 때문에 지금의 잘못을 되돌아보지 못하고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아이를 내다 버리고 부모를 살해하고 거짓말을 예사로 하며 사기 치는 범법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선이든 악어든, 선으로 주면 선으로 받고 악으로 주면 악으로 받게 되는 것이 인과와 인연의 이치다.
먹고사는 것이 예전보다는 나아졌건만 세상 인심은 날로 흉흉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저 오십여 년 전, 해인사에서의 살림살이가 떠오른다.
해방 직전 먹고살기 어려워 힘든 나날들이었으나 사림들은 참으로 맑고 순한 속내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어렵던 시절에도 어른들은 사랑에 둘러앉아 ‘도인’ 얘기를 하곤 했다. 도인들의 풍모는 어떠했으며, 또 어떻게 살았으며, 어느 시대에 어떤 도인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나는 그런 얘기를 들으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라는 물음을 스스로 했고, 그 물음에 도인들처럼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 친구가 ‘도를 배우러 해인사로 간다’ 고 했다. 귀가 번쩍 뜨였다. 지체없이 그 친구를 따라나섰다. 합천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줄곧 살았으니 해인사는 낯선 곳이 아니었다. 해인사에 이르러 주지 스님을 만나 뵈려 이리저리 경내를 기웃거리는 우리를 보고, 스님 한 분이 부르더니 누구를 찾느냐고 했다. 주지 스님을 만나 뵈려고 한다고 하자 무슨 일로 주지 스님은 찾느냐고 했다.
“도를 닦으려고 왔습니다.”
스무살 안팎의 건장한 젊은이였던 우리는 거침없이 그렇게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도 닦으러 왔다는 말에 스님은 한참을 웃었다. 푸른 가을 하늘만큼이나 맑은 웃음이었다. 웃음을 거둔 스님이 다시 우리에게 물었다.
“어디서들 왔느냐?”
“함천에서 왔습니다.”
“그 이전에 어디에서 왔느냐”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스님이 다시 말했다.
“그 이전엔 어디에서 왔는고.”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가. 부모로부터 오기 이전에는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해인사가 가까이 있었으나 불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그저 도인들의 얘기를 들은 게 전부였고, 그분들처럼 도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뿐이었으니 스님의 그러한 질문의 의미를 알아채지도 답을 낼 수도 없었다. 도를 닦으러 왔다는 싱싱한 기개는 온데간데 없고 꿀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툇마루에 앉아 었던 스님이 일어서며 “알아가지고 다시 오너라고 하였다. 뒤에 알았지만 그 맑은 웃음의 주인공은 해인사 선방조실 스님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궁리해 보았으나 알 길이 없었다. 쓸만한 옷 세 벌을 꾸려 집에도 알리지 않은 채 집을 나왔다. 해인사로 들어가 공부를 해야 그 답을 알 수 있을것 같았다.
해인사로 들어오자마자 법당 노전소임을 보게 되었다. 제 시간에 한 치도 빈틈없이 성실하게 불공을 올렸다. 행자에 대한 별다른 제도가 없던 시절이어서 각기 공부하는 행동거지를 보아서 계를 주었는데, 날마다 하루도 거르는 법 없이 성실했던 내 행동거지를 보고 두어 달쯤 지나자 계를 주었다.
노스님 시봉하고 밥짓고 빨래하고 틈나는대로 공부하는 것이 행자생활의 전부였는데, 그 시절 잊을 수 없는 것은 배고픔이었다. 때마침 세 해 연속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라곤 김치쪽 뿐이었다. 소나무를 베어내 껍질을 벗겨 안쪽을 베어 먹기도 했다. 절에선 도토리를 가루내어 죽에다 타서 먹었으니 음식은 맛보다 배를 채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 밥을 제대로 못먹어 머리까지 아팠고, 공부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는데 산불은 왜 그리 자주 나던지. 자연적인 산불도 있었지만, 주민들이 나무를 팔려고 일부러 불을 지르는 일도 허다했다. 사흘들이로 산불을 끄고 와 산문에 들어서면, 모두들 ‘휘-‘ 하는 허기진 숨소리를 내쉬었다.
없는 것이 어디 먹는 것뿐이었으랴. 산길을 걷다보면 누군가 신다버린 운동화가 버려져 있는 것이 종종 눈에 뜨였다. 좀 살만한 사람이 신다 버렸을 터인데, 그런 것이라도 눈에띄면 주워다 운동화 밑창을 떼내어 짚신에 붙여 신곤 했다. 전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던 일본 사람들은 총알을 만들기 위해 절에 들어와 종까지 떼어 갔는데, 그들의 그런 소행을 속절없이 보고 있노라면 젊은 혈기에 두 주먹을 불끈쥐곤 했다.
죽으로 연명하는 가난한 생활이었으나 선방의 스무 명 남짓 되는 스님들은 열심히 정진할 뿐이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나 도반끼리의 관계는 서로를 배려하는 두터운 정으로 묶여 있었다. 스님들은 어디 나들이라도 다녀올라치면 걸망을 미리 담장 밖으로 내던져 놓고 슬며시 밖으로 나왔다. 은사스님의 눈에 뜨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제자도 은사도 돈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기에 은사가 노자한푼 손에 쥐어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 할까봐 제자는 인사도 못하고 밖을 나왔던 것이다. 참으로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춥고 배고플 때 발심한다고 했듯, 그렇듯 배고픈 시절이었으나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누구나 눈 푸른 납자로 머물러 었던 시절, 돌이켜보면 그때처럼 잡념도 번뇌도 없이 ‘도’를 이루겠다는 신심으로 불타올랐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가만히 보면 요즘 사람들은 ‘깨달음’ 에 대해서도 세속에서 명리를 탐하려는 것처럼 깨달음에 연연해 욕심을 놓지 못하는 것 같다. 모든 일의 이치는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멀어질 뿐이다. 그러다보면 마음이 답답해지고 원래의 목표도 흔들리게 된다. 모든 일의 이치는 순리대로 흘러가야하는 것, 그것마저도 마음밖으로 놓으면 오히려 그 목표가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가 깨달음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짧았지만 신심으로 영글었던 행자시절은 그런 것들을 깨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