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민주주의자가 아닌가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 - 김훈
1991년 08월 114호
정치란 현실 세계의 다양한 욕망을 관리하는 일이다. 계층과 계층 사이의, 혹은 세대와 세대 사이의,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의, 이미 누리는 자들과 미래의 누림을 갈망하는 자들 사이의 욕망의 적대관계를 조정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민족들이 국가를 만들고 그 국가의 틀을 다기 뜯어 고치는 것도 욕망들 사이의 관계를 불가피하게 재조 정해야 하기 때문이리라. 욕망과 욕망이 서로를 아주 조금씩 긍정해가면서 서로 삼투되는 과정을 진화라고 한다면, 거대하게 조직된 한 욕망이 다른 욕망을 몰아내는 사태가 아마도 혁명일 것이다.
세계의 구조는 욕망의 구조이다. 욕망과 욕망이 부딪치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이 진화이거나 또는 혁명이라면, 나는 너무나 바빠서 이 같은 세계의 구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진화가 되었건 혁명이 되었건 그것이 욕망의 드라마라면 욕망이 결국 어떻게 변모하고 어떻게 외형이 변하건 간에 그 변모의 종착점에 자유나 해방의 서늘함이 있을 리 없다. 파충류가 수억만 년의 진화를 거듭해서 시조새가 되고 시조새의 날개 발톱이 다시 수억 년의 진화를 깃털이 되었다 한들 그 진화의 목표가 자유일 리는 없다. 진화는 그 자체가 근본무명일 뿐이고, 아무래도 혁명도 그러할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이 되었건 볼셰비키 혁명이 되었건, 그것이 도대체 인간운명의 내용과 형식에 무슨 변화를 가져 다 주었는가.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뱀이 새가 된들, 그리고 새가 수억만 년의 진화 끝에 다시 뱀이 된들, 새와 뱀 사이에 자유의 완성도를 비교할 수 없을 터이다. 어느 날엔가 내 욕망의 껍데기에는 뱀의 비늘이 돋혀 있고 그리고 또 어느 날엔가 내 욕망의 껍데기에는 새의 날개가 돋혀 있을 것이다. 비늘과 날개는 결국 같은 것이다. 내 안에서 살고 있는 욕망은, 그 껍데기를 덮고 있는 비늘과 날개가 결국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욕망의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가급적이면 비늘보다는 날개를 달고 싶어한다.
각자의 욕망이 모두 다 정당하다는 가설(이 코믹한 가설!) 위에 현대사회는 세워져 있다. 이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야말로 혁명과 진화가 인간에게 가져 다 준 것이 전부다. 그리고 욕망에 의한 엎치락 뒤치락으로는 혁명인 진화가 영원히 불가능한 까닭도 바로 이 문명사 전체가 이 가설 위에서 함몰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욕망이 모두 다 정정하다는 가설은 나의 욕망으로 저의 욕망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다. 너의 욕망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놓고, 그와 똑같이 정당한 나의 욕망으로 너의 욕망을 제압했을 때, 나의 욕망 은 더욱 정당하고 그때 욕망 자체뿐 아니라 남의 욕망을 제압했다는 행위까지도 더욱 정당해진다. 그러므로 각자의 욕망이 모두 다 정당하다는 가설은 욕망의 싸움을 끝까지 새내기 싸워나가기 위한 전투용의 가설이다. 그 가설 위에 세워진 모든 것들은 가설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진다. 무너지고 난 자리에서 각자의 ‘정당한’ 욕망들만이 또 다시 돋아난다.. 그리고 그 욕망들과 더불어 끝없이 무너져 가면서 끝없이 그 가설 위에다 무언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 이 지상(地上)에서의 인류의 운명이다.
정치가 현실의 욕망들을 관리하는 원리요 방법이라 고 할 때, 그 거룩한 일은 원래는 성인(聖人)들만의 것이었다. 욕망에서 떠난 자만이 세상의 욕망을 관리 할 수 있고, 세상의 욕망들이 서로 부딪치는 자리에 다 질서를 세울 수 있다. 성인이 멸절된 지금 정치는 욕망에 바탕하고 있다. 각자의 동등하고 정당한 욕망이 거국적으로 투표라는 집단행동으로 표출된다. 그 투표로 뽑아내는 것은 또 다른 욕망이다. 정치인은 그렇게 선발된 욕망의 최정상에 있다. 나는 이런 민주 주의를 추호도 신봉하지 않는다. 욕망의 최정상에 있는 자들이 남들의 욕망을 관리하고, 그 관리의 결과로써 질서를 삼을 때 이 세상은 그 정상을 장악한 욕망에 의해 거대하게 왜곡되고 말 것이다.
한국 현대정치사는 그 거대한 왜곡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욕망에서 떠난 자들만이 남의 욕망을 관리할
자격을 비로소 얻는다. 욕망으로써 욕망을 관리하려 고 덤빌 때, 욕망은 차라리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는
면이 더 옳다. 버릴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욕망의 구조 속에서 이런 언설(言說)은 또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