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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목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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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은수정 2001년 05월 231호
일요일이면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간혹 잊어버리기는 하지만 밥먹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보면 나는 기독교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스님이나 교무님을 만나면 합장으로 인사드린다. 혹여라도 법당에 들어섰다면 배拜를 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목사님이나 신부님 그리고 스님 교무님 모두 바라보는 곳은 같다고. 유행하는 표현을 빌자면 ‘무늬만’ 달라 보일 뿐이라고. 물론 이런 내 표현에 대해 ‘틀리다’ 또는 ‘위험한 생각’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3년여 동안 종교계 출입을 하며 어깨 너머로 보고 느낀 종교의 모습은 여하튼 그러했다.

참 어려웠다.
97년 여름이었던가. 문화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종교계를 맡게 됐다. 말이 종교담당기자지 문화예술분야와 함께 맡아야 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갖지도 못했고, 고백하건대 열심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힘이 들던지. 정말 어려웠다.
종교계 출입을 하면서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가 언어였다. ‘단어’, ‘낱말’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정확하겠다.
미사 법회 예배 봉행 집전 주례 재가 출가 대종사 선도사…. 호칭에서부터 예식에 사용되는 단어까지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용어부터 익혀야 했다. 1단짜리 기사라도 쓸라치면 잘못 사용한 단어는 없는지 반드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지금 생각하건대, 종교담당 기자는 유독 자주 바뀌는데(기삿거리가 적고 어렵기 때문에 모두들 꺼려한다. 신입기자들이 종교분야를 주로 출입하는 것이 아마도 이러한 이유일게다) 출입기자들이 바뀔 때마다 친절하게 가르쳐 준 홍보담당 성직자들의 인내심이 대단하다 싶다.
원불교에선가, 교구사무국을 처음 방문한 내 손에 묵직한 ‘원불교 교전’을 들려 주었다. 교전을 전하면서 교무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렵겠지만 한 번 읽어보세요. 앞으로 취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열심히 헤매고는 다녔지만….
3년여 동안 매주 한 차례씩 종교면을 만들어야 했는데 면을 채우기가 정말 곤욕이었다.
주로 식량(?)을 찾으러 가는 곳은 소식이 모이기 마련인 교구청이나 협의체 사무실 등이다. 내가 활동하는 전주지역의 경우 금산사 포교원인 전북불교회관과 천주교전주교구청, 원불교전북교구, 기독교회관 등이 참새방앗간이 되어 준 곳이다.
그러나 이 곳에서 나오는 정보는 대부분 행사소식에 지나지 않았다. 부활절 기념예배나 석가탄신일 법회, 대각개교절 기념행사…. 연례적으로 마련되는 예식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에 어려운 이웃들과의 사랑나눔 행사정도가 더해지는 수준이었다. 중앙에서는 각 종단별로 개혁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지방 종교계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가 찾아가면 홍보를 담당하고 계신 수녀님이나 교무님은 꼭 빚진 사람처럼 이런저런 소식들을 물어내셨다. ‘이런 것도 기삿거리가 되나’하시면서. 현장을 찾아다니며 소식을 주어야 하는 것은 기자 몫인데 직무유기를 많이 했다.
물론 여기에도 핑계는 있다. 전주시내에만도 교회가 8백여 개나 된다고.

참 폐쇄적이었다.
기자들은 못된 성질이 있다. 연차가 더해질수록 성격은 급해지고 대접받으려고 한다. 늘 경계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내 자신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것은 한 수녀님 덕분이었다.
찾아가는 발걸음이 가장 무거웠던 곳이 천주교교구청이었다. 홍보담당 수녀님이 서울본원으로 올라가시면서 다른 수녀님이 오셨는데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먼저 입을 열지 않는 분이셨다. ‘새로운 소식이 없느냐’고, ‘○○사업은 어느정도 진행됐느냐’고 여쭈어도 ‘제 분야가 아닙니다. 담당자에게 물어보시지요’ ‘천주교인이 아니라서 설명드리기 어렵군요’… 무안할 때가 많았다.
종교는 언론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홍보를 담당하시는 분들을 제외하고는 취재요청을 거절하기 일쑤였다. 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믿음을 주지 못했던 언론의 자업자득이려니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기가 생기기도 하고 화도 났었다.
늘 신도들의 받듬에 익숙해진 일부 성직자들의 권위주의와 폐쇄성을 느낀 것도 이런 상황에서였다.

반가웠던 일도 있다.
앞서 밝힌 것처럼 나는 기독교인이다. 개인적으로 개신교는 여느 종교에 비해 타종교를 배척하는 것이 매우 강하다고 생각해왔다. 내 신앙생활에서도 그랬다. 행동으로 표출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배타성이 강했다.
그러나 종교계 출입을 하면서, 깊이는 아니었지만 이 종교 저 종교를 기웃거리면서 느낀 점은 종교가 세상사에 구속받지 않고 정신적으로 보다 자유롭고 여유롭게 그리고 선하게 살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모든 종교의 근본은 비슷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내 종교가 우월하다거나 네 종교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었다. 내가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전북종교인협의회’ 때문이다.
천주교와 불교 개신교 원불교 천도교 등 5개 종단 성직자들의 모임체인 전북종교인협의회는 97년 결성됐는데 활동력이 대단하다.
사실 종교계 출입을 하면서 성직자들에 대한 실망이 컸다. 교회나 사찰, 신도수 등 물질적인 것에 욕심을 부리는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종교인 역시 생활인이고, 또 애정이 깊어 ‘나의’ 혹은 ‘우리’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성직자는 누구든지, 무슨 일이든지 품을 수 있는 열린 마음과 너른 가슴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기대치가 너무 높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북종교인협의회를 보면서 그래도 열린 성직자들이 있어 참 뿌듯했다. 이 곳에서 주로 활동하는 분들은 소위 ‘운동권’ 신부ㆍ스님ㆍ목사ㆍ교무님들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전라북도에서 활동하는 5개 종단의 성직자 전체가 회원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모임을 이끄는 이는 5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면서 종교위상을 높이고 있었다.
종교가 사회의 목탁과 소금 같은 존재여야 한다면 바로 이들이 그러한 일에 앞장섰다. ‘나’보다는 ‘우리’가 먼저, 바르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종교계가 앞장서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녘동포돕기운동을 지역에서 맨 먼저 펼쳤으며, 국가보안법폐지운동에도 앞장섰다. 지난 총선 때 전국에서 처음으로 종교계가 총선시민연대활동을 지지하고 나서기도 했다.
‘다름’속에 ‘같음’을 찾아내며 하나의 힘으로 모아내는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지난해 성탄절 때가 생각난다.
당시 전국의 유명사찰마다 이런 현수막이 걸렸다. “아기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이번 석가탄신일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