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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농사꾼의 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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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현기 1991년 08월 114호
“농사는 희망이 없어요 함께 목수일이나 다니시지요 목수일만 다니시면 한달에 백만 원은 충분히 벌텐데, 뼈빠지게 일해도 본전도 못 건지는 농사 무엇하러 이랴 고생이십니까.”
-희망은 농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이지. 콕식 하나하나 푸르게 자라 영그는 것을 보면 참 기특하지. 그 기특함야 나헤젠 희망일세. 자네는 아들이 병신이 되었다고 버릴 수 있겠나. 병신이 되었어도 내 아들이지.
“그래도 너무 힘들지 않습니까.”
-성한 자식 키우는 것보다 지체부자유를 열심히 키우는 어머니 모습이 더 훌륭한 모습이 아닐까. 남들이 아무리 자기 자식을, 혹은 병신의 어머니라 비난해도 그 어머니는 병신 자식의 어머니이고자 하지 성한 자식 데려다 키우려 하지 않네. 이것이 훌륭한 어머니이지 않을까. 농사가 희망이 없다 하여 농사를 버리는 것은 병신 자식이라 하여 길가에 내다버리는 어머니와 무엇이 다를 바 있겠는가 병든 자식을 키우는 일은 성한 자식 키우는 일보다 몇 곱절 더 힘이 들지만 그 어머니에겐 문제가 아닐세. 다만 어머니이 고자 할 뿐이지. 자네들 일하는 것을 보면 일하는 시간보다 참 먹는 시간이 더 길고 일을 해도 등골에 땀을 안내려고 하니, 그래 가지고서야 돈을 아무리 번들 무엇하겠나.“열심히 일한다고 세상이 상을 줍디까, 밥을 먹여줍디까.”
-자식을 열심히 키우는 어머니가 세상이 알아 주기를 바라던7k 자식이 밥 먹여 주길 바라던가. 어머니는 자식이 훌륭하게 키우는 것 그것을 기쁨으로 삼는다네. 자네는 목수이니까 집 짓는 것을 아들 키우는 것 같이 해야 하고, 나는 농사꾼이니 벼를 키우고 배추를 심는 것을 딸 키우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이네.
아저씨 말씀은 지당한 말씀입니다만 호화주택이나 호화별장 지으러 가보세요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성한 사람이 아니지요 그놈들이 어디서 그렇게 돈을 벌었겠습니까. 그런 도둑놈들 집 지으면서 쉬어가며 공사기일도 연장시키면서 지으면 어떻습니까.”
-자네는 이미 가치기준을 호화주택이니, 호화별 장에다 두고 있질 않는가 다시 말해서 호화주택은 일반서민의 집보다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말일 세. 그런데 나에게는 호화주택이 결코 좋다고 생각되질 않거든. 따라서 나는 호화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이지 잘 산다고 생각지 않네. 여기서 자 네가 도둑놈이라는 생각과 불쌍하게 보인다는 생각은 차이가 있지. 내가 목수라면 차라리 그런 집을 지어 주지 않겠네. 왜냐하면, 이 방법이 도둑놈을 없애는 방법이기도 하거니와 도둑놈들에게 집의 참다운 가치를 가르쳐 주는 방법이기 때문일세. 이 세상의 모든 집들은 목수에 의해서 생겨나지 않는가 목수가 호화주택을 짓지 않으면 호화주택이 생겨날 리 없지.
“그런다고 세상이 변할 수 있겠습니까, 도둑놈이 없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목수만 사는 세상은 아니잖습니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 기준의 문제이며 개인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말한 것일새. 다시 말하면 목수 는 목수일을 통해 세상의 잘못을 죽이는 방법, 그리고 세상을 살리는 방법을 가져야 한다는 뭇이네. 목수가 목수보다 교수를 부러워하고 농사꾼이 농사보다 사업가를 더 부러워한다면 목수의 가치, 농사꾼의 가치는 어디서 찾겠나. 이 가치를 찾는 길이야말로 목수는 목수의 도를 농사꾼은 농사의 도를 깨닫는 일이며, 이 길을 깨달을 때만이 목수의 도와 농사문의 도와 중의 도가 다르지 않음을 얄 수 있지 않겠나. 그래야만이 역사와 세계를 알 수도 있고. “지금 세상에서 아저씨 말씀대로 하다간 우리집 여섯 식구 다 굶어 죽이겠습니다. 아이들 대학 ‘공부는 어떻게 가르쳐요”
-그깟 호화별장호화주택 열채 지어주지 않는다고 굶어 죽기야 하겠는가 문제는 자네가 굶어죽는다는 생각보다 남들보다 잘 살려고 하니까 문제겠지. 또 자네의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려니까 그렇지. 자네가 자네의 자식에게 자네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문제가 없지. 오히려 자네는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려고 하는 까닭이 남들처럼 편하고 쉽게 벌어먹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학력이 높을수록 쉽게 사기치고 쉽게 도둑질하는 세상 아닌가. 만약 자네에게 목수의 도가 있다면 자네의 자식은 자네를 배우려 하지 않을까. 자네가 목수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眼)이 떠 있다면 자네는 자네의 자식에게 눈 뜨는 법을 가르쳐 주겠지. 밥만 배불리 먹이는 길이 어찌 자식을 혹은 사람을 살리는 길이겠는가
“현실이 그와 같은걸 저 혼자 어쩌겠습니까”-눈에 보이는 것만 현실이 아니라 변화시키고 바꿔야 할 일도 현실이네.
“나 혼자만 바뀐다고 세상이 바뀌겠습니까.”
-세상이 바뀌면 자네가 바뀔 수 있는가 그 길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 이것에 따라서 선택해야 할 일이지 세상이 바뀔 것이냐 그렇지 못할 것이냐에 따라서 선택할 일은 아닐세. 만약 이와 같이 행동한다면 자네는 평생 세상의 그림자만 쫓은 것일세. 지금 자네가 말한 것을 보면 자네가 세상을 보려 하고 세상을 판별하고 있었네. 이래서는 자네가 자네도 보지 못하고 세상도 옳게 보지 못하네. 진실로 자네의 세상 을 보려거든 ‘가치있는 것’ ‘옳은 것’을 통해 자네와 세상을 보려 하여야 되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나에서 비롯되는 생각 등 사상(四相)을 여의는 방법이지. 만약 자네가 ‘가치 있는 것’ ‘진실된 것’올 통해 세상을 보려하지 않는다면 평생을 헐떡거리며 살아야 할 걸세.
“가치 있는 것 진실한 것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선(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가치 있는 것, 진실한 것이란 진라라고 해도 좋고 법이라 해도 좋네. 그러나 전리나 법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네. 마치 쇠비름은 의원에게는 이뇨와 소염에 쓰이는 약초이지만 곡물이 있는 밭에 자란다면 농부에게는 잡초가 될 뿐인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나.
결국 ‘가치 있는 것’ ‘진실한 것’이란 주어진 상황과 조건을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판단한 가장일 뿐이겠지.
만약 의원이 밭에 난 쇠비름을 약초라 하여 뽑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의원의 주관성에만 집착한 거겠지. 밭에 난 쇠비름도 들에 난 쇠비름도 의원에게는 다 같은 약초이겠지만 농부에게는 밭에 난 것은 분명 잡초로 보일 테니 여기서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나. 또 가치 있다, 진실하다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가 어떤 가치를 설정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밭에서 약초냐 잡초냐 선이냐 악이냐의 싸움이 아니라 쇠비름은 상황에 따라서 약초도 될 수 있고 잡초도 될 수 있다는 것이며, 약초로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은 어떤 상황이며 잡초로 파 악할 수 있는 상황은 어떤 상황과 조건인자 그것을 파악하는 힘은 무엇이냐의 문제겠지. 잡초다, 약초다 국집하는 판별은 기실 농부의 입장과 의원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인데, 이러한 입장은 본래의 쇠비름과는 또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정말 가치 있다는 기준점은 약초냐 잡초냐의 문제가 아니라 본디 쇠비름이 어떠한 조건과 상황에 있느냐에 의해 가름하게 되어지지 않을까. 내가 말한 ‘가치 있는 것’ ‘진실한 것’이란 의원의 쇠비름, 농부의 쇠비름이 아니라 쇠비름의 조건과 상황 속에서 명의와 농부를 파악하는 법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네. 이럴 때 의원은 곡식도 약초임을 알 수 있겠지. 자네가 목수이니까 집 짓 는 것으로 비유를 하자면 똑같은 기둥일지라도 집의 크기에 알맞은 기둥일지라도 집의 크기에 알맞은 기둥이라는 것은 주춧돌, 대들보, 문, 지붕 등의 종합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된 것으로서 말한 것이지, 본래적으로 큰 집, 작은 집 등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야.
이와 같이 종합적인 관계 속에서 기둥을 세울 줄 아는 것을 우리는 객관적이라 말할 수 있고 그것을 진리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목수에게는 집 짓는 법이 있는데 이럴 때의 법은 기술적인 의미보다 여러 관계의 종합적인 룰을 말하는 것이겠지. 다 군더더기 말 같은데 한마디로 말하면 목수가 집 짓는 법을 깨달았을 때 세상도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일세. 목수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어떤 집이 좋은 집이고 어떤 집이 쓸모없는 집인지, 어떤 것이 선이 고 어떤 것이 악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네. 집 짓는 눈이 따로 있고 세상 보는 눈이 따로 있다면 그것은 알짜배기 목수가 아닐세. 자네는 세상도 하나의 집으로 보아야 하겠고 온 우주도 집으로 보아야 하겠지.
자, 세상이 쓸모 있는 집인가, 아닌가.“어떻게 해야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같은 농촌에 있어도 씨앗을 뿌린 사람만이 비가 내리길 고대하지 씨앗을 뿌리지 않은 사람이 어찌 비의 기쁨을 알 수 있겠는가 자네는 씨앗을 뿌렸는가
-농부에게도 두 부류가 있다네. 한 부류는 농사를 생계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이요, 한 부류는 농사를 삶을 완성해 기는 일로 생각하는 사람이지. 자넨 어느 쪽의 사람인가 그것부터 분명히 해야 할 것이네. 농사를 삶을 완성해 가는 일로 생각하는 사람에 겐 일이란 수련의 방법이요, 농토란 수련장일세. 이렇게 일을 수련으로 쌓아가는 사람만이 무엇이 선이 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곡식이고 무엇이 잡초인지를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갖게 된다네.
지금 세상이 어지럽다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분할 줄 모르기 때문이지 않겠나. 제 5공화국 때 금강산댐에 대응하여 평화의 댐을 만들어야 한다니까 너도 나도 좋은 일이라고 돈봉투 들고 방송국으로 달려갔는데, 결국 그 선의의 봉투는 무엇에 쓰여졌는가. 독재정권을 유지시키는 하나의 도구로 쓰여지질 않았는가. 이것은 매스컴이나 정권에도 문제가 있지만 무지(無知)의 선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실례지. 그렇다면 지혜란 구체적으로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농사꾼의 지혜는 김매기에서 시작된다네. 김을 맬 때 농사꾼의 지혜는 김매기에서 시작된다네. 김을 맬 때 농사꾼은 땅의 토양을 알게 되고 거름을 얼만큼 주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된다네. 그래서 훌륭한 농사꾼은 밭에 호미 들고 들어서면 밭의 풀부터 먼저 본다네. 목수의 지혜는 어떤가. 나무는 오래 더듬어 본 사람만이 나무의 재질을 알아보는 법 아니던가. 마치 중이 번뇌를 다스려 가듯 번뇌만 다스려지면 지혜는 드러나는 법이듯, 농부도 목수도 이와 같겠지.
선이란 것도 무엇인가. 악을 다스리는 자체를 선이라 해야지 선한 일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자네는 목수의 일로 심지(心地)를 만들어 보게 그러면 무엇이 잡초이고 곡식인지 알 수 있을 것일세.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첫 관문일세. 그곳에서 나무를 다듬듯 다듬어 보게.
“차라리 저보고 중이나 되라고 하시지요.”
-그러니까 자네는 진자 목수가 못 되는 걸세. 도(道)가 어디 중의 전유물이던가. 진짜 백정은 소를 죽일 때 단박에 쳐죽이지 못할까를 염려하지, 도끼 버리고 양반 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네. 백정의 도는 도끼 속에, 목수의 도는 대패 속에, 농사꾼의 도는 호미 속에 있는 법일세. 이것을 아는 사람만이 백정과 목수, 농사꾼의 도가 다르지 않음을 아는 법1이네. 이 법이 세상을 죽이고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중이 화두를 끌어안듯 백정의 화두는 도끼요, 자네의 화두는 대패이어야 하는 것이네.
“아이구 아저씨 머리 아파요. 그만 말씀하시지요. 이렇게 저렇게 한세상 살다 가면 그만이지 무에 그리 복잡합니까?”
-또 내가 헛소리 했군. 언제 네 놈이 한번이나 살아 있었던 적이 있었나. 시간에 채이며 돈에 채이며 역사의 덫에 걸리며 자네 멋대로 살게나. 평생을 헐떡거리며.

남기는 말
방하착(放下着)이란 말은 깨달음에 집착되어 있는 사람에게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 쓰인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은 깨닫고자 하는 생각조차 없으니 무엇을 방하착이라고 해야 할까. 차라리 깨달음의 환상을 듣게 하는 것이 방하착의 진정한 의미이지 않을까 한다. 이 길이 우리에겐 급하고 급한 일이 아니겠는가. 올올이 자기를 살피고 세계를 살피고 역사를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