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주로 인해 쫓겨난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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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혜담
1999년 10월 212호
지금 먹물 옷 입고 사는 내게야 술병하고는 상관없는 나날이지만, 가끔 길을 지나가다 소주 병이라도 눈에 띄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곤 한다. 서른 해쯤 전이니 오래도 되었건만 생생히 기억나는 것을 보면 ‘술’ 한 번 잘못 먹고 어지간히 혼쭐이 나긴 났던 모양이다.
해인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한 지 몇 달 뒤, 후원에서 일하다가 주지 스님 시자로 올라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후원에서 같이 있던 행자 둘이 하산한다는 소식이 들려 그들과 이별주를 나눈 것이 그만 화근이 된 것이다. 다음날이면 접으로 돌아간다는 그들에게 ‘이렇게 헤어지면 평생 못 볼 터인데 내가 한잔사리다.’하고 그들과 부락으로 내려갔다. 단 몇 달이지만 고단한 몸을 함께 누이며 장판 때를 묻혔던 동지들이었으니 그들과 헤어지는 일이 왠지 싸아 마음이 아렸고 또한 할 말도 많았던 게다. 우리는 그 동안 행자 생활에서 겪은 이런저런 얘기며, 그들이 산을 내려가는 변에서부터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얘기했다. 아득히 멀기는 하나 무한한 품으로 나를 향해 손을 벌리고 있는 도에의 길을 굳건히 걷겠노라며 소리치던 나는 그들에게 막걸리를 마냥 권했고, 그들과 나는 함께 취했다. 아아, 그 날 밤 별들은 왜 그리 스무살 우리 가슴속으로 쏟아져 내리던지, 우리는 별 빛에 취했고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취해 한잔 더하는 것에 의기투합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요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
‘금복주’를 놓고 이차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한창 주거니 받거니 호기를 부리고 있는데 누군가 우리를 항해 플래시를 비추는 게 아닌가. 아뿔싸, 행자인 주제에 술을 마시고 있는 우리를 부락사람 중 누군가 절에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큰절의 총무, 교무, 산감 스님 셋이 엄숙하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간담이 서늘해지며 취기가 한꺼번에 달아나는 순간이었다.
“너희는 내일 산문 출송이다. 속복으로 갈아 입고 있어라”
절에 올라와 우리 세 사람을 빈 방에 들게 하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며 한 불호령이었다. 두 사람이야 그렇지 않아도 날이 밝으면 스스로 산을 내려갈 예정이었으니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나는 안 될 일이었다. 부모도 직장도 버리고 들어온 산문이 아니던가. ‘도 통해 중생을 구제하려던’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참도 오지 않은 채 어떻게 이 일을 수습할 것인가 궁리를 하고 있으려니 만감이 교차하며 지난 날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교 시절 불교학생회에서 활동을 하던 가운데 내 마음을 오래 머물게 한 구절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是 下化衆生’ 이었다. 졸업한 뒤에 자연스레 출가하리라 마음을 먹었고, 졸업 후 한 해 뒤, 고향 울산에서 가장 멀고 깊은 절을 찾아온 곳이 해인사였다. 한겨울의 후원 생활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일만 주어지던 날들이었다. 새벽 예불을 하고부터는 하루 종일 일만 하는데 , 성직자를 기르는 곳이 이렇듯 노동만이 전부여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던 몇 달 뒤, 주지 스님 시자로 가게 되어 후원 생활에서 해방이 되었다. 주지 스님 시중을 들면서 ‘초발심자경문’을 백 번만 읽으면 한문에 문리가 난다고 해서 백 번을 읽으며 어서 행자 생활을 마감하고 본격적인 공부를 하리라 마음먹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만 이별주한 번 잘못 먹어 쫓겨날 마당에 있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날이 밝자 일찌감치 종무회의를 열어 행자 신분에 언감생심 술을 먹은 우리를 산문출송하기로 결정한 스님들에 의해 승복을 빼앗긴 나는 주지스님 앞으로 가 이실직고 참회했다.
“다른 절에 가서 여법하게 행동해 중이 되겠습니다. 그러하니 삼직 스님들에게 말씀해 승복을 다시 돌려 주도록 해 주십시오.”
주지직을 맡고 있으면서도 수십 년 해 오신 ‘장좌불와’를 멈추지 않아 어린 예비 수행자에게 오롯한 신심을 심어 주었고, 무언 중에 수행자란 무릇 어떠해야 하는지를 마음으로 보고 듣게 했던 어른 앞에서 있으려니 눈시울이 뜨거워져 오고 마음은 도려낼 듯 아파 오는 것이었다. 잠깐 속세의 습을 버리지 못해 산문을 떠나야 하는 행자의 말을 듣고 난 스님은 ‘아직 계를 받지도 않은 행자인데 산문출송은 너무하구나. 허나 종무회의에서 결정된 일이니 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 다른 곳에 가 있더라도 공부 열심히 하거라’ 하셨다.
어린 시자의 참회를 따뜻함으로 받아주셨던 주지 스님은 지금 조계종 종정으로 계신 혜암 큰스님이었다. 혜암스님께서 다시 찾아준 승복을 입고 나중에 계 받을 때 챙겨 입으라며 주신 가사 한 벌을 바랑에 넣어 걸머지고 해인사 일주문을 나섰다. 누군가 밖에서 보았다면 쫓겨나는 행자가 아니라 영락 없는 스님의 모습으로 본의 아니게 행자 만행을 떠난 것이다.
그때에는 행자들의 유동이 빈번했던 터라 행자방에 있으면 어느 절에 가면 어떤 큰스님이 계시고, 어느 곳에 가면 계를 빨리 받을 수 있다는 동 전국의 절 사정을 훤히 알 수 있었다. 해인사를 나와 나는 몇 군데 절을 가보았으나 마음에 와 닿지 않다가 발 길이 머문 곳이 부산 범어사였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승복을 입은 채 입구에서 절에 올라가려니 땀이 비 오듯 했다. ‘아 이 모든 게 그놈의 금복주 때문이 아닌가, 내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으리라.’ 다짐에 다짐을 하며 범어사에 올라가니, 행자로 받아주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승복 입은 행자는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혜암 스님 시봉 든 것을 내세워 가며 간신히 입방을 하고 나니 그 다음날부터 곧바로 호된 시집살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노동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해인사는 대중 스님들 뒤치닥거리에 그쳤으니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범어사는 신도 법회가 많아 신도들 공양을 준비하고 공양을 끝낸 그릇을 씻는 일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 그뿐인가, 당장 저녁에 대중 스님들께 공양 올릴 찬거리가 없으면 들로 나가 나물을 캐 저녁까지 만들어내야 했으니, 여간 몸도 마음도 고단한 게 아니었다. 오죽하면 해인사에서 온 행자하나가 하루 만에 가버렸겠으며, 예불 때 내가 마음속으로 ‘부처님 행자 좀 보내 주시지요’ 하는 기도를 다 했겠는가. 그러나 제행무상이 아니던가, 영원한 것은 없는 법, 범어사에서 다섯 달 남짓 더 행자 생활을 하고 얼마 전에 열반하신 광덕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고 혹독한 시집살이를 마감하니 어느새 온 산이 붉으레 물들고 있었다. 서너 말은 족히 흘렸을 땀과 함께 했던 여름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가을이었던 것이다.
돌아보면 그렇다. 행자시절이 아니고는 언제 그토록 대중을 위해 혼신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으며 자신을 온천히 낮출 수 시간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마도 행자시절 잠깐 지은 복이 중노릇 몇 십년 하며 지은 복보다 더 크리라. 대중을 위해서 정성껏 봉사한 행자치고 중노릇 못한 사람은 없으니, 행자 시절 가진 작복의 시간들과 하심이 긴 여정의 출가사문의 길에서 그만큼 절대적인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