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빛과 어둠이 하나임을 말할 수 있어야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이달의 이야기 - 정각 2001년 05월 231호
I. 성스러움의 원리를 찾아

보편적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 추구해야 할 네 가지 가치가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즉 진리(眞)와 선(善) 및 아름다움(美)과 성스러움(聖)을 뜻하며, 진?선?미 등의 가치 추구 가운데 우리는 자연스레 성스러움(聖)에 접근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스러움이란 무엇인가? 세속의 속됨(俗) 가운데 발 딛고 살아가는 가운데 성스러움의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해 나간다는 것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진?선?미와 더불어 성聖의 추구는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곧 진리에 대한 형이상학 내지 인식론, 선에 대한 윤리학,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 그리고 성스러움에 대한 종교학의 범주가 이를 말하는 것으로, 형이상학과 인식론 내지 윤리학과 미학에 대한 탐구는 학문적 입장에서 종교학적 탐구의 기본 토대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가치 추구의 궁극은 가치성의 의미 탐구가 아닌 가치성에 따른 자신 삶의 변혁 가운데 그 타당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위 가치에 따른 자신 삶의 성스러움에 근접해가야 한다는 말로서, 불교적 표현으로서 정변지正遍知라 함은 이러한 이상 경계를 서술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II. 찻잔에 비친 달 저켠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나자렛 예수는 말하였다.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는 것이요,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는 것이다”라고 고타마 붓다는 말하였다.
이에 인도印度의 베다(Veda) 문헌에서는 ‘진리는 한 분이시다.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서 그를 칭하고 있을 뿐이다(ekam sat viprah bahudha vdanti)’고 하는 바, 진리가 하늘에 떠 있는 달이라면 그 달빛은 호수에도 강물에도, 드넓은 바다와 나의 찻잔 가운데 빛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호수와 강물, 바다와 찻잔에 비춰진 진리의 모상模像을 추구하는 가운데 우리는 찻잔 속의 달이 아닌, 호수와 강물, 바다 속의 달이 아닌 달 본래의 밝음에 접근해 갈 수 있을 것이다.

III. 달빛의 패권주의

진리의 모상模像에 접근하는 여러 길. 이는 다원주의多元主義에 입각한 수많은 종교적 가르침에 비유할 수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주변에 팽배해 있는 종교 패권주의의 빗나간 양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기독교적 견해를 따라 본다면, 로마 가톨릭은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가운데 유화적 입장에 선 「비기독교 종교에 대한 교회의 태도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을 공포하였다. 한편 칼 라너에 의해 제시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표현은 에큐메니즘의 이념적?지리적 전환(확산)을 말하고 있는 듯 보이나, ‘폭넓은 에큐메니즘(wider ecumenism)’을 지향하는 이러한 어의적語義的 저변에는 ‘전 세계 사람이 거주하는 곳’을 향한 ‘성취론적 포괄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몇 년 전 「불교국가는 이렇게 공략하라」는 교황청 내부문서가 폭로되어 우리에게 충격을 준 바 있었다. 한편 ‘그 지역 종교는 그 지역 통치자가 결정한다(cuis regio eius religio)’는 원리는 종교와 정치권력과의 상관관계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이러한 원리 하에 정치적 헤게모니를 확충코자 하는 암암리의 노력이 우리 눈에 보여지기도 한다.

IV. 종교 다원주의와 그 배면背面

이러한 세태 속에 1993년, 변선환 목사는 “먼저 타종교, 특히 불교인들에 대하여 죄책 고백을 하며 철저한 회개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하였고, 1999년 동방정교와 가톨릭은 1천년 만에 역사적 화해를 이루어냈던 한편, 근래 이슬람교 시아파 지도자 하타미 대통령은 이슬람과 기독교문명과의 화해를 다짐하기도 하였다.
한편 2000년 12월, 10개 교파로 구성된 한국종교협의회 발표의 <새 천년 종교인 윤리헌장>은 “인류의 양심인 종교는 인류의 총체적 위기를 외면한 채 자기 종교의 우월성과 배타성으로 종교간 분쟁은 물론 종교인간의 긴장과 갈등을 심화시켜 왔다”는 반성과 함께 “종교에 의해 야기된 어떤 분쟁과 갈등도 용납하지 않고 종교간 대화를 통해 화해 협력과 일치를 실현한다”는 다짐을 하였으나 아직 이러한 원리는 다만 이념적 지향점으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가 “바미얀 석불을 포함한 불상들은 오래 전 우리 조상들이 남겨 놓은 것으로 있어서는 안 될 유산이며 우리의 종교적 신념에 어긋나는 것”이라 말한 것 같이, 오늘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행해지고 있는 단군상 파괴 행각은 위의 주장들이 다만 공허한 논리로서 남아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화계사 앞에 한신대 학생들이 ‘부처님 탄생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내걸며,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는 조계종 총무원장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상황에서도 ‘예수천당, 불교지옥’의 슬로건은 여전히 지하철과 고속버스터미널 주변에 횡행하고, 소수 극렬분자들에 의한 폐불廢佛 행각이 자행되는 와중에 ‘한국에서의 종교 다원주의’란 이념은 살아 남아질 것인가?

V. 상대주의적 지평을 향해

그렇다면 이처럼 자종교 중심의 논리 속에 타의 이념을 제거코자 하는 노력의 근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절대주의적 편견의 산물로서, 금세기에 일고 있는 문화 상대주의적 시각의 확산은 더 이상 레비 스트로스 류類의 인류학적 견해에서 뿐만이 아닌 종교 이념의 새로운 시각 가운데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 의장이었던 찰스 보니는 “이제 세계 종교는 종교들 사이에서 싸울 것이 아니라 ‘인류(Mankind)’를 해치고 있는 거대한 악들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언급을 행한 바 있다. 그리고 1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튜빙겐 대학의 한스 큉이 제시한 「지구윤리 구상(Projekt Weltethos)」의 주장을 이어 1993년 시카고에서 발표된 「지구윤리(A Global Ethic) 선언」은 위 종교적 절대주의를 다소 벗어나 있음을 볼 수 있는 바, 그럼에도 다분히 휴머니즘적?인간 중심적 사고 속에서의 종교적 노력을 제안하고 있다.

VI. 인간 지상주의를 넘어서

ㅁ 일원론에로의 회귀를 ㅁ

그러나 휴머니즘적?인간 중심적 사고는 『창세기』적 ‘인간 지상주의’에 바탕을 둔 이념임을 생각할 수 있으며, 이는 ‘빛과 어둠‘을 말하는 플라톤적 이원론에 근거한 토미즘 신학의 산물 속에 생겨난 언급임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절대주의의 또 다른 표현임과 함께 자기중심적 견해의 부활 양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에 ‘선량한 공동체(bonum commune)’를 위한 ‘자연과의 화해’를 주장하고 있는 금세기 다원주의의 주장은 플라톤에 근거한 토미즘적 견해를 벗어난 채 ‘빛과 어둠‘이 하나임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코 내(我)가 사건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이 아닌, 불교적 사상으로서 세계일화世界一花 즉 인다라망(因陀羅網, Indra-ja-la)적 이념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다원주의가 구현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이다. 이렇듯 천지동근天地同根의 원리를 바탕하는 가운데 ‘우주와 내가 하나이며 만물과 내가 한 몸 되어,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커다란 생명실상生命實相으로 열려지는 세계’가 이 땅에 구현될 수 있을 때 자연과의 화해를 통한 선량한 공동체가 이룩될 수 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호수와 강물, 바다와 찻잔에 비춰진 진리의 모상을 자유로이 추구하는 가운데 진?선?미를 통한 성스러움 자체, 달 본래의 밝음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