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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성과 유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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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조원경 2001년 05월 231호
종종 타인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다보면 “본관이 어디냐”고 물어 볼 때가 있다. “함안 조趙가입니다.”라고 하면 “양반이네요”라고 한다. 그러면 “양반은 뭘요. 보통 가문의 한 집안일 뿐이지요”라고 해둔다.
함안 조가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시대에 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순국을 하거나 나라를 위해 전쟁에 나아가 삶을 바친 것이었다. 또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문장가나 대학자로서 나라에 큰 공헌을 하신 분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성씨든 자신이 가진 성씨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긴다. 어느 가문을 막론하고 거의 위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왕족이었거나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선대들이 있기 마련이다.
서로 다른 성을 지닌 자들이 몇몇 모여 대화할 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선조들이 국가나 가문을 위해서 훌륭한 일들을 하셨다는 그 자체가 본인에게는 중요하지만 그 성씨 자체로서는 타인에게 큰 의미를 주지 않는다. 만약 이런 사실을 간과해 버리고 자신의 성씨만 내세워 우리는 양반, 또는 왕족 등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서로가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된다.
이런 현상은 종교간의 이해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 같다. 종교宗敎란 “가장 으뜸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자신이 받아들인 종교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그것이 타인에게도 똑같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상당히 위험하게 될 수 있다.
가끔 언론 매체를 통해 각 종교의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종교간의 화합’을 이루자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종교간에는 결코 화합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김씨와 조씨가 하나의 성씨로 바꿔질 수 없음과 동일하다.
각기 종교는 앞에서처럼 서로 각각 독특한 가르침을 갖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통해서 자타불이自他不二를 말씀하셨으며, 공자께서는 인仁의 완성을 통해 사람과 사람 관계의 온전성을 가르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을 가르치셨다.
이런 분들의 귀중한 가르침을 지닌 종교인들은 그 분들의 자신을 향한 진실한 교훈의 소리를 듣고 전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처님’, ‘공자님’, ‘예수님’이라는 타인과 별 관계없는 자신들의 교조敎祖를 앞세우게 되니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게 된다.
종교란 교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교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타인에게 우월성을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그 종교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음’ 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자신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해탈의 경지에 이르거나, 극락에 가거나 십자가의 대속代贖함으로 천당에 가게 되며, 또 부처님께 귀의하거나 하나님께 의지하거나 하여 힘든 세상 삶을 추스려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도 종교인들은 너무나 지극히 그렇게 자신을 위해 종교 생활을 하면서도 타인을 대할 때나 타종교를 대할 때는 마치 자신은 부처를 위해 살아가고 있거나 공자를 위해 삶을 헌신하거나,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처럼 여긴다. 언제나 자신을 깊이 깨달으면 타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종교란 자신의 주관적 심정으로 타인을 이해하여 더불어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용어’ 자체에 우상화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similarity is not genealogy’라는 말이 있다. ‘비슷한 모습을 지녔다고 근원이 동일하지는 않다’라는 뜻이다. 종교를 지닌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고유성은 ‘genealogy’이고 그것의 장점을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similiarity’이다. 그런데 우리는 공통부분인 ‘비슷한 모습’을 서로 나누기보다 자신만이 지닌 ‘고유성(genealogy)’만을 타인에게 주입시키려 하기 때문에 서로 이해가 어렵게 된다. 그래서 근본을 같게 하려면 ‘거짓된 화합’이 되고 ‘비슷함’을 함께 나누면 ‘진정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은 불교의 다원론多元論적인 사상과는 같을래야 같을 수가 없다. 불교와 기독교의 유신관有神觀이 유교의 현세적 실천관과 같아질래야 같아질 수 없다. 같아지지 못한다고 하여 어느 쪽은 고귀하고 어느 쪽은 저급하다고 할 수 없다. 정말 자신들이 지닌 종교의 모습이 그렇게 소중하고 아름답다면 그것을 밖으로 실천해 보이면 그렇지 못한 쪽은 당연히 그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우리 사회가 종교갈등과 반목이 생기게 되는 원인은 종교지도자들의 철저한 내면 성찰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자신의 것들로만 자신을 이해하려 들려고 한다. 만사의 진리는 다른 것과의 이해 관계에서 확증되어질 수 있다.
기독교의 신학대학에서 불경과 유경을 가르치게 되면 그리스도의 진리에 이를 수 없거나, 불교대학에서 기독교의 성경이나 유교의 사서삼경을 가르치게 되면 깨달음에 이르는데 방해가 되거나, 성균관에서 성경과 불경을 가르치면 배우는 학생들은 군자지덕君子之德을 실천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지 못함은 바로 아집我執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닌 신앙에 대해 확고한 주체적 신념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것을 피하게 된 것이라고 보고 싶다.
성씨姓氏가 다르지만 부부의 인연을 맺고서 한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으며 종교가 서로 다르지만 함께 어울려 친구도 되고, 이웃도 되고, 가족도 될 수 있다.
인간이 있은 후 종교라는 개념이 생겼지 종교라는 틀이 짜여진 다음에 인간이 그 틀에서 생겨난 것은 결코 아니다. 종교는 인생의 삶, 좀더 국한하면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가지는 것이지 결코 외부에 누구를 설득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르침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보자. 아마 나 자신만이 유일한 존재이고 타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 자신이 철저하게 깨달음의 열반에 들어갈 때에 비로소 타인과 만물이 나와 동일하게 되어 모두가 하나로 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도 귀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 분이 모든 인간의 마음에 심어 주신 진리의 말씀이 더 소중함을 타종교인들도 깊이 깨달을 때 종교의 이해는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