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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주암 정관(正觀)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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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원자 1991년 08월 114호
아직도 어머니의 품이 더 좋은 여남은 살의 어린여가 부처님 전에 향을 사르고 합장을 하며 절을 하는 모습이라든가 반야심경을 또박또박 독경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것은 이미 자기자신의 알음알이로 무장되어 그 바다같이 넓은 부처님의 뜻을 자칫 마른 지혜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우리 어른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일 터이다.
매주 일요일 사찰에서 행하는 어린이법회에 나가 부처님이 어떠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배우며 그분의 팔만사천 법문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기도 하고, 때론 바르게 세상을 살라는 스님의 법문에 귀 기울이는 그들의 모습은 이미 부처의 모습과 다름 아닐 것이다.그 어린 나무들이 자라나 성인이 되었을 때, 그들의 정신의 깊이와 높이를 굳이 셈해보지 않아도 잎이 무성한 한그루의 나무로 이 땅에 굳건히 서있을 것임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날이 세상이 삭막해지고 가치판이 혼돈 되어져 가는 오늘날, 부처님의 말씀으로 커가는 그들은 우리 모두의 희망으로 다가선다.
지난 6월 29일과 30알, 김천 직지사에는 800여 명에 달하는 각 사찰에서 어린이법회를 맡고 있는 교사들이 모여 연수회를 가졌다.
태백산의 어느 오지에서부터 울릉도 ·진도 둥 전국 84개 지역에서 모인 대학생,. 직장인, 스님들이 대부분인 그들은 ‘이야기 세계에서 부처님을 만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어린이 포교에 힘쓸 것을 발원했다.
이땅의 새싹인 어린이들에게 불심을 심어주고 가꾸기 위해 모인 그들 800여 명의 뒤엔 4만여명의 어린이들이 있는 셈이다. 한 사람의 교사가 담당한 아이들을 줄잡아 50여 명으로 보아도 4만의 어린이가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우리 불교의 앞날이 밝다는 생각과 함께 불교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한다.
불교동화를 통한 어린이포교, 동화구연의 이론과 실제, 어린이 법회의식, 아동 포교학의 강의에서부터 레크레이션과 사물놀이지도까지 익혀 각기 자신이 속한 어린이법회에 돌아가 어린이틀을 지도할 그들 곁에는 말없이 그 큰 행사를 뒤치다꺼리해주는 정관스님이었다.

부산청소년포교단체를 후원하고 있고, 특히 어린이포교의 장을 연 정관스님은 부산불교의 대표적인 얼굴로 꼽힌다. 스님은 해마다 두차례씩 전국불교어린이지도자연수회를 치를 때마다 남다른 감회에 젖곤한다.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부산권에서 출발해 현재 전국적으로 확산 조직되어 60개 지부로 결성되어 있다. 스님은 해마다 늘어나는 지도교사들의 연수회 참가를 보며 어린이포교가 나날이 활성화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사실 진작 출발했어야지요 중 ·고동학교연합회가 시작된 것이 거의 20년이 되었는데 비해 어린이연합회는 많이 늦었어요-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국민학교 어린이포교는 효과가 큽니다.”
스님이 처음 어린이포교에 뜻을 둘 무렵인 10여 년 전만 해도 사찰에 어린이법회는 있었지만 체계적인 어린이포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는데, 어린이포교말고도 불교의 전반적인 포교는 약했다.
“그 당시 불교는 할머니불교나 치마불교로 평가를 받고 있었어요 이러한 현상을 보며 어린이포교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불교가 젊어질 수 없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 민주화가 요구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속에서 개체인격이 없는 민주주의의 결실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개체마다 부처님의 자비사상을 심어주면 그것이 곧 전체로 확산되어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 어린이포교에 정열을 쏟게 된 동기가 되었어요”
그럴 즈음 부산에 있는 스님들과 각 사찰의 어린이법회를 맡고 있는 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연합회를 구성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 후 10개 지부가 발족해 출발, 부산에서 틀이 잡히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 당시 스님은 이미 중 ·고둥학교불교연합회를 후원하고 있어 어린이연합회는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밀어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부산 대각사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이들을 보곤 그러한 마음을 바꿨다. 어린이법회를 위한 교재를 만들어 발송하기 위해 추운 마루에 앉아 언 손을 녹이며 밤늦게까지 일하는 몇몇 젊은이들을 보며 ‘나도 보탬이 되어야겠다’싶어 어린이지도자연합회 회장을 맡은 것이 어린이포교의 장을 여는 첫걸음이 되었다.
연합회가 구성되자 대부분 공무원이나 교사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스님을 도와주고 있어 비교적 수월하게 연합회를 이끌어왔다. 가끔은 바쁜 일이 있어서 일을 할 수 없다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는데 돈을 주고 하는 일이면 나무랄 수도 있지만 봉사로 하는 일이어서 잔소리나 꾸중을 할 수도 없어 스님은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벽에 부딪히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런 일 말고는 그 간 되 6년 꾸준히 같이 일해온 연합회 임원들이 있어 마음이 든든하기도 하고, 스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 연합회 운영의 전망은 밝다.
매달 연합회에서는 어린이포교 연구지인 ‘동련’과 어린이 교재인 연꽃을 1만부 발행하여 전국에 골고루 나눠주고 있다.
“어린이불교는 우리의 전통을 지켜온 불교를 어린이에게 심어 우리의 얼과 역사를 지키는 일입니다. 어린이에 대한 이러한 교육이 이뤄지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밝다고 볼 수 없어요 이는

몇몇 사람이 할 일이 아니고 많은 이들이 달려들어 해야 할 일입니다.”
10여 년 전에 스님이 머물고 있는 영주암의 어린이법회에 나왔던 어린이가 어느덧 대학생이 되어 어린이법회의 교사가 된 것을 보며 스님은 서서히 어린이포교가 무르익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런데
이렇듯 커가는 어린이 법회를 이끌어 나갈 스님네들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한 해 100명이 출가하면 10명도 채 남지 못하는 요즈음 불가의 현실을 볼 때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영주암은 부산시 남구 망미동배미산 기숨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 영주암 한켠에는 깔끔하게 꾸며놓은 영주암 유치원이 있다.
불교신도들의 자녀보다는 일반가정의 어린이들이 대부분으로 5년 전 세 학급으로 설립했다.
처음에는 학부모들의 이런저런 간섭과 토라짐이 생리에 안 맞아 힘겹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린이포교에 도움이 되고 있다.

10여년 간 어린이포교에 남다른 정성과 애정을 기울여온 스님은 신도들은 물론 젊은 납자들 사이에서 수행이 철저하기로 유명한데, 스님의 하루 일과를 들여다보면 그러한 사실이 쉽게 수긍이 간다.
새벽 4시 아침 예불을 끝내고 나면 보통 8시까지 참선과 기도정진을 한다. 아침요로 죽을 들고 잠깐 쉬었다가 저녁공양까지는 그날의 소임을 본다. 저녁공양 후 붓을 들어 불(佛)자 10자를 쓰는데 이러한 일은 13년간 행해온 스님의 취미이며 수행이다. 그간 8만 자를 썼는데 처음 1만 자를 쓸 때까지는 모두 소각해 버렸고, 그 후 3만 자는 작품으로 남겨 아는 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앞으로 10만자째의 글자는 해인사에서 조각해 장경각에 모실 생각으로 있다.
‘불’자를 쓰고 나서는 다시 세 시간쯤 기도정진을 하는 것으로 하루의 문을 닫는데, 새벽 거도정진은 바깥에 나가 있더라도 꼭 지키는 스님의 일과로 되어 있다.
40년 전 범어사로 출가해 계를 받으면서 ‘이 계를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이 길을 감당할 수 있을가’라는 의문으로 몸부림치던 시절부터 시작된 기도정진은 그 후 40여 년간 스님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상이다.
지금도 6, 7시간 소변 한번 안보고 꿋꿋이 서서 기도정진에 들 수 있는 것은 출가 후부터 계속된 치열한 수행정진 때문이리라.35년 전, 김천 수도암·에서의 기도정진을 스님은 잊지 못한다.
아침에 점심 도시락을 싸 가지고 떠난 신도들이 중간에 도시락을 먹고 저녁나절에야 도착될·수 있을 만큼 깊숙한 곳에 자리한 수도암은 기도도량으로서는 그지없이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공양주보살을 빼놓고는 스님의 독경소리와 정진하는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는데 그러한 스님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지금도 적지 않다. 수도암 아래 청암사에 왔던 이들에게 하루 12시간을 기도정진에 들어가 있던 젊은 스님의 모습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으리라. 범어사에서 총무,재무 등 삼직의 소임을 끝내고 들어갔던 수도암에서의 백일기도정진은 기도공부의 힘을 많이 얻은 것으로 스님은 기억하고 있다.
“요즘엔 공부를 많이 하고 출가한 스님네가 많은데 그것만 가지고는 안돼요 수행이 뒷받침되어지지 않은 지식이란 보잘 것이 없어요 수행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나 승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포교도 중요하지만 수행이 주가 되지 않으면 생명력이 없어 쉽게 무너지게 마련이에요 스님에게는 스님의 체취가 풍겨야지요 우린 그것을 중 냄새로 표현하는데 수행을 안 하면 무슨 체취가
나오겠습니까.”
지속적인 자기수행을 강조하는 스님은 요즈음 잠을 잘 참지 못하고 수행을 게을리하는 후학들을 은근히 나무란다.
“그래도 열심히 하는 사람도 많아요 요즈음 밖에 드러나게 요란스러운 스님네들도 있는데 그러한 사람들을 보고 실망하면 안돼요 불교는 일진, 이진, 삼진이 있어 앞에서 안되면 계속 이진 삼진이 나와 해결할 것입니다.”

출가 전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를 읽으며 ‘한 생에 이러한 길을 가는 것이 가장 좋겠다’ 싶어 원효스님과 같은 길을 걷기로 발심했던 기억 때문일까,
스님은 인쇄문화를 통한 포교가 가장 확실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스님은 우리의 불교가 부녀자 불교에서 탈피하려면 지면포교를 해야 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데, 지난해에 부산에서 창간된 대한불교신문사의 회장직을 맡아 신문사 살림을 꾸리고 있는 것 또한 이러한 생각과 무관하지않다.
“지금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졌지만 나는 지난 시절 우리가 못살 때보다 더 겁이 나요 요즘 사람들은 가치관의 정립이 잘 안되어 있고 방향도 없어요
정신이 따르지 않는 물질의 풍요는 위험합니다. 에이즈나 마약이 세상에 나돌아다닌다면 물질적으로 발전을 안한 것보다 못해요 양식 있는 포교지가 나와 현재 발전된 물질과 내면세계의 지혜가 조화를 이루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대한불교신문을 발행하면서 스님은 아내가 절에 드나드는 것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남편들이 집에 배달되는 불교신문을 보고 불교의 참뜻에 눈떠가는 것을 볼 때마다 지면포교의 중요성과 신문 발간의 성과를 생각한다.

평생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요행히 그 길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흔들림 없이 한 길을 가기란 또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출가한 그 시간부터 단 오분의 일초도 바깥 세상을 동경해본 적이 없다는 말씀과 내 생에도 다시 출가해 이 길을 걷겠다는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기자는 스님이 참으로 행복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을 마치고 나오다 툇마루에 가지런히 줄을 선 수십 그루의 난을 보며 스님이 키우신 것이냐고 물었다.
“키우긴요 저희들끼리 거기에서 그렇게 자랍니다.”
군더더기 없는 스님의 답을 들으며 기자는 문득 정결하고 단아한 모습의 난과 스님이 매우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밖에 나오니 인터뷰 내내 들려왔던 아이들 떠드는 소리는 간 데 없고 오후의 고요한 정적만이 영주암 뜰에 가득했다.

글/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