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人避暑走如狂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허겁지겁 달리지만
獨有禪師不出房 선사 홀로 있어 제자리를 지키는구나
不是禪房無熱到 덥지 않은 곳 어딘가
但能心靜卽身凉 마음이 고요하니 온몸이 서늘하다
도인(道人)의 생애야 짐작으로만 가늠할 수 있으니 황벽(黃緊)스님의 마음은 한서불도처(寒署不到處)에 자리하고 있고, 범인(凡人)의 마음들이야 더우면 식히고 추우면 데울 수 없으니 바람 파는 기기들이 열 받겠구나, 산중에 솔바람을 이고 이사하는 사람 많을 수밖에 없다. 산중하일(山中夏日)은 이백(李白)에 의해 제값을 받는다.
爛搖白羽扇 부채 부치기도 귀찮다
裸袒靑其中 어깨를 드러내고 숲속에 들어가서
脫巾掛石壁 두건은 벗어 석벽에 걸어두고
霹頂酒松風 이마에 솔바람이나 쐬자
마음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종교 또한 겹겹의 치장을 하고 있고, 영원과 지고성으로 현란하게 화장한 敎·語·行의 열기속에서 황벽의 마음과 이백의 몸이 하나되어 올 여름을 샀으면 두리번대는 눈동자들을 잠재 웠으리라. 이쯤에서 묻고 싶다. 어떤 것이 진정한 더위며 피서인가? 상황설정은 자유다.
광복(光復)은 피서며 분단(分段)은 더위다. 광복은 더위며 분단은 땀이다. 팔월의 축제에는 시원함보다는 땀과 눈물이 더 많다. 갈라진 마음들이 동강난 땅을 낳고 잘려진 땅은 보상 받을 수 없는 죽음을 낳고 그 죽음은 식힐 수 없는 분노를 낳으니, 덥다.
청량지(淸海也)는 어디인가. 부처와 마음과 중생이 차별이 없다는데, 심불중생(心佛聚生)온 겨누는 곳이 다른가. 부처와 마음은 어깨를 나란히 한다치고, 중생의 삶은 헹구어질 수 없는가. 출가인의 머리다툼은 부처와 마음과 중생을 이간질 시키는 게 아닌가. 파(派)만 보면 덥다.
움직임이 빠르면 열이 나고 열이 나면 땀이 난다. 어딜 그리 바삐 가는 자 갈 곳은 많은데 오라는 곳이 없으니 더 바쁜가? 빠를수록 바쁘다. 공간적 거리감의 해소를 위해 운송수단의 가속화가 얼마나 빨리 생명을 단축시키는 가속장치인가. 엊그제 유치원생의 죽음을 보면서 부당히 깨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만 지녔으면 바라 볼 수 없는 죽음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을 하는 생각, 나 자신의 대화 속에서 독백처럼 새겼지만.
옛날에 과거시험 보러 한양 천리길을 개나리 봇짐에 허위허위대며 걸었던 시절. 문경새재에는 과거길이라해서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사실 과거시험이라는 글자와 시간과의 싸움에서 결과하는 것은 과거시험노정에서 배움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남짓 길을 걸으며 공부했던 것을 되뇌이며 문자 뒤에 숨어 있는 뜻을 거두고 주막에서 만나는 동업(同業) 중생들과 토론하며 다른 세계를 맛보고 해서 고기를 잡고 그물을 잊어버리는 지혜를 더덤에서 얻을 수 있는게 아닌가. 잡을 수 없고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빠름은 생사대사인데, 빠름의 극(極)을 자랑하는 마음들과 기계를 보면 덥다.
이렇듯 더위를 식히고 싶다. 한 발은 백두산 천지에 한 발은 한라산 백록담에 걸치고 이마에 금강산 솔바람이나 씌자.
·입산하는 자 흔적 없이 살다 갔으면, 하산하는 자 무협(巫峽)의 물결*을 바로 보았으면.
·허공에는 몸을 숨길 곳이 없다. 드러난 나무, 꽃, 이 산하, 그 호흡에 발맞췄으면.
*무협(巫峽)의 물결 : 巫山의 雲雨之情(남녀간의 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