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러한 야만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주인공은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집권 세력인 탈레반 정권으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며, 그 최고 지도자는 물라 마호메드 오마르이다. 그가 우상숭배를 금지한 이슬람 율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불상 파괴를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탈레반 정권 측은 “1991년 힌두교도가 인도의 이슬람 바브리 사원을 파괴한 일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사원 점령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우리는 그저 돌과 바위를 부수는 것인데 왜들 소란을 떠는지 모르겠다”며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이번 탈레반 정권의 야만적인 조치는 언제라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되고 인류의 소중한 문화재가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사실 지금도 지구상의 많은 곳에서 종교간의 다툼으로 살상과 파괴 그리고 약탈 등 폭력적인 행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정도와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나라 역시 단군상 및 불상 파괴?종교시설 방화가 잇달았다. 이런 와중에 필자는 새삼 불교의 관대함과 자비함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사를 보았다. 그것은 충남 연기군 대덕사의 한 수행스님이 만성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기독교 신자에게 신장을 기증키로 했다는 것이다. 그 스님은 수혜자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소중한 생명을 구하는 데 종교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담담히 말했다고 한다.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수행자의 자비에 그리스도교인의 한 사람으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었다.
작년 9월 20일 원불교 주최로 열린 국제 학술 대회에서 한스 퀸 신부는 ‘종교간의 평화 없이는 문명간의 평화는 없게 될 것이다’고 역설하였다. 21세기 현대 사회는 고도의 지식 정보 사회로 시간적 공간적 격차를 뛰어넘어 다양한 신념 체계들이 공존하는 다원화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교통, 통신 그리고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정보 수단의 발달로 지역과 민족 간의 교류가 촉진됨으로써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 가족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신념 체계만을 주장하면서 타종교의 ‘다름’을 부정하고 타파하려 한다는 것은 세계 평화를 근원적으로 파괴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하나의 절대적 신념 체계이기에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이 신념은 자칫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으로 연결되기 쉽다. 특별히 유일신교의 신자들에게 이러한 종교적 신념 체계가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쉬워 타종교의 상징물은 우상으로 간주되며 나의 신념 체계와 다른 사람들은 저주받은 자, 적, 혹은 사탄이 된다. 그리고 적 혹은 사탄에 대한 공격은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충성행위, 선택받은 자의 소명 혹은 성스러운 과업으로 여겨지기에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엄청나게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잘 모르면서 과격한 행동도 불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종교에 있어서 제거되어야 할 적이나 타파되어야할 우상은 타종교나 타종교의 상징물이 아니라, 인간을 고통 속에 빠지게 하는 여러 가지 사회악과 인간성을 유린하는 각종 관념이나 그릇된 가치관 즉 환경파괴, 공해, 정보 및 재화의 빈부격차, 남녀차별, 사회적 불평등, 부정부패, 살인, 강도, 생명경시 풍조, 물신숭배, 권력숭배 그리고 성의 상품화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종교간에 협력해서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작년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의 주최로 ‘다름이 아름답다’라는 주제 아래 불교, 원불교, 가톨릭, 개신교, 유교 그리고 천도교 등 6개 종단의 청년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종교간의 이해와 화합을 모색하는 종교 청년 평화 캠프가 열렸다. 타인의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다름’은 추한 것이기에 비난받고 시정되어야 하지만 타인의 기본적인 권리를 훼손하지 않는 한 그 ‘다름’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요즘에는 여러 종단들이 연합하여 사형폐지 운동, 분단 극복을 위한 종교간 손잡기 운동 그리고 새만금 살리기 운동 등을 벌리고 있다니 무척 고무적이다. 종교인들이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지 않고서는 여러 가지 사회악 제거는 물론 우리 민족의 숙원인 지역감정 해소 그리고 남북화해를 이룰 수 없기에 종교간의 만남과 대화 그리고 협력은 더 절실하다. 우리 나라의 일반 국민이 바라는 것도 종교간의 갈등이나 싸움이 아니라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이다. 이 점은 한 방송사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종교계에 바라는 사항’을 묻는 질문에 가장 많은 응답자가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버릴 것’을 주문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일반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닫힌 종교의 닫힌 마음이 아니라 열린 종교의 열린 마음이다.
우리 대학은 가톨릭 사상을 건학이념으로 하는 가톨릭 대학이지만 종교학과의 별칭은 ‘열린 종교학과’이다. 현실적인 문제로 실제로 열려 있는지는 잘 몰라도 가고자 하는 길은 그러하다. 필자가 하던 불교 강의를 작년에는 스님에게 부탁했다. 강의를 부탁한 사람이나 강의를 하신 스님 모두 자신이 속해 있는 종교는 다르지만 그 두 종교가 더욱 가까워지기를 소망한다는 점에서는 한마음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 스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 이질감보다는 왠지 푸근함과 친근감을 더 느꼈다. 서로의 마음이 열려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학과 학생들 중에는 가톨릭 신자도 있지만 개신교 신자와 불교 신자도 있다. 학생들의 타종교에 관한 태도를 관심있게 살펴보면 저학년일수록 개신교 신자 학생이 가장 엄격하며, 불교 신자 학생이 가장 열려 있으며, 가톨릭 신자 학생은 그 중간쯤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고학년이 되면서 점점 평준화되며 개방적으로 변한다.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열린 종교의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때 타종교와 타종교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 역시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더욱더 풍요로워진다. 하지만, 닫힌 종교의 닫힌 마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면 그 상대가 적이나 경쟁자로 보이기 마련이고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더 모르게 되며 자신의 정체성 역시 더 왜소해지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