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학년에 재학중인 어떤 여대생이 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찾아왔다. 이 학생은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하였는데 다른 하숙생들과 친하게 지낼 수 없었고 같은 학과 친구들과도 교제하기 힘들었다. 사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자기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친구 만나는 것을 피했다. 공부는 열심히 하여 일학년 때 성적은 우수했다. 2학년에 올라와서는 점차 외톨이라는 느낌이 들면서 학교가기가 두려웠다. 결석이 잦았고 친구들 만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학과 남학생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갖고 자기행동을 지켜보고 있다고 느꼈다. 하숙집에 돌아오면 어떤 남학생이 대문 밖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남자가 자기를 납치해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바깥 외출이 두려웠다. 그래서 집에 틀어박혀 있게 되었다.
이 학생의 주된 증상은 어떤 남자가 자기를 납치해 갈 것 같은 두려움으로 외출할 수 없음이다. 그런 증상이 있기 전에는 학과 남학생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갖고 자기행동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부담감이었다. 이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는 사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자기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일련의 증상이 발전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처음에는 어렵기는 하였지만 어느 정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점차 그 관계는 망상적인 관계로 발전하여 현실적인 관계가 끊어져 버렸다. 관계를 맺고 싶은 이 학생의 간절한 소망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자기와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는 망상으로 발전했다. 현실적 관계가 망상적 관계로 바뀐 것이다. 인간은 관계로서 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관계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이 학생이 정상적인 관계를 할 수 없었던 원인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의 관계가 잘못된 데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학생은 어머니의 과보호 속에 어머니의 뜻대로 지배당하면서 어머니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
인간의 발달과정은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의존관계에서 독립적 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독립적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 특히 어머니와의 건전한 의존관계가 중요하다. 이를테면, 태어나서 한 달쯤 되면 아기는 어머니로 향한다. 그의 눈으로 어머니를 따르고, 어머니의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어머니의 목소리와 더불어 율동적으로 움직인다. 이 때 어머니는 애정어린 마음으로 반응함으로써 아기는 어머니에게 애착愛着하게 된다. 성장과 더불어 어머니와의 애착관계가 강화되면서 정서적 안정감과 신뢰감이 생겨난다. 정서적 안정감과 신뢰감을 바탕으로 점차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분리된 개체로서 대인관계가 발전되어 간다. 그러나 부모가 문제가 있어서 자식을 과보호하거나 거절할 때 자식은 독립된 개체로 성장하기 어렵게 된다.
부모자식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듯이 좋은 관계는 삶에 생기를 주지만 나쁜 관계는 괴로움을 준다. 다만 어린 시절의 부모자식관계는 훗날 인간관계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문제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분 나쁜 감정을 마음대로 없앨 수도 없고, 쓸데없는 생각을 마음대로 지울 수도 없다. 또한 자신의 문제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한다. 그 문제는 자신의 약점이고 아픈 곳이기 때문이다. 약점과 아픈 곳이 찔리면 움츠러들거나 반발한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는 감추어 둘 것이 아니라 드러내어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자신을 항상 괴롭힌다. 자신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남도 괴롭힌다. 깨닫지 못한 문제는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덮어 씌워져 남의 문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내 탓이 네 탓으로 된다. 그리하여 상대방은 자기 문제의 희생물이 된다. 개인간의 갈등, 지역간의 갈등, 국가간의 갈등은 상당부분 이런 투사投射의 결과로 일어난다. 지역간에는 그 지역인의 공통적인 문제가, 국가간에는 그 국민의 공통된 콤플렉스가 서로에게 투사됨으로써 갈등이 일어난다.
더욱 나쁜 경우는 소위 강자와 약자간의 관계에서 강자가 자신의 문제를 약자에게 투사하는 경우다. 이 때 약자는 힘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부당한 희생자가 되고 만다. 그런 경우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부부관계, 직장상사와 부하직원간의 관계 등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가정을 비롯한 모든 집단에서 영향력을 가진 자들은 무엇보다도 정신이 건강해야 한다. 문제가 없으면 가장 이상적이겠으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적어도 자신의 문제를 항상 성찰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집단은 병들기 쉽다.
인간의 발달과정을 크게 인생의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수 있겠다. 인생의 전반기의 발달과제는 외부세계에의 적응에 있고 인생의 후반기의 발달과제는 자신의 내면세계에의 적응에 있다. 인생의 전반기는 친구도 잘 사귀고 공부도 잘 하고, 결혼도 하고 돈도 벌어야 한다. 외부세계와 적극적으로 관계함으로써 사회적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정신적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그런 적응과정에서 때로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억눌러야 하며 사회적 평가에 맞추어 살려고 하다보면 본래의 자기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기는 인생의 전반기와는 달리 일차적으로 자기자신과 관계를 맺어 내면세계에 잘 적응함으로써 인격성숙을 이루어야 한다. 인생의 전반기에 억눌려 발생했던 문제들을 자각하고 사회적 평가에 맞추어 살려는데서 벗어나야 한다. 외적 욕망慾望의 충족으로부터 내적 의미意味의 충족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공허감을 느끼고 노이로제 증상이 발생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생의 후반기에서는 본래의 자기자신을 실현해야 한다. 자기실현을 통한 외부세계와의 관계는 아무 걸림이 없는 무애無碍의 관계, 무위無爲의 관계가 된다.
그런 무애와 무위의 관계가 진정한 의미의 관계이고, 그런 관계속에 진정한 의미의 정신건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