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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 신해(新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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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91년 08월 114호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 중에 일체 있고 일체 중에 하나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법성게는 하나의 다라니라고 불리기도 한다. 왜냐면 삼십구(句) 이백열 자의 시문을 하나의 도인(圖印)에 ‘법(法)’과 ‘불(佛)’로써 처음과 끝을 삼고 한 선을 따라 오십네 개로 꾸부려서 전체가 하나의 사각을 구성하였다. 이 사각은 사제며 사섭법 사무량심 등 수많은 뜻을 가져서 다라니가 가지는 여러 가지 뜻을 함께 가지게 하였다. 이러한 구성 가운데 굴절된 오십네 개는 선재동자가 오십삼 선지식을 참방한 뜻을 가지고 있다. 처음의 문수가 마지막에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의상(義補)의 약소(略統)에는 이 두 구절을 약다라니(約多衛泥)라고 표현하고 있다.
법성게가 하나의 다라니이지만 특히 이 “하나 중에 일체 있고 일체 중에 하나 있다“라고 한 것은 단적으로 말하여 불교의 모든 것은 하나인 일불승(一佛乘)에 돌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我)는 모든 인과 연이 이룩하는 법(法)이다.”
이 말은 의상의 제자 표훈(表訓)이 한 말이다. 〔「五觀」. 「한국불교연구」(정신문화원), 이기영, p460.신라불교의 성격과 현대적 의의〕한 사람의 개인이 결코 하나로 머물 수는 없는 것이 법이다. 그 이유인즉 모든 인연이 나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연(諸緣) 뜻 인연도 또한 나로써 연이 되는 것이다.
이 세계는 한 개인이 축이 되기도 하지만 그 축만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은 언제나 다양하다. 그러므로 이 하나는 숫자의 시작에 불과한 하잘것없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있게 하는 힘. 구심점이 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의 집단이 활성화될 수 있는 협동체(協同體)이기도 하며 실제적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실제적 연관성은 실존하는 거대한 집단의 일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즈음도 노사간의 문제가 첨예화되어 휴폐업을 선언한 회사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법성게에서는 짧은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포함한다는 것 자체가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가장 짧은 시간에 그 모든 내용을 꿰뚫어보는 지혜도 바로 이 하나에서 시작하여 포든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불교적 인간상에는 반야(般若)의 이상에 즉(郞)해서 너그러운 정신을 가지고 생활하는 태도가 나타나 있다. ‘하나 중에 일체 있고 일체 중에 하나 있어’ 라고 하는 것이다.
인연에 의해서 나를 이루지만 나에는 체(體)가 없고 또 나로서 연을 이루나 연(緣)에는 성(性)이 없다고 풀기도 한다.
우리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양극의 축이 되는 남북의 대치를 이루고 있는 한반도의 나라에 살고 있다.
두 개가 하나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큰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에 크다는 뜻으로는 ‘한’이라고 한다. 대해(大海)를 한 바다, 대전(大田)을 한밭이라고 불렀던 ‘한’은 하나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하나가 크다는 뜻까지 가지재 된 것은 우리말이 불교에서 많은 뜻을 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다에는 많은 강물이 들어간다. 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언제나 짠맛의 하나를 유지한다. 싱거워지지 않는다. 또 바다는 깊다. 산이 높다 해도 깊은 바다보다 높이 가 더 얄다고 한다.
바다는 넓다. 태평양 대서양 둥 바다가 차지하는 면적이 육지보다 더 많은 것이 지구의 현실이다. 바다는 많은 종류의 중생이 함께 살고 있다. 서로 서로 의지처가 되면서 중생들은 살아가는 것이다. 또 바다는 무진장의 보배를 간직하고 았다. 진주며 생선이며 심지어는 가스며 석유까지 많은 보물을 갈무리한 보고(寶庫)이다.
이러한 바다를 한바다라고 한다. ‘한’은 ‘하나’의 줄임말아다.
이 하나에 다양함을 갖추었다는 뭇은 불교의 자비가 이 속에서 나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 석굴암의 관세음보살은 십일면의 형상이다. 자비의 상호며, 성내는 듯한 상호며, 정법을 수행하는 상이며, 중생을 제도하는 상 둥 다양함을 십일면에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한 보살이 다양함을 갖추었지만 언제나 우리는 관세음을 생각하고 잊지 않으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관세음을 부른다.

법성게가 다라니라는 말은 이 하나에 모든 것을 꿰어 있지만 그렇다고 많은 것의 의미를 상쇄시키지도 않으면서 그것들의 공능을 살려내는 데 큰 뜻을 둔다.
바다가 크고 넓고 다양하고 깊은 의미를 가지듯 이이 하나는 둘이며 셋이며 열, 백, 천 등의 뜻을 가진다.
관세음보살의 자상(慧像)이 ‘문(文)’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분노의 비상(悲像)은 ‘무(武)’를 나타내어 위엄을 드러낸 것이라 한다. 자상의 사랑스러움을 우리는 자세함이라는 뜻으로 혼용해서 쓰기도 한다. 그래서 어른이 자식을 보살핌이 지극하면 ‘자상함’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사랑스러워 함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깊이 생각하고 염려하고 보호하고 살펴줌이다.
그러나 비원을 가지는 위엄은 자식을 사랑으로만 감싸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픈 매를 들고 종아리를 때리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자식은 부모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것이다. 사량만이 아니라 지혜로움을 주는 위염이 있어야 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식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받들며 두려워하고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慧)와 비(悲)를 생각해 본다면 관세음의 십일면으로 다양함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에서 발생한 ‘한’은 때로 ‘한(恨)’을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한탄을 의미하는 한은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 때문이다. 깊은 이치를 따져보면 자신의 바람은 거의가 객관적이거나 공감이 갈 수 있는 의미의 대중적이고 일체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면이 많다.
바다가 아무리 많은 다양함과 보배를 갈무리하고 있다고 해도 능력이 있는 이가 캐내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때로는 바람에 성난 파도를 일으키기도 하고 짙은 안개로 시야를 가리기도 하지만 바다는 언제나 자기의 것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불교의 뜻은 자신을 위하는 삶이 타인을 위하는 삶보다 우선인 것 같은 생각을 바꾸는 데 뜻을 둔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남과 함께 사는 공존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일체를 활용한다고 법성게에서는 강조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차량은 크거나 작거나 간얘 그 구조가 여러 가지가 모여서 차를 만든다. 핸들이며 엔진이며 바퀴 ·의자 둥 그러나 그 하나하나의 부분을 떼어내 버리면 차는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의 차는 여러 부분과 부품을 활용하여 차의 구실을 한다. 그런데 이런 함용 속에는 각 부품이 가지는 기능이 다르다. 그것들이 모여서 총체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치는 실어 나르는 것이 그 기능이다. 그 기능에 바퀴만 구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요, 짐을 싣는 부분도 필요하다. 바퀴를 움직이게 하는 축이 있어야 하고 그 축을 돌리는 엔진도 필요하다. 이러한 여러 면이 모여서 총체적으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가지 생활 태도들이 모여서 총체적인 삶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총체적인 일생을 생각하기보다 오늘이나 이 시간에 급급하거나, 대한민국 나아가서는 세계를 생각하기보다는 현재의 이 장소만을 국집하는 경우 때문에 훨씬 삶이 더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다.
멀리 보고 멀리 뛰기 위해서 노력등은 삶을 총체적 삶이라고 한다면 짧게 보고 국집 된 삶을 개인적인 삶이라 활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만이 독립된 삶을 영위
하거나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서 독립하고 자유스러워해야 하는 것이다.
두루하지 못하고 잘못된 도그마에 노예가 되고 원칙이 없는 방종(放從)을 하나로 묵고 그 하나하나가 집단 구성원으로서 자유스럽고 독립될 때 일심(一心)으로의 돌아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갖는 연기적 성격을 스스로 생각하고 우리 존재가 갖는 근원적인 일심이 의식주(衣食住)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총체적인 인간관과 세계관을 가지기를 요구하는 부분이 바로 법성게의 이 부분이다.
다라니란 총체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문장을 말한다. 때로는 ‘옴’이란 한마디가 모든 옴의 처음과 중간파 끝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초성 ·중성 ·종성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 중에 일체 있고 일체 중에 하나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다”고 해서 중복된 듯 하지만 총체적 삶이 세계관을 뿌리로 하고, 이 세계 관을 중심으로 개체의 삶이 연기적 조화 속에서 독립 되고 자유스럽다는 뜻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