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다. 탄생의 양수(羊水)를 흠뻑 뒤집어 쓴 신록의 진초록들은 저마다 뻗장지르는 목숨의 탐(貪)을 누린다. 그 진초록들 중에서 침녕쿨도 목숨의 줄기를 뻗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목숨 잔치들의 시끌 벅적한 아수라 속에서 유독 칡녕쿨의 뜻이 가없다.
오늘이 몇 얼인가 음력으로 유월 십일. 양력으로 따지면 칠월 스무 한날-저 뻗장지르는 칡녕쿨도 음력 칠월 스무날이면 목숨을 멈추리. 그러니까 양력 팔월 이십구일 되면 무서리칠 가을 앞에서 칡녕쿨의 목숨잔치는 맺게 돼 있다.
‘뻗는 칡녕쿨도 음력 칠월 스무날이면 제가 스스로 알아 삶을 멈춘다’하는 속담이 있어 왔다. 이곳 김포땅으로 흘러 든 연후 단 한 번도 어김없이 봐 온 진리이다. 과연 칡녕쿨은 음력 칠월 스무날부터 시름시름 앓는다. 목숨의 흡뜬 눈을 감고 목숨의 뻗장지르는 ‘탐’ 대신, 뿌리에다 자은의 피를 쌓으며 차악 땅 바닥에 엎드려 제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우리들 수난의 역사 속에서 ‘목숨’을 이어주고 ‘목숨’을 지탱케 한 ‘밥칡’과 ‘개칡’이 음식이 됐었다.
내가 왜 김포땅 삭연한 광막풍을 자청하여 이곳으로 흘러 들었었던가 생각하면 뿌리에서부터 서럽다.
덧거칠은 세상의 ‘탑’이 너무도 무서워서이다. 억만 중생들의 피가 어우르기로 이렇듯 더러운 난장은 처음살아 왔음이라. 삶의 시원에서부터 팍팍하고 모질어서 더는 내 목숨이 달리 지탱할 능력이 없더라.
중생들의 빛나는 삶을 한 번만 생각해보자. ‘선’ ‘악’이 함께 어우르되 삶의 참보람만 있어주면 복에 겨웁다. 그래서 꺼이 꺼이 목놓아 울면서도 새벽을 점 찍어 놓고, 그래서 다른 ‘손’에 죽으면서도 ‘내 손’의 편안한 ‘밤’올 잠잘 수 있었구나. 이 얼마나 지혜로운 형광의 적선인가
정치가 설령 서툴고 투박스럽다 치자. 그러나 ‘정치’를 전공한 사람들이 국민의 애국적 질타와 격려를 귀담아 듣는 그런 정치, 어차피 ‘악’과‘선’ ‘정의’와 ‘불의’가 반반으로 맞서되 인간존엄의 해바름이 인명경시의 그릇됨을 이기는 사회, 그리고 넉넉함과 쪼들림이 어쩔 수 없이 함께 잇되 “네 죽어야 내가 산다!” 하는 식의 삭막스러운 국민적 위화감이 없는 윤리 근간(根幹)의 삶-이런 평범한 세상속에서라면 깜작 놀랄 일들쯤은 되려 생존현장의 ‘본질적 중상’에 가깝다.
시쳇말로 티격태격 선의의 충돌이 있어야 사람 사는 세상이요 민주적 삶 아니겠더냐. 그러니까 지극히 ‘평범한 사회’ 속의 중생들 삶을 전제한다면 가끔씩 깜짝 놀랄 ‘일’에 부대 끼는 것쯤, 존엄에 대한 포기라기보다 존엄한 중생들의 실체를 재확인하는 ‘통념적 자위’에 가깝다.
그런데 한번 생각들 해 보거라. 가치 추구의 평범한 소망은 커녕 평범한 세상의 ‘본질적 증상’과 철저히 단절된 채 이러구러 삼십 년 세월을 넘겨 살아왔었구나. ‘군사정권’ 하는 따위의 네 글자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자 거진 선(輝)의 질팍한 노고도 감당해 봤다. 마음의 뿌리인즉, 그 네 글자에 대한 혈분의 원오라기 보다, 오죽 못난 중생이면 삶의 ‘평범성’ 한가지 허락지 않는 시역의 맵디매운 세월을 자그마치 삼십년 넘게 버르적거렸단 말인가 하는 수모와 모멸로부터 벗어나는 참깨달음의 ‘앓’을 거둬들이기 위함이었다.
김포땅은 시방 온통 진초록이요 한강물 엄진수 합궁(合宮)하는 염하강 녹색 물 위에 북녘땅 쇠기러기떼 핏줄 앞서 미리 난다. 어김없이 여름은 가을로 가고, 그 가을은 또 동부새(북풍) 기세재는 겨울을 낳음인 그 순리 속으로 지금도 칡녕쿨이 뻗더라.
세상이 이쯤 종말론적 혼돈 사회일 수 있는가.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언변을 술 수울 줄통뽑는데, ‘동의대 사건’에 즈음하여 “------그러므로 경찰이 신무기로 무장해야 되겠다 아 이런 말입니다!” 하더라. 삼계육도에서 환생해야 마땅할 ‘의문사 젊음’이 그 얼마이더냐. 이런 주검들도 구천을 떠돌며 ‘사십구제’ 하나 못 치르고 있음인즉, 다섯 사람 백골단 해골들 앞에서 이씨 조선적 근엄한 임금님이 이쯤 덜 된 앞 사설 읊었더라. 세상이 상감의 뜻을 쫓음이라. 별의별 해괴한 세태들이 선한 백성들의 삶 속에 껴든다.
그 중에서도 너무 가슴이 져려 와서 ‘이건 안 된다’하는 설데친 법어(法語)를 낳는 일 하나만 들어보자.
‘시국선언’ 스승들이 뭇매를 맞고 죽어간다. ‘육성회’ ‘새마을 어머니회’ ‘체육진흥회’하는 극우세력의 목숨들이 물타작 매질이라.
강경대가 쇠파이프에 맞아죽고, 박종철이 물먹인 쇠꼴로 죽고, 이한열은 이에 앞서 두개골에다 최루탄 파편 안고 죽고, 김검귀정은 곰 잡는 연기에다 화구총 쏴대며 닥달질로 달겨드는 산적무리 발굽에 짓밟혀 세상을 떴구나.
그렇다면 스승들의 목소리는 자명해야 옳다. “이 무섭고 두려운 세상아 제발 순리대로 가거라” 하는 단충(丹忠)의 목소리로 해바른 세상을 바랬음이라.
그런데 이 무슨 중생의 탐이냐. 충남 태안군 ‘서남중학교’에서 물타작질이 일더니, 사흘 뒤엔 ‘경기도 수원 매탄국민학교’에서 배움을 소망하며 등교하는 어린싹들의 공부를 가차없이 자르고 이 기세는 경상도 밀양 땅에까지 번져 들어 ‘홍제중학교’의 아픔을 드디어 세웠어라.
나라의 체면이나 위신이 이쯤 헐거울 수 있는게 이 스승들의 뜻을 모조리 타래묶음 하는데, “현직교사가 정권을 비방함으로써 스승의 품위를 스스로 떨어뜨렸노라!”하며 먹고 살기력마저 빼앗는 중징계를 서두르고있다.
어찌해야 할꼬, 민간질고(民間疾苦) 의 난세, 그리고 세강말속(世降末洛)의 참담한 사회여건 속에서도 올바름의 전민족적 뿌리를 위해 강권독재의 사악한 무리들과 싸우는 핏빛 신선도 (新鷹度)가 있고, 지식의 소유를 일방적 전달의 수단으로 남용하는 체제걸인(體制乞人)들의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민족개명의 세계적 실용을 부르짖으며 혈분하는 덕양(德養)의 지식들이 또 있음이라.
이 상관의 중생법도가 어찌 한 곳으로만 우루루퉁탕 몰려, ‘내 뜻이 보리수를 있게 했음’이요 ‘내 깨달음만이 바리성 유마거사의 문수보살화문화답’의 진경에 이름이라 하겠더냐.
큰일 날 소지로고, 내 중생의 희부엿한 눈길 앞에서 저 칡녕쿨이 땅을 기어대고 있음이라. 칠월 스무날 되면 저 침칡쿨이 왜 죽는가;
탐(貪)에 죄의 근원이 있구나. ‘삶’의 용골찬 희열보다 더 먼저 깨달아야 할 ‘죽음’의 열반이 있더라.
이제 그만 멈춤이 너의 신실한 ‘ 삶’이요, 이채 그만한 멈춤이 네 자랑스러운 ‘죽음’이라.
항오출신(析伍出身)한 독재의 정치여, 이제 그만 ‘탐’을 버려라.
저 칡녕쿨의 칠월 스무날 앞에 겸허하게 엎드린 여름 볕을 보아라. 하늘은 스승이요, 땅이 스승의 가르침을 쫓아 이 김포땅의 산하금대를 띠둘렀음인즉, 중생들의 빛나는 바람과 그 소망의 삼계육도에 자비를 베풀지 않고, 어찌 한갓 ‘빛’이라 자위하며 어찌 한갓 ‘보람’이라 결가부좌 틀겠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도다. 너 목숨이거든 칡녕쿨의 칠월 스무날 죽음을 미리 깨달아라. 너의 섣부른 뜻 앞에 후생영락의 안위가 있고, 너의 개좆만도 못한 생각 앞에 이미 목숨의 피마저 미리 행궈 버린 칡녕쿨의 선(善)이 있다.
깨달았느냐. 놔둬라! 저 미친 탑이 스스로 목숨을 정화하게끔. 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