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딱- 딱- ……
때로는 열 대, 때로는 수십 대까지 내 어깨 위로 떨어졌던 장군죽비. 참 많이도 맞았다, 그 행자시절. 내가 행자생활을 시작하기 전 삼개월 전까지 해인사 행자방에는 죽비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행자들끼리 자체 내에서 죽비사용을 자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것인데, 나로 인해 잠자던 죽비가 부활한 것이다.
왜 그랬는가. 나로선 태어나 최고로 하심했던, 세속에서 익힌 아만을 내려 놓고 상행자들에게 고분고분한다고 했으나, 선배들의 눈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분명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군림하는 것에만 익숙했던, 그리고 거칠고 반항적이던 세속에서의 습이 어찌 단숨에 없어졌을 것인가. 한 대,두 대…… 다섯 대, 그러나 매가 거듭될수록 마음은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이었다. 저 세간에 던지고 들어왔던, 말과 행동과 생각으로 빚어졌던 나의 모든 죄업이 이 매로 인해 녹을 수만 있다면 내 기꺼이 죽비를 맞으리라, 그렇게 생각을 했다.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나는 출가의 길을 걸으리라 생각하고 있었고,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않았던 ‘제도’라는 것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든 스승이든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못했고 남의 밑이나 제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꿈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최고로 군림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런 것들이 공허해지기 시작했고,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누리는 것들이 다른 사람과 함께 누리는 행복이 아님도 알아차렸다. 그리고 진정 최고가 된다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내가 소유하고 있던 것에선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것들을 감지한 순간 가차없이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부처가 된다는 것 - 모든 욕망을 버리고 상대적인 것이 아닌, 자신 안에서 절대적인 최고를 꿈꿀 수 있는 출가의 길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런 선택을 한 그때의 내가 자랑스럽다. 그대로 갔었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그 욕망의 끝에서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그래서 나의 출가는 누구보다도 더 극적이고 값진 것이었다.
물론 아무도 내 출가의 길이 오래 가리라 생각지 않았다. 해인사로 들어가기 직전 대구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만난 낯선 사람도 내 얼굴을 들여다보곤 ‘당신은 해인사 가서 백 일도 못 있어, 그러니 가지마’ 했고, 행자 때 가야산을 오르다 만난 어떤 이는 ‘행자님은 스님 못 하니까 그냥 내려가’라고 했다. 그래서 해인사 행자방에 입방한 지 백 일째 되는 날엔 괘종시계가 자정을 넘기자 ‘나는 한다’ 하고 스스로를 대견해 하기까지 했다.
하여간 넉 달을 하루도 거름 없이 장군죽비 세례를 받은 적도 있을 만큼 맞고 또 맞은 행자시절이었다. 해인사 행자는 잠시 자리를 비울 땐 상행자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소,대변을 보러갈 땐 ‘소사간, 대사간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보고를 해야 했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되었다. 소사간, 대사간을 소변, 대변으로 말하곤 했다. 그래서 또 죽비가 날아왔다. 똑같이 ‘네’ 하고 대답해도 나만 대중공사에 부쳐졌던 걸 보면 내게 남아 있던 그 오만과 거친 습이 얼마나 뿌리깊었는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하행자에서 상행자로 승진(?)을 했어도 하행자에게 장군죽비를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상행자가 되어서도 행자반장들로 구성된 조실행자들에게 야단맞았고, 느긋하게 보낼 수 있는 시기인 수계받기 직전까지도 삼천배로 벌을 받았던 걸 보면, 내 행자시절은 장군죽비 그리고 벌과 함께 했던 나날이었던 것 같다.
원주스님 시자 소임을 볼 때였다.
신도 한 분이 선원스님들에게 올리라고 꿀 쉰 병을 가져왔다. 나는 그 꿀을 받아들고 즉각 판단했다. ‘평등공양’이 되어야 한다고. 그래서 원주스님께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선원에 서른 병, 강원에 열다섯 병, 그리고 나머지는 행자실에 남겼다. 우리 행자들도 같이 먹어야 평등공양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확히 한 주 뒤 그 일이 들통이 났다. 지금 백양사 고불선원장으로 계신 일수 스님께서 원주로 계실 때였는데, 그 분이 선원 대중공사에 불려가 ‘시자를 잘못 가르쳐 죄송합니다’라고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모든 답을 내 스스로 내는 이기적인 아만이 남아 있었던, 그래서 행자 신분을 망각하고 혼쭐이 났던 대표적인 일이다.
그래도 난 그 시절이 참 좋았다. 출가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 흐뭇했고, 홍류동 계곡의 늠름한 소나무들이, 그리고 해인사 도량이 그렇게도 좋았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예불을 사랑했다. 조석예불시간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을 읽을 때면 언제나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는데,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그른 일에 물 안 들고 맑은 행실 닦고 닦아…’,하는 부분에선 그만 가슴이 탁 막히기도 했다. ‘티없이 맑은 아이로서 입문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회한 뒤엔 언제나 저 세간에 던지고 왔던 내 업장이 참회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정으로 큰 힘은 동動에서가 아닌 정靜에서 나온다는 깨달음을 얻었던 행자시절이었다. 그랬기에 그 시절은 내 인생 최대의 밑거름이 되었던 값진 나날들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출가한 1980년대 중반 당시엔 한 해에 해인사 행자실에 입방하는 이들이 무려 사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 중 나중에 사미계를 받는 이는 스무 명 내외, 내가 여덟 달 만에 계를 받을 때는 열여덟 명만이 남았다. 내 행자 도반 중엔 이미 참선에 대한 책을 낸 사람, 지리산에서 십 년간 무술을 익힌 사람, 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를 받은 사람, 호텔을 몇 개씩 거느린 준재벌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사람이 와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남아 출가의 길을 가는 사람은 발심 출가한 도반들이다. 제 길을 착실히 가며 산문을 지키는 사람들은 바로 그들인 것이다.
나는 삼천배를 마치고 머리를 깎을 때도, 경전을 읽을 때도, 수계를 받을 때도 특별한 느낌이 없었다. 아마도 다생겁래로 이 길을 걸어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백련사 도량이나 동백 숲을 거닐 때도 나는 생각하곤 한다. 아마 얼마 오래지 않은 어느 생에 이 도량을, 이 아름다운 숲을 거닐었을 거라고. 그리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곤 한다. 이십대 중반 그 욕망의 끝에서 극적으로 돌아서 맞이했던 나의 출가가 얼마나 빛나는 선택이었는가 하고 말이다.
이제 남은 일은 승보僧寶로 출발하였으나 불보佛寶에 도달하려는 목표지점을 잊지 않는 일이다. 계정혜를 나침반으로 하여 끝없이 항해한다면, 내 내면에서 최고를 이루리라 꿈꾸었던 저 행자시절의 그 ‘부처 이루기’ 서원에 다다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