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주검을 보았습니다.
새….
내 사는 마을 저쪽에 작은 놀이터 하나 있지요. 오늘 그 곳까지 산보 갔다가 새 한 마리 보았습니다. 놀이터 벤치 밑에 마른 나뭇잎 한 장처럼 가붓하게 몸을 부린 새.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의 틈새로 홀로 날아간, 이제야말로 날기 시작한 죽은 새의 중량감 없는 무게가 나를 주저앉게 하였습니다.
가볍구나. 이토록 가볍구나. 죽은 새의 몸에는 찔레꽃 향기랄지 마른 옥수숫잎 냄새랄지 찡하고 여린 것들의 냄새가 소복하게 배어 있었습니다. 밤 사이 내렸을 이슬이 다 말라 있었지만 아무도 새의 주검을 보지 못한듯 하였습니다. 나는 놀이터 안쪽 어린 버드나무 아래에 착하게 잠든 새를 묻어주고 돌아왔습니다.
어린 날 툇마루에 날아든 새의 깃털 하나를 뜰에 심은 적이 있었지요. 그 때 나는 무엇을 소망했었을까. 어느 아픈 새의 꽁지깃이었을 법한 내가 심었던 그 흰 깃털이 자라나 희고 눈부신 은사시나무가 되었을지도. 낮달이 자주 걸려 있던 미루나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 때 그 흰 깃털을 심은 인연이 저 작은 새를 만나게 하여 당신께 편지를 쓰도록 하였는지도 모르지요.
새의 삶과 새의 육신에 잠시 머문 저 여행자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지금의 삶이라는 바르도를 건너 죽음의 바르도를 지나 다르마타라는 빛의 바르도에 지금쯤 닿았을까요. 삶 이후의 삶. 이미 무엇으론가 새로운 생성의 태반에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부디 몸을 벗고 이 불가피한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만, 나는 나를 가여워하기에도 참으로 벅찬 한 인간일 뿐이군요.
숲도 내도 없는 변두리 아파트 놀이터에서 고적하게 죽음을 맞은 저 새의 마지막 숨결을 지켜보아 줄 수 있었더라면. 붓다는 숨결을 마음을 실어나르는 수레라고 했다지요. 마지막 숨결을 지켜 그의 마음이 스스로 보호될 수 있도록 아름다운 만트라를 암송해 줄 수 있었더라면.
바람이 불어 나뭇잎들이 차랑차랑 흔들립니다. 아, 저 바람의 만트라. 그렇군요. 저 바람은 지난 밤을 놀이터에서 뜬눈으로 지새웠을지도 모르구요. 어쩌면 작은 새의 마지막 숨결은 평화로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과 나의 주검을 보았습니다.
어머니….
오랜 지병을 앓던 엄마가 마른 삭정이처럼 가볍게 부러진 날이 있었습니다. 그 삭정이 아직은 제 몸에서 습기를 다 거두지 못했던 때문인지, ‘조금더 가벼워져야 하느니라’ 하는 말씀이 있었던 때문인지, 다시 기력을 회복하셨지요. 엄마에게 너무나 빚이 많은 나는 감사하고 감사하였지만, 엄마가 머물렀던 병동에서 나는 숱한 주검을 만나야 했습니다.
대부분 노환의 병색이 짙은 이들이 머물던 병실. 죽음을 기다리고 있거나 기다림의 공포에 질려 스스로 탈진한 이들이 보이는 생에 대한 집요한 집착과 갈증. 안쓰럽고 징글맞아 복도로 나오면 창 아래 펼쳐진 영안실 풍경에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곤 했습니다.
병실이 답답해진 엄마가 산보를 원할 때에도 행여 영안실 풍경을 보게 될까봐 휠체어를 밀고 허둥지둥하곤 했지요. 죽음에 가까이 있는 이에게 들켜서는 안되는 무슨 금기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엄마는 나보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주말이었지요. 같은 병실에 있던 팔순 된 할머니께서 그날따라 아침부터 분주하셨습니다. 종잇장처럼 창백하던 그 분이 하루에 한 번 드레싱을 받을 때마다 비위가 상한 다른 환자들은 돌아눕거나 병실을 나가 있곤 했지요. 욕창으로 짓무른 야윈 등을 한 번씩 닦아낼 때마다 피고름 젖은 거즈가 한 무더기씩 버려지고 할머니는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축 널부러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기력을 회복하셨는지 얼굴을 닦아 달라, 환자복을 갈아입혀 달라시는 것이었어요. 열한 명의 아이를 낳고 그중 아홉이 장성하여 짝을 다 맺었으니 다복한 양반이라며, 멀리 있어 못 오던 막내딸과 손주들이 오늘 온다고 간병인 아주머니가 말하더군요. 고대하던 딸과 손주들을 맞아 할머니는 참으로 오랜만에 화색을 찾으셨어요. 평소 몇 숟갈 뜨지 않던 미음도 막내딸의 손길에 착한 아기처럼 반 넘게 받아 드시더군요.
그날 밤 할머니는 운명하셨습니다. 한밤중 간병인 아주머니의 비명 소리와 간호사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아, 그 분이 운명하셨구나. 나는 직감적으로 깨닫고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덜컥 겁이나 엄마를 돌아보았지요. 죽음 앞에 인간의 이중성이란 이런 것이더군요. 늘 마음의 준비를 해오고 있었건만, 모든 생명이 누구도 예외없이 건너야 할 죽음이 내 가족과 지인에게는 서둘러 임하지 않기를 욕망하게 되더군요.
엄마는 이미 깨어 있었습니다. 간호사와 당직 의사가 뛰어들어오고 할머니의 병상이 서둘러 응급 처치실로 옮겨졌습니다. 산소 마스크가 씌워지고 수혈과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분주하게 행해졌지요.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의례적인 절차, 죽어가는 자에 대해 다분히 산 자의 관점으로 행해지는 요식행위 같은 것이었다고 할까요. 어떤 형태로든 남게 될 산 자의 부채감을 덜기 위한 한바탕 소란이라고 할까요. 죽음의 문에 들어섬으로써 육신의 평안을 찾은,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위해 이제야말로 마음의 길을 정관正觀해야 할 이에 대한 참된 배려가 아니었습니다.
종잇장 같은 육신이 심장 마사지 기계에 의해 몇 번이나 들어올려졌다 팽개쳐지는 사이 전갈을 받은 가족들이 하나둘 도착했는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지요. 가족 중 한 남자가 병실로 들어와 할머니의 병상을 치워 달라고 부탁하고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그 동안의 급료를 계산하고 나가기까지, 그 모든 분주한 과정을 지켜보던 엄마는 한 말씀 하시고는 다시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시끄럽구나…. 시끄럽게 하지 말거라. 시끄러운 건 싫다.”
고요….
한평생 무지렁이 아낙으로 살아온 내 어머니가 자신의 죽음 앞에 ‘고요함’을 주문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 이 분은 모든 준비를 마쳤구나. 허락되어진 어느 날 가볍게 내리기만 하면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