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파기와 믿음
성서에 따르자면, 창조주 하느님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자유를 보장했다. 다만 거기에는 하나의 간단한 조건이 있었다.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자유가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비롯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피조물 인간은 지신을 피조물로 인정해야만 한다. 곧, 인간은 창조주의 전권을 인정하는 조건 아래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계약이었다. 인간의 생명과 자유는 ‘사과를 따 먹지 말라’는 명령과 ‘반드시 따르겠습니다’라는 복종, 곧 계약을 이행해야만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생명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명령에 불복하고 계약을 파기했다. 사과 하나를 훔쳐먹은 행위는 절도죄가 아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명령을 거역한 죄, 일방적인 계약 파기의 죄이다. 전적인 권한을 쥔 창조주 그리고 전혀 아무런 권한도 없는 피조물, 그 거역할 수 없는 관계를 부정하고 ‘자신의 뜻대로’행동한 명령 불복종 죄이다. 그것이 원죄原罪다. 그리고 그 죄값의 결과는 영생과 자유의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곧 죽음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 죽음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이 죽음을 극복할 수 없지만, 창조주 하느님은 죽음의 운명에 처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기에 죄지은 인간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구원의 조건은 믿음 뿐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용서하고 구원한다는 것을 사실로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만 한다면 죽음을 이기고 영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믿음’이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음의 종교라고 한다.
음독 자살과 해독제
모든 인간은 본래 부처다. 본디 부처이기에 다시 부처가 될 수 있다. 본디 중생이었다면 결코 다시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죽음을 초월한 본래 부처가 어째서 죽음에 구속된 유한한 존재가 되었는가? 붓다에 따르면, 인간들은 스스로 독약을 마심으로써 죽음으로 달려간다. 영원한 생명과 자유가 보장된 인간이 세 가지의 복합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죽는다. 독약은 마실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죽음은 운명이 아니라 음독 자살이다. 그 세 가지 복합 독약〔三毒〕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이들이 인간 죽음의 원인이다. 한가지 독약으로도 충분할 터인데 세 가지 복합 독약을 마시니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붓다는 죽음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치명적인 독약에도 해독제는 있기 마련이다. 탐냄이라는 독약의 해독제는 보시이고 성냄의 해독제는 인욕이며 어리석음의 그것은 지혜로움이다
결국 인간의 죽음은 보시와 인욕과 지혜로 극복될 수 있다는 뜻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지만 보시와 인욕과 지혜로움이 인간을 영생의 자유로 인도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것이 지혜다. 어리석기 때문에 독햄 보약인 줄로 착각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독약과 보약을 식별한다. 독약을 먹지만 않으면 본래의 영생과 자유를 고스란히 누릴 수 있다. 독약을 독약으로 보약을 보약으로 아는 지혜, 곧 깨달음이 인간을 죽음의 구속에서 해탈하게 한다. 본디 부처임을 깨닫기만 하면 해탈이다. ‘깨달음’이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같은가 다른가
이렇게 보면 두 종교는 완전히 다르다. 종교의 인간 이해에서 더할 수 없이 중요한 문제인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과 해결 방법을 두고 볼 때, 두 종교는 전혀 다르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자는 죽음의 원인을 명령에 불복한 죄로 보고 믿음을 그 극복 방법으로 삼는 반면에, 후자는 죽음의 원인을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독약의 음독으로 보고 깨달음을 그 극복 방법으로 삼는다.
그러나 많은 종교학도가 두 종교의 차이점보다는 유사점에 주목한다.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차이점에 주목하면 갈등을 낳기 쉽고 유사점을 강조하다 보면 화해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너무 손쉬운 결론에 도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감히 두 종교가 같다고 말하는 사람은 너무 무책임하게 타협하는 사람이기 쉽고, 충분한 고민 없이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은 너무 간단하게 자기 신앙의 우윌감에 사로 잡히는 사람이기 쉽다.
두 종교에는 다른 점도 있고 같은 점도 있다. 죽음의 문제에서 두 종교는 그 주장하는 내용이 전혀 다름을 보여 준다. 그러나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문법은 같다. ‘인간의 현존은 유한하다. 그러나 본디 인간은 완전했다. 그러므로 미래의 인간은 완전함으로 열려 있는 존재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죽음마저 초월하는 영원한 생명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두 종교는 이렇게 똑같은 문법으로 인간을 이해한다.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그 전혀 다른 내용을 똑같은 문법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진실인가 허구인가
많은 사람이 불교와 기독교는 결국 같은 가르침인가 아니면 다른 가르침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이 두 종교의 가르침 중에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허구인가라는 문제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는다. 물론 대부분은 자신이 믿는 가르침은 사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허구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죽음에 대한 교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두 주장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진리라면 다른 하나는 분명 허구일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사실에 대한 완전히 다른 두 주장이 모두 옳기는 어렵다.
이 세상의 많은 주장과 이야기들은 대부분 사실과 허구 둘 가운데 어느 하나로 실증될 수 있다. 내가 지금 소설을 읽고 있다면 그 소설은 분명한 허구이고 읽고 있다는 사건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증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주장이나 이야기들은 사실로도 허구로도 실증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특히 종교적 가르침들은 대부분 사실인지 허구인지 실증할 수 없는 것들이기 쉽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앞에서 본 죽음과 자유의 문제처럼 종교적 교설과 관련된 것들은 대부분 궁극적인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신학이나 교학과 달리 종교학은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허구인지 판단하는 것을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실증하고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믿고 준거準據하여 사는 사람들의 삶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에 관심을 둔다. 또 사실만을 지고의 가치로 간주하는 이 과학 시대에도 사실로 실증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그리고 사실로도 허구로도 판명되지 않는 그런 이야기들 속에 인간을 이해하는 전율적인 통찰력이 있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