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된 고생 끝에 찾은 양산 미타암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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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여화 - 정영호
2001년 05월 231호
방학이면 으레 바랑을 지고 서울을 떠나 각 지방을 다니는 것이 이미 오래 전에 생활화되었다. 1962년 1월의 겨울방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해는 경상남도 지역을 목적지로 정하고서 우선 경주를 찾았다. 때마침 부여국립박물관장이던 홍사준 선생께서 경주국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하셨기에 인사도 드릴 겸해서 들렀었다.
오랜만에 문안드리고 준비해간 좋아하는 사탕 한 봉지를 드렸다. 역시 사탕부터 바로 입에 넣으시며 “내가 제일 즐겨하는 선물이 이거요.”라고 하셨다. ‘경주지역에 새로운 소식이 없느냐’고 여쭈었더니 ‘별 특별한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여기 있는 동안 첨성대를 비롯하여 성덕대왕신종, 불국사, 석굴암 등 여러 조형물을 실측해야겠다는 계획을 말씀하셨다.
나는 이 곳에 온 목적 중의 하나가, 경상남도 양산군에 미타암이라는 암자가 있고 그 곳 동굴 속에 석불 1구가 봉안되어 있다는 소문을 오고가면서 스님들로부터 들었기에 그 곳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홍관장께서는 그러잖아도 양산쪽을 가보려고 생각중이었다고 하였다. 이유인즉 작년(1961) 8월에 통도사 건너편 내원사內院寺에서 수도공사를 하던 중 고려시대의 반자鈑子 하나가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 반자에는 명문銘文 수십자가 음각되어 있어 빨리 조사해야만 하는데 마침 잘되었다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조반 겸 점심을 오전에 먹고 우선 울산까지 직행 버스를 타고 갔다. 울산에서는 양산군 웅천면과 웅상면을 거쳐가는 완행버스를 타고 웅상면 서창리에서 내렸다. 장터에서 물어보니 바로 서쪽에 높이 솟아 있는 봉우리가 천성산인데 그 꼭대기에 미타암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청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아물아물하게 뭔가 산꼭대기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젊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홍관장님은 환갑을 바라보는 연세이어서 ‘괜찮으시겠냐’고 여쭈었더니 ‘쉬며쉬며 가면 못 오를 리가 있겠냐’고 하시면서 오르기를 재촉하셨다.
천성산은 811m나 되는 높은 봉우리로서 표고 922m의 원효산과 연접해 있어 산줄기가 험난하였다. 평지에 솟아 있는 산이어서 올라가기가 만만치 않았다. 처음 산밑까지 약1㎞ 정도는 무난히 걸을수 있었다. 하지만 산길로 접어들면서 올라갈수록 걷는 시간보다는 쉬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해가 기울어 질 무렵에야 겨우 미타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절에는 단칸방 하나에 노스님 한 분이 계셨는데 나를 동굴로 안내하여 그 안에 서 계신 석불을 조사하도록 해 주셨다.
동굴 앞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니 올라 온 길이 까마득하게 보였고 신작로와 마을 집들마저 아득하여 마치 비행기를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비록 연로하신 선생님을 모시고 오르기는 하였으나 이렇게 자주 많이 쉬면서 오랜 시간이 걸려 힘들게 답사해 본 적이 없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양산시 웅상면熊上面 서창리西倉里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소주리召周里 천성산千聖山 정상 가까이 미타암彌陀庵에는 석불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석불은 천연암굴 내에 안치되었는데 입구(지름이 약 2.6m의 동굴)로부터 약 9m 되는 곳에 4계단석(층높이 149㎝)을 마련하였으며 그 뒤는 길이 3.4m의 굴이 이어져 있다. 광배와 연화대좌 등 전체를 동일석으로 조각하였고 반육조半肉彫의 정면 직립한 설법인說法印의 아미타여래상인데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인 본존으로서 암자의 명칭도 여기서 유래된 듯 하다.
나발의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고 양쪽 귀는 어깨 위까지 길게 늘어졌으며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백호는 없다. 법의는 통견으로 원호를 그리면서 양어깨로부터 유려하게 전신을 감쌌으며 양팔에 걸쳐서 내려진 의단은 양 옆으로 펼쳐 있고 가슴에는 군의의 결대가 보인다. 수인은 왼손을 내려 외장하였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모지와 인지를 접하여 외장한 설법인이다. 양쪽 발은 노출되었고 발가락 등이 육중하며 둔우한 느낌을 준다. 광배는 주형舟形의 거신광擧身光으로 상면이 내곡되었고 내?외 2중 원권으로 두광을 나타냈으며 여기서 좌?우측에 등행等行 2조선條線을 내려 신광을 표현하였다. 또 광배 주변에는 구름무늬와 불꽃무늬로 장식하고 있다.
화강암의 조각면에는 곳곳에 녹색의 이끼가 보이며 거의 순백이나 이것은 오랜 세월을 두고 굴 속에서 비바람을 맞지 않았던 탓으로 보인다.
이렇듯 전체가 동일석으로 조성된 입불로서의 유례는 감산사甘山寺의 석조아미타?미륵 두 상像에서 볼 수 있으며 광배, 입상, 수인, 의문까지의 조각이 동일한 수법으로 같은 양식 계열에 속한다고 하겠다. 특히 감산사 석불에는 명문이 있어 같은 계통의 이 불상의 조성연대 추정이 주목되는데 양식상으로나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엽의 우수작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불상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서방 극락세계로 날아간 다섯 비구가 수도하던 석굴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더욱 주목된다.
동굴 속의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을 조사하고 밖에 나와보니 해는 이미 기울고 서쪽에 붉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미타암에서 하루를 쉬고 다음날 내원사를 가려고 했으나 노스님의 말씀이 ‘기거할 방도 없고 공양도 마땅치 않다’고 하며, ‘서쪽고개 너머로 한참 내려가면 내원사가 있다’고 하기에 걸음을 재촉하였다.
고개 마루턱까지는 길이 잘 보여 쉽게 갈 수 있었으나 내리막길부터는 이미 어둠이 깔려 전등을 비춰가며 걸어가는데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얼마나 찧었는지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찢어질 정도였다.
밤 8시쯤에야 내원사에 도착하여 스님을 찾으니 마침 우리를 알아보는 낯익은 비구니스님이 나오셔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한밤중에 저녁공양과 과일까지 대접받아 간신히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다음날 지난해 출토되었다는 고려반자를 조사하였다.
이처럼 어렵게 조사한 양산의 미타암 부처님은 현재 보물 제998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