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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생명공학, 불교는 답변을 준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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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2001년 04월 230호
종교의 역할을 과학이 대신하고 있으니, 종교의 지엄한 권위를 빼앗길 수 있다는 음울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과학자들에 의해서 전파되고 있지 않으니, 불온하다는 혐의를 덮어씌울 수는 없다. 종교학자와 수행자, 목회자들의 목소리가 더 다급하다. “이러다가는 정말 과학이 종교의 권위를 끌어내리는 현실이 닥칠 것” 이라는 위기의식, 경계경보의 성격이 짙다.
과학이 대신한다는 것은, 최근 논란의 중심에 있는 유전자 즉, 생명의 비밀을 밝혀내는 작업을 말한다. 지난해 6월 ‘인간 게놈 프로젝트(인간 유전자 연구 계획)’의 중간발표가 있었다. 인간이 가진 46개의 염색체 내에 있는 30억 쌍의 염기가 어떤 식으로 배열되어 있는가를 밝혀낸 것이다. 왜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누구는 뛰어난 운동능력을 왜 가졌는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유전 물질을 찾아내고, 이의 인위적인 결합을 통해 공상으로만 가능했던 복제인간의 생산도 가능하다는, 실로 가공할 만한 사건이라 하겠다.
이같은 발견은 종교, 특히 기독교의 교리적 기반을 흔드는 사건이다. 지금까지 생명은 신의 의지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었고, 따라서 생명의 탄생과 소멸은 신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유전학의 발전은 생명을 과학의 영역에서도 규명해 낼 수 있으며, 인위적인 조작도 가능함을 보여 주었다. 생명은 더 이상 신의 배타적인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와 과학은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김승철(경성대 신학과 교수)의 지적대로 경쟁관계가 되었다. “종교가 생명공학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는 사실 자체는 생명공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이 종교와 거의 유사한 차원의 문제를 놓고서 평행적인 경쟁관계에 들어가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생명?생명윤리?종교’ <불교평론> 7호, 2001. 3)지나친 가정이겠지만, 생명 즉, 삶과 죽음의 문제를 더 이상 종교에 묻지 않을 수도 있다. 종교처럼 근엄하지 않은 과학에 그 답을 물으면 된다. 물론 기성의 종교들이 새로운 환경에 대처하는 자기 변화를 시도할 것이며, 과학과 결합된 새로운 종교의 출현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생명의 문제를 과학에 내주고 기복주의를 내세워 기존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종교도 있을 것이다. 기복주의의 조짐은 유전공학의 발전과 무관하게 종교의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지만,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많아졌다.
가톨릭교회는 일찍부터 유전공학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제한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경계의 눈길로 주시하고 있다. 유전공학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1953년 9월 교황 비오 12세는 유전학자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인간의 세계에서는 불가침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개개의 존재가 앞에 있기 때문에 침해할 수 없는 윤리적인 규범과 결합되어 있다”라며 인간의 불가침의 권리를 강조했다. ’53년은 왓슨(Watson)과 크릭(Crick)이 DNA 구조를 규명해낸 해이다. 교황 바오로 2세는 유전자 조작에 의한 복제인간의 생산에 대해 경계의 뜻을 밝혔다. “인간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거나 혹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악화시키지 않고 개인적인 안녕을 촉진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 그것의 목적이 유전적인 상속의 변화와 다른 종류의 인간무리 생산이라면 그러한 조작은 피하여야 한다.”(1983 세계의학협회 연설. <불교평론> 4호 100~101쪽)불교에서는 유전공학의 성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불교에서는 일단, ‘유전자=업종자’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본다. “연기 즉 인연의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유전자는 인因에 해당하는 것이라 보아도 된다. 콩 심은 데 콩이 난다고 할 때, 그 콩은 인간의 유전자에 비유할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업業종자에 해당한다”는 설명이다.(최정규, ‘인간복제와 불교교리는 모순되는가’ 앞의 책 84쪽) 《유가사지론》에서는 중유中有와 아뢰야식으로 풀어내고 있다.(아래의 서술은 호진스님의 ‘생명공학의 도전에 직면한 불교의 윤회설’(<불교평론> 4호, 2000년 가을호) 60~61쪽에서 옮겨옴.) 남녀 또는 암컷과 수컷은 각각 정혈精血 (정자와 난자)을 내게 되고 그것들은 모태에서 응결한다. 이 응결체에 중유(사死와 생生 사이에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중간 존재)가 결합하게 된다. 중유는 응결체와 결합하는 순간 소멸하고, 중유 속에 보존되어 있던 아뢰야식(業力, 종자식)이 동력인動力因이 되어 응결체가 가지고 있는 네 가지 물질요소(地水火風)와 함께 작용함으로써 미세한 감각기관들이 생겨난다. 이것이 최초의 생명체이다.
그러나 유전공학의 발견과 불교의 윤회?업 사상이 일치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최정규는 아래와 같이 말하며 생명공학과 불교가 서로 대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뢰야식의 종자와 DNA의 유전자 정보가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아뢰야식의 외연이 유전자 정보의 외연보다 더 넓다고 하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뢰야식은 윤회의 근원이지만 동시에 깨달음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전자 정보는 윤회의 한 근거로만 상정할 수 있을 뿐 생사를 넘어선 깨달음의 영역으로까지 그 의미를 확장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깨달은 사람의 유전정보를 주입해 복제인간을 만들었다고 해서 깨달음이 전이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의 세계는 여전히 과학이 아닌 인간의 과제로 남는다. 유전자에 의한 생물적인 특성은 복제인간에게 주어지지만, 환경적인 요인은 유전자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불교와 유전공학의 대화의 접점은 윤리의 문제이다. 질병의 치료와 예방, 식량의 대량 생산 등 유익한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결과들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호진 스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한 존재로부터 많은 복제인간을 만들었을 때 육체와 동일한 숫자의 동일한 영혼이 존재하는가, 육체는 같아도 영혼은 다른가. 만약 여러 사람의 유전자를 조합해서 한 인간을 만들었을 때 영혼도 여러 가지가 혼합되는 것인가.” 기존의 생명과 영혼에 대한 답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불교와 과학은 대화는 할 수 있으되, 윤리적 접점을 서로가 만족하는 수준에서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자본과 과학의 논리가 손을 잡아 이루어낸 쾌거가 바로 인간 게놈 프로젝트이며, 이는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는 단계에 왔다. 불교는 욕망의 완성을 절제를 통해 이루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과학과 자본은 끝없는 탐구심과 이윤추구라는 자기논리로 운동하고 재생산을 거듭할 뿐이다. 과학과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욕망은 반드시 달성해야 할 가치이지 절제할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두에 말한 ‘종교의 위기’는 과학과 자본에 브레이크를 걸 수 없는 종교의 처지를 고백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과학과 자본에 패배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깨달음의 문제는 여전히 고귀한 영혼을 지닌 인간의 것이며, 과학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영역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관해서는 안 된다. 낙관론은 문제를 제대로 알고, 해법을 제시하는 노력이 있을 때에만 성립한다. 가톨릭교회는 교리적 해석을 내놓고 있으며, 신자들에게 유전공학을 바라보는 근거로 제공하고 있다. 과학에게는 끊임없이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신자들에게는 혼란을 막는 유용한 장치로 기능한다. 이는 종교의 기능이기도 하다. 불교는 이 기능조차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