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당과 유년시절
한말의 창원 고을 북동리-대숲과 수백년 묵은 모과나무가 높이 솟은 이끼 묻은 성둑 아래 넓은 외갓집 안 골목을 들어가면 자두나무 있는 통장이 할매집 이웃 욱막집에서 난 첫소리 치고 태어 났었단다.
외손녀만 연달아 둘씩이나 놓고 첫 외손자로 태어난 난 거의 외할머니 품에서 자라다시피 하였고 밤늦게 엄마가 친정에 왔다 가면서도 어느분 곁에 자겠느냐며 외할머니 곁으로 달라 불었다. 외로운 외할머니 친구인 마산개댁 할버니가 방바닥에다 눈 아이 똥을 헛디디어 미끄러진 아침 소동도 회상된다.
집 뒤 성둑 넘어 몇 도랑 밭을 건너 경부선으로 이어진 철둑이 있었고, 그 동쪽 철길 너머엔 북산 기슭에 창원 포교당이 있었다. 아침 저녁의 종소리 ·목탁 소리와 일우(一愚) 주지스님의 우람한 송경염불소리며 으흠 목퇴우는 기침소리에 그곳은 집안과는 다른 그윽하고 먼 딴 세계인 성싶었다.
외할머니가 외손주 꼬마 팔목 잡고 데려간 초파일의 포교당 경내는 온통 등불 꽃동산 그대로였고 새옷입은 대중 남녀들의 법석대는 광경도 착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다던 외할머니 말씀대로의 극락세계인성듯 난 상기하였었다.
호국사(원산성사)시대
진농(晉農)입학생으로서 첨 고향을 떠나게 된 열네살 소년인 맏아들은 일우스님의 소개장을 얻어온 아버지에 이끌려 남강 서쪽 상류의 낙락 벼랑위 서장대(西將台) 안골에 있는 호국사에 기숙생으로서 숙식하였다. 그땐 4월 입학이어서 돌아가시는 아버질 전송하던 촉석루(남장대) 강언덕엔 벚꽃이 만발했었다. 60년도 더 옛 얘기인가보다.
그 절 권속으로서 그 해 초파일을 겪었다. 창원포교 당보다 높은 계단 위에 대웅전이 우람했고 아랫마당 법당도 훨씬 컸었다. 조석의 예불절차를 식구로서 시청했고 산중 대중들과 겸상했었다.
주지 월하스님은 종종 대본산 해인사엘 다녀오시면 더 돋보이는 스님 같았다. 뒤엔 절을 나와서 (당국 금채로) 스님 살림집으로 옮겼고 다시 살림집을 따라서 큰 점포집으로 합째 옮겼는데 해인사 귀로에 노독 상한(급성 맹장염)으로 객사, 화장되셨다고 들었다. 임란 진주성 싸움 땐 산성사가 농성 때 내성(內城)안 처점으로 병영임무를 다했기에 호국사의 공명(功名)을 받았단다.
그 절에서 맞은 초파일 무렵엔 월하스님이 대구에서 모셔온 팔상극때가 아래 법당에서 ‘리허설’하고 있었는데 뿔 돋힌 마귀가 출몰하는 컴컴한 지옥 장면을 목격하고 몸서리쳤다. 그 월하스님께선 그처럼 뜻있는 사판송이기도 하셨나보다.
연화사의 초파일 밤
창원포교당의 일우스님 상좌였던 땅딸보 코맹맹이 영철스님은 신임한 진주 수정봉 연화사 주지스님이었다. 큰누나의 보통학교 동창생이자 고향집엘 자주 드나들던 인정많은 선배였다.
‘창수야…··따라가자’고 데리고도 다녔고 올 때마다 꼭꼭 다과를 사왔었다. 형님 같이 스스럼없는 사이였다.
막상 초파일은 냥부터 하학 후엔 절에 와서 있으란다. 무슨 잔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고향 아우처럼 일하는 곁에 두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포교당초파일이나 호국사 초파일과는 달리 연화사(그땐 욱봉포교당) 주지스님의 바로 귀빈 대우였다. 미역 튀김과 가죽 자반·잣강정 ·사과 등등 공양도 풍성한 진미였다.
영철 주지스님은 그날 밤은 강당 단 위에서 자아한다고 복록의 뜻을 말했다. 신도회장 장성룡 공의 맏이인 진호후배도 복록(福錄)을 이유로 한 담요 아래 동첨시켰다. 진호군은 저희 아버지처럼 백석(白哲)의 한눈 째그탱이 색동이었다. 양사월 초승의 마룻바닥 잠자리가 삼경 이후엔 오소소했기에 담요 한장으론 차가웠으나 어쩐지 수줍음에 두 해 후배인 예쁘장한 진호군을 껴안기는 저어로웠다.
한쪽 째그당 눈인 그대로 진호군은 아가씨다운 미남이었으나 춥다고 마구 껴안긴 무엄하였다. 사춘길 알려주신 부처님!
속(續)연화사 추억
광복을 맞은 그 해 11월에 내가 원작 주연된(형편상 불가피로) 3막「극 ‘젊은 계승자(繼承者)’의 상대역은 여교사 H양이었다. 항일 동지의 무덤 앞에서 그 뜻의 계승자이고자 다짐하는 젊은 애인들의 결혼식에서 그분은 나의 신부였다. 서경남 일대 30여 무대를 토·일요일마다의 유량극단이었던 제 2회 작품의 선구작이자 처녀작이던 무대 위의 애인에서 신부였던 H양을 폐막 후에도 못 잊어 그의 집을 찾아갔던 몇 차례째 어느 밤 마주앉은 작은 방이 갑자기 정전됐을 때 그분은 그 자리서 꼼짝 않았으나 객쩍어 벌떡 일어나 미닫이 출입문을 나선객은 ‘밖엔 달이 밝군요? ’하고 위기(?)를 탈출했던 나. 그 겨울밤을 지난 이듬해 봄 연화사의 ‘사월 팔일’ 밤은 한편 시만 남고,
자 만동(萬燈) 고운 밤
향기로운 푸서리,
전등 죽은 거리에
상긋 웃는 초생달,
말소리가 다르다
얼굴 바로 못 보고,
가을 한 밤 무대 위
촛불 밝힌 그 임아,
제행무상(諸行無常) 누천(累千)년
석가세존(釋迦世尊) 나신 밤,
꽃불 송이 밀물에
조심 띄워 보내다.
맹아탑(孟兒塔)의 불등(佛燈)
무수한 목숨들이 가량잎 처럼 몰려왔다가 가량잎 처럼 굴러간다’고 그의 스무살 유시집에 수록된 수필처럼 둘째 맹규는 그 나이에 이미 30이 넘고서야 연화 초파일 밤에 시상(詩想)했던 제행무상을 실감했음이었던가!
어느 견승 불자 말씀으론 그놈의 금생이 전생 보살의 화신이라고 그럼 왜 보살행을 못 다하고 무언 산상(지리산 채석고원)에서 제가 아는 독초 뿌릴 즙(什) 내 먹고 갔느냐는 속문엔 그렇듯 숨바꼭질처럼 한시절만 다녀가는 전생보살도 있느니라고 답하였다.
저간(遺間)의 소식을 어찌 속환(佑判)하리요 약골 공동산 조부모 선영 아래 요절한 손주놈 시신을 묻어 주고 12번이나 J산에 올랐던 산정(山情)을 달래는 부정(父情)으로 내집 청수헌 동남구석에 축산(藥山)하여 운명 현지에서 파온 몇 가지 초목들도 자리잡아 심었고 ‘맹아의 탑’을 세운 왼편에 작은 석굴에다 예쁘장한 관음보살 석상도 꼬셔 앉혔다. 참배 석경(石經) 어귀에 돌 두꺼비 한 놈을 수문장으로 앉히고 탑 아래 석반을 파고 해인사 도요에서 구워온 감 빛 면자 뚜껑 백자함엔 대다라니경 주사(朱寫)와 유시집 「모독당한 지접에서」를 넣고. 올해도 초파일 밤이면 어미가 달아준 불등 앞에서 그놈 법복을 벌어 목탁 송경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