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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라마-숫따 : 진리 탐사 헌장
세상 돌아가는 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범위가 조금 크고 작다는 차이가 있을 뿐, 그 근본 바탕에 있어서는 모두 한 모양에 같은 원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간의 싸움이나 온갖 사회문제, 그리고 심지어는 나라 사이의 전쟁조차도 인간의 탐욕과 노여움, 그리고 어리석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한 가지 결과를 놓고 제각기 자기 식으로 가려 정의正義 혹은 불의不義라고 도장을 찍어 놓는다. 그러나 그렇게 찍힌 낙인은 대부분 억지로 보인다. 즉, 거의 모두 힘있는 소수, 그리고 이긴 쪽이 정의요, 힘없는 사람이나 약소국, 그리고 짓밟힌 다수 대중은 불의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전범이라는 이름으로 매도되는 사람들은 으레 패전국에서만 나오고, 온갖 추태에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르고도 싸움에 이긴 힘센 군대는 어떤 범죄도 저지른 적이 없게 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늘 이긴 쪽이 정하고, 그러다 보니 실컷 얻어맞고 부서진 쪽이 불의요 범죄자 집단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선악과 정사를 판단하는 최상의 잣대는 무엇인가? 예로부터 이 문제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한 경전으로 깔라마-숫따를 들어왔다. 또한 이 경전은 일찍이 <진리 탐사 헌장>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붓다께서 코살라 국에 머물 때였다. 한 번은 깔라마 족에 속한 께사뿟따라는 작은 도시에 간 적이 있었다. 수많은 고행자와 방랑 수행자들이 자주 지나치는 곳이었지만, 깔라마 인들은 어느 특정 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캬 족 출신 고따마 붓다가 마을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깔라마 지도자들이 모여 붓다를 토론에 초대했다. 붓다를 만난 자리에서 그들이 물었다.
“스승이시여, 사문과 바라문들이 잇달아 께사뿟따에 옵니다. 그들은 각기 자기가 생각하는 선과 악, 정正과 사邪에 관한 견해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전에 들었던 다른 견해를 이야기해 주면, 그들은 한결같이 남들의 견해를 비방하고, 자화자찬에 열을 올립니다. 우리는 그들의 태도에 당황하고 그들의 생각을 의심하게 됩니다. 누가 진실을 말하며, 누구 말이 그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이런 무리들은 늘 있게 마련인가 보다. 붓다께서 말했다.
“깔라마 인들이여, 그대들이 어리둥절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에 의구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대들이 선과 악, 정과 사를 탐구함에 있어 몇 가지 피해야 될 것이 있다.” “스승이시여, 그것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깔라마 인들이여! 전적으로 전통에 의지하는 것은, 정당하게 선악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보고報告, 혹은 소문, 그리고 경전의 권위에 대한 의존도 마찬가지다. 논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거나, 그럴싸한 추론이 진실한 것이 될 수도 없다. 외관으로 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전제니까; 이 경우에는 이게 옳을 듯 해서; 혹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 등의 이유는 바르게 선악을 판단하는 준거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불교 이외의 어떤 종교 전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선언임에 틀림없다. 전통과 경전의 권위, 논리적 타당성, 더 나아가 스승이 말한 것이라고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붓다께서 지적한 방법들을 제외하고 어떻게 시비를 가리고, 정과 사를 판단할 것인가? 왜냐하면, 이게 곧 세상 사람들이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리둥절해진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다시 물었다.
“스승이시여, 당신께서는 우리가 무언가를 판단하고 알아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열거하고 부정해 버렸습니다. 그것 말고 무슨 수로 선악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알 수 있습니까?”
이에 붓다께서는 ‘탐욕과 증오와 미혹에 의해 유발된 소행이 곧 악’이며, ‘탐욕과 증오와 미혹에 의해 유발되지 않은 것, 그리고 사람들을 번영과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선’이라고 설명하게 된다. 이것은 곧 어떤 행위를 일으킨 동기와 의도에 따라 그 행위가 악이 될 수도 있고 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비슷한 결과라 하더라도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행한 것인가에 따라, 그 결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는 것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가 기계적 결과론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경의 말미에는 증오와 원한을 지우고 티없이 청정한 마음을 가진 제자가 바로 이 세상에서 증득하는 네 가지 안식安息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즉, 내생이 있고 자기의 행위에 대한 응분의 과보가 있다면 이미 닦은 선업으로 사후에 천상에 태어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안식이다. 그러나 내생이나 선ㆍ악행에 대한 과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 세상에서의 증오와 원한을 여의고 자기 스스로를 안전하게 지킨다. 이것이 두 번째 안식이다. 악행의 과보가 있다면 스스로 악행을 범하지 않은 고로 걱정할 일이 없으니 세 번째 안식이다. 아무런 과보가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 청정해졌음을 아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네 번째 안식인 것이다.
붓다의 설명에 만족한 깔라마 인들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마치 거꾸로 된 것을 바로 놓는 것과 같이, 가려진 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어두운 곳에 등불을 가져와 ‘눈 있는 자 보라’는 것과 같이, 갖은 비유와 방편으로 법을 설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우리들은 깨달으신 분과 그 분의 가르침과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당신을 생명의 귀의처로 삼은 우리들을 부디 제자로 받아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