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법의 체성은 둥글어서 모난 데가 없다. 만유에 있는 제법의 실제는 바로 두 가지 모양을 가지지 않았다는 뜻이 진리를 표현하는 의상스님의 표방이다.
법이라는 명칭을 표방한 것은 현실의 물리적 세계를 포함한 현상까지도 그 어느 것 하나도 실제에 있어서는 조금도 같은 것이 없이 각각 제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같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현상은 말로써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현상올 나타내는 본질은 언어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성품, 즉 체성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체성은 진리와 현상과 언어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그래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간단하게 원융한 것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모-자라거나 넘치거나 길거나 짧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정확하게 그것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표현으로서의 함용의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절대적인 것은 표현되지 않는 것처럼 느낄 수가 있다. 그러나 느낌이 될 때는 이미 표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절대적인 사실이 일상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말로써 정확하게 설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중생과 부처는 언어상으로 구분되며 그 작용과 현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부처는 지혜의 근본이요, 절대의 완성자며, 불변의 개념이고, 세계의 시초며, 마음의 근원이다. 그런데 중생은 무명이고, 보편적 질서의 순응자며, 변화를 따르고, 세계의 현상이고, 의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다.
원융하다는 것, 법의 성품이라는 것은 이러한 두 가지 세 가지를 다 함께 갖추고 있기에 법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계에 팔십 년의 생애를 사셨다. 오늘날에도 더 많은 나이를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분의 업적을 전해 듣거나 법문을 듣고 배우는 이천육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 어느 누구도 부처님의 위대성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 믿어지지 않는 활동의 힘과 원동력은 무엇에 바탕 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법에 머무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금강경」에서의 첫머리의 시작은 ‘웅무소주 이생기심’.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의 작용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을까를 문제삼고 있는 사리불의 물음을 상기해 본다. 어떻게 미음을 머무를 것인가는 바로 부처님 자신이 팔십 평생을 어떠한 마음을 바탕에 깔고 생활하셨는가 하는 물음일 수 있다.
당신은 지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무슨 가치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날 컴퓨터가 많은 소프트 헤어를 가지고 어떠한 것도 모두 입력시킬 수 있는 활용의 매체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의식을 바꿀 수만은 없다고 한다. 또한 어려운 환경이나 작업을 대신하는 로봇이 있어도 결국은 인간의 손이 마지막으로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입력된 작업이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인간의 검증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래에 산업폐기물이다, 환경오염이다, 더 구체적으로 이 글을 쓰는 때에 보도되고 있는 원진 레이온의 이산화탄소의 물질은 2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에서 쓴 가장 신병무기의 독가스와 같은 것이었다고 보도 되고 있다. 낙동강 폐수 방출의 페놀도 사람에게 유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컴퓨터가 계속 발달하여 제 3세대의 컴퓨터는 계산능력과 기억용량이 인간능력의 몇 만배 이상으로 앞서 있고, 제 4세대의 컴퓨터는 인간의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까지 합칠 수 있으리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의 기억과 논리능력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결코 인간처럼 스스로가 깨우치는 일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있다.
부처님의 위대성은 인간 스스로의 깨침에 대한 내용이다. 진정한 법의 성품은 각자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말로 배우고 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알고 째달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중국의 고승들 기운데 대해 종고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원오선사에게서 진리를 터득하고 어떤 지역에 갔었는데, 그곳의 스님들은 원오스님의 「벽암록」이라는 책을 보면서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대혜스님은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원오스님의 뜻이 바로 부처님의 뭇이라면 이러한 책에 매달리는 것은 깨달음에 조금도 보탬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불에 태우고 말았다고 한다.
깨침은 단순한 이해나 상상이 아니다. 「법화경」의 대의를 말하는 한 가지를 ‘개시오입’이라 하고, 「화엄경」에서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표시하고 있다.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게 한다. 또 믿고 이해하고 행하여 깨달음에 들게 한다는 뜻이다.
부처님이 이 세계에 나오신 진정한 뭇은 바로 이해나 실행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있다. 아니 깨우쳐 주는 일에 그 본 뜻이 있다. 그런 의미라면 부처님 당시에 컴퓨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냥 법의 내용을 입력하여 두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렇다면 분명해지는 것은 현실세계의 중생들에 깨우침을 위한 부처님의 팔십 평생의 내용은 깨우침의 바탕에 서있는 것이요 중생들의 무한한 능력도 또한 이 깨우침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사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물을 마셔보아야 차고 더운 줄을 스스로 안다’고 하신 말씀이다.
누구나 낙동강의 패놀이 섞인 물을 마셔본 뒤에라야 겨우 환경이 어떠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혼자서만,자기 가족만 잘 살면 된다고 믿었던 이들이 남과 내가 두 모양이 본래 없는 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두 모양이 없는 것을 원융하다, 둥글다고 표현한 것이다.
모든 법이 동함 없이 본래부터 고요하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인간의 사유공간의 현실을 ‘빛과 함께 달려가면 어떤 일이 생길까? ’ 의심했듯이 법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하는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처음 이 세상이 생겼을 때를 실제로 체험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아니면 오늘날 종말론을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 종말을 실제로 체험한 것처럼 부르짖고 있다. 물리적 시간으로 과학적으로 백오십억 년전의 시작과 오늘 이후의 세계를 한마디로 경험한 내용이 모른 법이 동함 없이 본래부터 고요하다고 말한다.
인류는 그 동안 변화를 거듭해서 바야흐로 21세기에 접어들 준비에 바쁘다. 그 모든 삼라만상은 저마다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과학적인 입장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대부분이 빅뱅(Big Bang)을 믿고 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생각을 초월한 하나의 현상이고, 이 현상 이후에 어떤 법칙, 즉 순서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는 십이인연의 법칙이라고 말하고, 그 첫번째가 바로 무명(無明)이다. 과학이 가절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하나적 증명해 나간 것이라고 본다면, 불교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의해서 존재의 본질에서 무한한 근원을 깨우치는 것이다. 그렇게 깨닫고 보면 모든 존재는 그것이 있기까지의 귀중한 사실들의 집합과 연결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한 원인과 조건들이 근원에 돌아갈 때 오늘날의 매스컴처럼 떠들썩하지도 않고 자연스레 귀납되어 진다.
낙동강 물에 페놀을 방류한 회사는 결코 영원할 수 가 없다. 또한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 나만의 삶이 아니라면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는 분명해진다. 나의 눈 앞의 이익만이 삶을 보장 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 되는 요즈음, 본래 고요의 인식은 동함이 없는 불변의 법칙 속에 귀납된다. 이 법칙 속에는 유한과 무한, 보편과 특수의 논리와 비논리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