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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라자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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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 일지 1991년 05월 111호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숨겨진 단층

쿠마라지바(344~413)가 누구인가? 그는 언도 대승불교를 중국에 이식한 불교사상가 「반야경」·「법화경」·「유마경」·「아미타경」·「대지도론」·「중론(中論)」·등과 같은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기본경전을 범문(寶文)에서 한문(漢文)으로 옮긴 위대한 역경삼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세(人世)의 절망과 오염을 깊이 체험하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면서도 사장(思想)의 운명을 환성해낸 불교(佛敎)의 달인(達人)이다. 우리는 그의 생애와 사장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불교이해, 더 나아가 인간의 생애에 방점을 찍고 지나가버리는 사상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쿠차(Kuch) 국의 왕녀
쿠마라지바(Kllmarajiva) 중국에서는 구마라습(鴻摩羅什)이라고 음역(音譯)하고 있으며 보통 나습(羅什)이라고도 불린다. 그의 생존연대는 344~413년이지만 이설(異說)이 었다.
쿠마라지바가 태어난 곳은 쿠차(Kucha)라는 고대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국가이다. 코탄(Khoton)과 함께 가장 강력했던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국가 쿠차는, 중국과 인도 그리고 로마로 연결되는 실크로드의 요지(要地)에 위치한 문화와 무역의 중개지로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 이 쿠차에 한 사람의 왕녀(王女)가 있었다. 전기(傳記)는 이 왕녀가 이마에 붐은 사마귀를 가진 미인이라고 썼다. 이 왕녀는 인디아에서 망명(亡命)해 온 한 청년 귀족을 사랑했다. 이 청년 귀족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지만 그는 귀족으로서의 기품과 수려한 풍모를 가졌던 동시에 망명자 특유의 니힐한 무기력을 가진 남자였다고 화여진다. 불 같은 정열을 가진 왕녀는 첫눈에 이 인디아의 청년 귀족을 사랑했다. 그들은 결혼했다.
이윽고 쿠마라지바가 태어났다. 그러나 왕녀는 결혼생활에 절망했다. 그리고 그녀는 출가(出家)를 열렬히 동겸(置標)했다. 이 절망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우리는 격렬한 의지와 정열을 가진 여자의 깊은 절망을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녀에게 남자는 구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려한 풍모와 니힐한 기질을 가진 남자는 다시 새로운 여자에 열중했다. 또다시 여자------여자. 이 청년 귀족은 한 여자에게 머물지 않는 방탕한 기질의 남자였다.
왕녀의 출가는 허락되지 않았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쿠마라지바의 동생이 태어났다. 그녀는 죽음을 무릅쓰고 출가를 주장했다. 그러나 출가의 삶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일곱 살 난 아들 쿠마라지바를 출가시켰다. 그녀는 남자에의 회망을 아들에게 옮긴 것이다. 왕녀는 자신의 절망을 교육에 대한 집념으로 바꾼 것찌다. 그녀는 아들에게 성자(聖者)의 꿈을 걸었다. 한번 남자의 방탕함에 상처입은 여인의 정열은 이들을 성자로 키우게 된 것이다.
그녀는 어린 쿠마라지바에게 계율과 근면한 학업을 엄명했다. 쿠마라지바는 수재형의 소년이었다.
그는 모친의 감독 아래서 끊임없이 경전을 암기했다. 학문의 진보에는 어머니도 놀랐다. 이 천재소년의 이름은 쿠챠 밖으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오빠가 국왕이었으며, 쿠마라지바는 국왕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허약한 국왕은 누이의 맹렬함과 쿠마라지바의 비범함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주변의 승려들은 쿠마라지바를 염려했다. 그래서 그녀는 불교의 고향 인디아로 아들 쿠마라지바를 데리고 갔다. 그 당시 북인도의 캐슈미르에는 소숭(小棄)의 불교시장이 완전히 체계화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쿠마라지바를 캐슈미르의 명승 반두달다(樂職多, Bandhudata)에게 맡겼다. 쿠마라지바는 반두달다에게 소승불교의 진수를 배웠다. 그리고 배움에 열중한 이 조축한 소년의 명성은 점차 주변의 여러 나라에 알려졌다.

아라한의 예언
성공적인 유학을 마친 모자(母子)는 의기양양한 심정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여행도중 만난 한 사람의 아라한(阿羅漢)은 소년티가 채 가시지 않은 쿠마라지바를 보고 말했다.
“이 아들의 용모는 보통이 아니다. 명승성자의 상(相)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만약 35세에 파계(關戒)하지 않는다면 이 아들은 성자가 된다. 그러나 계를 범한다면 이 아들은 다만 법사(法師)일 뿐이다.”
아라한의 예언을 들은 어머니의 뇌리에는 호잭(好色)했던 쿠마라지바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것은 불길한 예언이었다. 예언이란 나쁜 일일수록 반드시 실현되는 것이 아닌가?
쿠마라지바의 나이 25, 어머니는 쿠마라지바를 인디아로 보냈다. 그것은 단지 인디아로 떠난 부친의 자취에 쿠마라지바의 마음이 기울어진 것인 줄도 모른다. 또한 쿠마라지바의 교육을 끝낸 모친은 이후의 정신적인 성장을 쿠마라지바 자신의 자유의지에 맡기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쿠마라지바에게 최초의 전환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쿠마라지바는 모친의 비호와 감독 아래서 계율과 학문을 쌓았다. 그는 어머니가 내리 누르는 무게를 견디는 한 필의 낙타와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채 그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열어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그는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에의 사상적 전향을 결심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출가하여 계율을 엄수하고 정교한 아비달마의 학문체계를 쌓은 승려들의 불교, 소승불교가 당시 쿠차국의 불교였다. 그러나 당시 서북인디아에는 대승불교가 이미 발흥해 있었다. 적어도 대승불교사상의 화려한 개화(開花) 시기는 바로 그 쿠마라지바의 (A. D 3-5C)였다.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의 수도원적 계율을 부정하고 승려들만의 해탈이 아닌 대중에의 불교적 헌신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 사장은 번뇌의 공(空)을 설하고 있었다. 현세를 긍정하는 사상이 공의 논리를 바탕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때는 대승불교사상의 신화적인 인물 나가르쥬나가 그의 마술적인 생애를 마감한지 채 한 세기밖에 되지 않은 때였으며, 신홍 대승불교가 점점 중앙아시아의 여러 오아시스 국가를 경유해 중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쿠마라지바의 전기(홉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가 처음 「방광반야경」을 얻어서 읽으려 하자 마가와서 글자를 가리고 다만 하얀 지면만을 보이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쿠마라지바가 대승(大秉)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서원을 굳게 세우자 비로소 마가 사라지고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쿠마라지바는 「반야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대승의 가르침에서 시종일관 중요한 것은 체험이다. 체험이 없다면 아무리 경전을 읽어도 그것은 다만 글자를 주워먹는 것일 뿐이다. 그는 이 체험을 통해서 대승의 가르침을 숙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승의 사람으로서 기틀이 잡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모친의 곁을 떠난 쿠마라지바의 홀로서기는 소승에서 대승으로의 전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일견(一見), 니헬리스틱하게조차 보이는 대승의 공(空)사상이 그의 고독한 내면을 파고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젊은 그가 원했던 정신의 자유가 더 가까운 이유가 아닐까?
청년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민감하다. 그리고 기성의 권위와 전통을 부정하는 사상에 청년의 마음이 끌리는 법이다. 져 마르크시즘이나 실존주의가 현대의 젊은 이들을 매료시켰던 것처럼.
소승(小乘)은 계율의 불교이며 인간의 숙명적인 번뇌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한다.
출가한 정식의 승려는 250가지의 계율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완고한 계율의 불교인 것이다. 이에 비하여 대승은 번뇌에 대해서 인간의 현실에 대해서, 다른 태도를 갖고 있다. 대승불교는 번뇌 속에서 깨달음을 열어가는 인간의 불교이다. 일체가 공(空)이라면 인간은 확실히 자유롭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자유를 어떻게 스스로 사용하는가’라는 딜레마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데 있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소승불교보다 더 엄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청년 쿠마라지바는 니힐리스틱한 자유의 사상에 매력을 느꼈다. 이 쿠마라지바의 전향은 쿠차 국의 불교계에도 큰 화제였다. 그것은 쿠차 국의 불교가 당시 중앙아시아 전체의 불교를 가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승과 제자
쿠마라지바는 다시 쿠차로 돌아와 심오한 대승의 가르침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쿠차 국의 왕은 금사자좌(金獅子座)를 만들어 그를 앉히고 그의 주변에 중국산 비단을 깔게 했다. 쿠마라지바의 전향 소식을 들은 옛스승 반두달다는 그를 찾아왔다. 이미 쿠차국의 불교지도자가 되어 있는 제자와의 상면은 서먹서먹 했다. 반두달다는 쿠마라지바에게 말했다.
“그대는 대숭의 불교에서 무엇올 보았기에 정통의가르침을 저버렸는가?”
쿠마라지바는 말했다.“대승의 가르침은 유법(有法)의 공(空)을 설합니다.
소승의 가르침은 좁고 국한된 시각으로 해서 누실(痛失)이 많습니다.”
스승은 탄식했다. 그리고 나직한 음성으로 제자를 타일렸다.
“그대가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진리를 설한다니 나로서는 매우 두려울 뿐이다. 어찌 유법(有法)을 버리고 공(空)을 말하는가? 제자여, 나의 말을 들어 보라. 옛날 어떤 광인(狂人)이 가는 실을 좋아하여 실을 짜는 사람에게 매우 가는 실을 찌게 했다. 실을 짜는 사람은 미진(搬塵)과 같이 가는 실을 짜서 광인(狂人)에게 주었다. 그러나 광인에게는 그 실이 오히려 거칠게 보여서 더욱 가는 실을 짜도록 재촉했다. 실을 짜는 사람은 화가 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있는 이 실은 세상에서 가장 가는 실입니다. 나와 같은 기술자의 눈에도 보이지 않거늘 하물며 보통 사람이 볼 수 있겠습니까?’
이에 광인은 크게 기뻐하며 실짜는 사람에게 자신의 전재산을 주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대의 공(空) 또한 보이지 않는 허공의 실과 같은 것이 아닐까?”이 반두달다의 대승 비판은 매우 흥미있다. 평생을존재의 황구에 몰두해 온 이 아비달마의 거장 반두달다는 공사상(空思想)의 딜레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젊은 제자가 공사상의 니힐리스틱한 함정에 빠진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소승불교의 전통에서는 먼저 아비달마의 정교한 체계에 정통하지 않으면, 도(道)에 관한 자각이 생겨나지 않는다. 즉 견도(見道)가 있은 연후에 수도가 있다는 것이다. 스승 반두달다 역시 사상의 실을 짜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나친 사장의 심화(深化)가 인간에게 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반두달다는 쿠차에 체재하기를 1개월, 마침내 쿠마라지바에게 설복되었다고 전기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쿠마라지바 쪽의 기록일 뿐, 이 스콜라틱한 불교사상가는 새로운 시대의 불교를 크게 염려하며 발길을 둘렸는지도 모른다.

파계(破戒)
쿠차는 쿠마라지바에 의하여 대승불교의 나라가 되었다. 쿠마라지바는 이제 중앙아시아에서 나가르쥬나의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명성은 중국에도 전해졌다. 당시 중국은 분열의 시대였다.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行) 시대로서 피를 피로 씻는 전란이 계속되었다. 북중국(北中國)올 점령한 호족(胡族), 천진(함漢)의 왕 부견(符堅, 338-385)은 쿠마라지바를 손에 넣기 위해서 쿠차에 7만의 병력을 보냈다. 이때 전진의 왕 부견은 다음과 같은 선전포고를 내놓고 있다.
“제왕(帝王)의 정치는 마땅히 천(天)올 받들고 창생(蒼生)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어찌 남의 땅을 탐내어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겠는가? 이 일은 바로 덕(德)을 갖춘 지인(智人)을 초치(提致)하기 위한 것이다. 짐이 듣건대 서국(西國)에 쿠마라지바라는 인물이 있어 불교의 진리(健相)에 정통하며 음양(陰陽)을 잘 다스려서 후학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한다. 짐이 생각컨대 현철(賢哲)은 곧 나라의 큰 보물이다. 쿠차를 쳐서 쿠마라지바를 바로 초치하여 오기 바란다.”
부견은 그 전쟁의 대의명분을 쿠마라지바의 신병(身炳)을 확보하는 데 걸고 있다. 물론 그 명분의 이면에는 무역 중개지인 오아시스국가를 털어서 재미를 좀 보고자 하는 실리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선전포고에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가 있다. 그것은 전진 왕 부견의 사람 욕심이다. 동양의 옛 전통에서는 사람 찾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제왕의 정치력에 대한 명가는 그의 용인술(用人術)에 의해서 내려지곤 했던 것이다. 전진의 왕 부견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 역시 문제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쿠차는 부견이 파견한 장군 여광(呂光)에 의해서 간단히 점령되었다. 이때가 쿠마라지바의 나이 35, 그 옛날 산중(山中)에서 만난 나한에게 파계를 예고받은 바로 그 나이였다. 여광은 쿠마라지바의 신병을 확보했다. 여광은 몰랐다. 그 명성에 비해 쿠마라지바는 너무 젊었기 때문이었다. 전기(傳記)는 쿠마라지바가 학문에 열중하는 정열을 가졌으나 또 매우 솔직한 성품이었다고 쓴다. 젊은날의 쿠마라지바는 정열과 솔직함을 갖춘 미남이었다. 쿠마라지바를 본 여광은 ‘이 미남에게 여자를 주어 보자’고 생각했다. 여광은 한방에 쿠차의 여인을 가두어 놓고 술을 마시게 했다. 쿠마라지바는 무너졌다. 여광은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생승(聖僧)도 별 수 없구나. 우리와 똑같지 않은가? 왕은 왜 이런 애숭이를 초치하려고 애를 쓴 것일까?”
일개 야전사령관이었던 여광으로서는 납득이 안 가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쿠마라지바가 왕이 획득하도록 명령한 전리품으로 보였을 뿐이다. 여광은 쿠마라지바를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여광의 군대가 중국에 돌아가기도 전에 부견은 요장(跳養)에게 살해당하고 전진(前奏)은 쓰러졌다. 여광은 쿠데타에 성공한 요장에 의해 새로운 나라 후진(後奏)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양주(행州)에서 듣는다. 이에 여광은 자신의 군단올 고장(貼홉)이라는 또 하나의 오아시스 지역에 집결시키고 독립하여 국왕이 되었다.
이를 위진(隱奏)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광은 부하의 반란 속에서 죽는다. 그리고 또 연이은 반란이 계속 되면서 피를 피로 씻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군벌정권의 불가피한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쿠마라지바는 그 싸옴의 와중에서 살아 남았다. 그렇다면 원을 책도 없고 말을 나눌 사람도 없는 중앙아시아의 오지에서 십여 년 동안이나‘쿠마라지바는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 그가 거듭되는 혼란속에서 얼굴을 들어 바라본 인생(A生)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는 숱한 인간의 탐욕과 인간 존재의 어둠을 깊이 보았다. 그리고 중국어를 배웠다.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의미한다. 훗날 그가 경전번역에서 보여 준 깊이 있는 인간통찰은 이 암울한 시기의 탐구, 즉 경전을 떠나서 바라본 인간의 삶과 죽음, 우왕좌왕하는 인간의 혼란과 냐약함을 볼 수 있었던 고장 체재 기간 동안 형성된 것이다. 경전을 떠나 명상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그가 의지하던 나가르쥬나의 교학이 아닌 쿠마라지바 자신의 불교가 세워진 것이다. 결국 누구에게나 붓다의 정신이란 자신의 생(生)에 대한 반성적 사유와 체험을 통해서만이 확인되고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만약 이 시기의 쿠마라지바가 지금의 학자들처럼 서적을 산처럼 쌓아두고 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면 쿠마라지바의 깊이 있는 인간통찰의 안목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