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부터 은사스님을 조르고 졸라 그 절로 공부하러 떠났다. 그 곳이 동학사였다. 본격적인 수행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 깊은 부처님 말씀의 의미를 잘 모르면서도 마치 다 알게 된 것처럼 그렇게 신명나고 즐거울 수 없었어요. 30년 전이었지만 백여 명의 학인들이 저마다 다른 개성으로 모여서 화합하며 지내던 꿈 같은 시절이었지요. 강원시절에야 공부를 꾸준히 계속해야지 하는 원은 있었지만, 이 곳에 주지로 올 줄은 정말 몰랐어요.”
일연스님은 동학사주지가 된 건 순전히 과거의 빚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원주소임을 맡았던 강원 시절, 어느 늦가을에 동치미 다섯 독을 손수 담그곤 대성암의 만성 노스님과 인연 맺기 위해 한철 가서 산 일이 있었다. 암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 도반 스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물을 부어 놓지 않고 오는 통에 절여 놓은 다섯 독의 무가 다 상해 버렸다는 전갈이었다. 사나흘 뒤에 물을 부어야지 했던 걸 까마득히 잊은 탓이었다. 이후로 늘, ‘상해 버린 동치미 다섯 독’이 마음속 큰 빚으로 남았다. 봉녕사 강사로 살 때도 언제 어느 때고 동학사 겨울 김장을 손수 맡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할 정도로 마음이 늘 무거웠던 스님. 동학사 주지 발령을 받자마자, 순간 빚 갚는 시간이 왔구나 싶었다. 한절의 책임자로서 더러더러 힘에 겨운 일들과 마주할 때마다 ‘이자 붙어 버린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인과응보의 도리로 돌린다. 그 때문에 그 어떤 고난도 일연스님에겐 결코 고난이 아니다.
여섯 해 동안의 강원 생활을 마치고 동국대학교에 입학했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것이다. 강원과 달리 다방면의 학문을 폭넓게 공부하는 계기였다. 그러고는 정진하기 위해 석남사 선방으로 떠났다. 경전 속에 파묻혀 공부하기에 게으름이 없던 스님이 불현듯 선방으로 떠난 데에는 까닭이 있다.
강원 시절에 성철 큰스님의 법문을 들은 일이 있었다. 영원한 생명, 마음에 대한 법문을 들으면서 일연스님은 머리 깎고 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 자랑스럽고 바랄 것 없는 부자 같은 희열에 젖어 들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성철 큰스님을 모시고 듣는 법문이 아니었고, 누군가가 법문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을 ‘가리방’으로 밀어서 강원 학인들이 돌려보던 것이었다. 대중방에서 스님 한 분이 그 깨알 같은 글을 펼쳐들고 읽으면 모두가 경건하게 눈을 감고 듣는, 말하자면 ‘노트법문’이었다.
“그 법문을 듣고 나니 어디 가서 살아도 부럽지 않을 것 같았어요. 선방에서 회향해야겠다는 신념뿐이었지요. 처음 1년은 과연 내가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인지 조금 갈등했어요. 흔히들 몸 조복은 3년 걸린다잖아요. 그래서 석남사 1년, 내원사 1년을 선객으로 살다가 다시 석남사 선원에 들어가 3년 결사를 마쳤는데, 정말 귀한 시간이었어요.
돌아보면 제 재물은 좋은 스승과 좋은 도반들이었어요.”
가만 보면 일연스님은 자신의 공부를 위해서는 선지식을 찾아 길 떠나는 데에 전혀 주저함이 없어 보인다. 인홍스님을 찾아 선방으로 향했고, 선방 공부를 마치자마자 이번에는 옛 동학사 강주였던 호경스님을 찾아 대전으로 가서 그 곳에서 유식학과 일어를 공부했다. 그러곤 봉녕사 강원의 중강으로 계시던 묘엄스님의 지도를 받기 위해 봉녕사에 머물었고 그 곳에서 강사로 8년 세월을 났다.
“봉녕사에선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하던 시간이었어요. 강주 스님 밑에서 공부하면서 학인 스님을 지도했으니까요. 지금은 어른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체감하고 있어요. 위로 여쭙고 아래로 가르치며 살았던 그 시절이 돌아보면 제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거예요. 공부도 공부지만 겸허하고 청빈한 삶의 가치를 몸소 보여 주신 스님한테서 배운 게 많지요.”
봉녕사 강사 시절 불교방송이 개국하자 “자비의 전화”란 프로그램을 5년 동안 맡아 했다. 일 주일에 두 번, 청취자들의 교리에 대한 궁금증, 개인적 고민들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달래 주고 풀어 주는 관세음 보살의 역할이었다.
“돌아보면 배운 게 커요. 자기 수행 따로, 보살행 따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방송이 바로 보살행이고 그 자체가 수행이더군요. 학인만 가르치다 보니 중생 어려운 줄 몰랐는데 그들 마음 편케 하는 동안 내가 배운 것도 크고 내 역할도 새롭게 인식하게 됐지요.”
거르지 않고 방송을 하는 일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돌아보면 일연스님에게 이 시간은, 세상의 크고 작은 슬픔과 기쁨을 소홀히 하지 않는 이웃들 곁에서 깊고 따듯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것 자체가 큰 공부였던 것 같다.
동학사 화경헌은 사방으로 널직한 창이 열려 였다. 비 뿌리고 눈 내리고 바람 부는 사계절의 계곡이 한눈에 들어오는 창 앞에 앉아 이른 새벽부터 공부하고 학인들을 지도하며 절 일을 책임지는 스님에게 그 하루하루는 늘 새롭게 색다르다. 동학사로 부임하자마자 일연스님이 시도한 불사는 사찰환경의 복원이었다.
“오랜 만에 와보니 계곡이 무수한 사람들의 손길을 봐서 망가져 있더군요. 우리가 맑게 가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짐했습니다. 공익사업비를 신청해서 그 때부터 폐수 정화 작업을 시작했어요. 세계적인 공법의 토관을 통해서 폐수가 모두 걸러지게 해 놓았기 때문에 계곡물을 그대로 떠 마셔도 될 정도로 깨끗해졌지요. 21세기가 되면 환경의 문제가 인류 모두의 문제로 대두될 거라고 생각해요. 내 소원은 누구든 이 계곡 물을 안심하고 떠 마시도록, 그런 무공해 지역으로 만들려고 해요.”
승가가 도맡아 계곡물 맑히기를 해야 한다고 여가는 스님. 그 때문에 동학사는 국립공원 사찰 가운데 가장 먼저 계곡 정화가 이루어졌다.
일연스님이 추진한 또 하나의 복원 불사가 있다. 절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긴 세월 동안 동학사와 관련 있는 것이라면 규장각까지 찾아다니며 세상의 온갖 자료를 뒤졌다. 창건에서부터 근세에 이르는 오천여 점의 자료를 찾아냈고 만 네 해 동안 걸려 삼백 쪽 분량의「동학사사지」가 올 겨울에 선보일 예정이다. 거기에는 옛날의 시인 묵객들이 동학사를 찾아 옳은 명문장에서부터 동학사 산내 암자의 옛 위치와 옛 이름들까지 일일이 밝혀져 있으며 또 가람 배치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까지도 빠짐 없이 들어 있다.
“없어서 못한 재 아니라 찾지 않았기 때문에 못한 거였어요. 가장 감동어린 사료요? 그건 한 오십여 년전, 주지였던 서운스님께서 소임을 놓고 떠나시면서 인수인계를 한 자료입니다. 친필로 빗자루며 호미자루까지 몇 개라고 낱낱하게 적어 놓으셨더군요. 사중의 작은 물건 하나 조차 귀하게 여겨 꼼꼼히 인수인계를 했을 모습을 상상하니까 가슴이 찡했어요. 요즘 그런 걸 많이 잊고 사는 편이잖아요.”
동학사의 역사를 복원하면서 하나는 오층이고, 또 하나는 칠층, 그러나 모습은 서로 다른 탑, 고려 때에 세워졌는데 정작 정림사지 탑과 흡사한 백제 양식인 것이 독특한 탑, 본래의 제 이름을 두고 ‘오뉘탑’으로 더 알려져 있는 그 곳을 복원하는 일에도 몰두했다.
수행 중에 호랑이 목에 걸린 가시를 빼 준 스님 , 그 은덕을 잊지 못해 상주 여인을 물어다 준 호랑이, 부부의 연이 아닌 남매의 연으로 수행하다가 한날 한시에 열반에 든 비구 비구니 스님의 감동어린 사연도 오뉘탑의 이름만큼이나 아름답지 않은가. 어느 틈에 무속인이 계명정사란 현판을 걸고 있는 그 곳을 삼사 년에 걸쳐 일관되게 설득시켜 내보낸 뒤 상원암으로 복원해, 지금은 참선 정진하는 스님들이 머무는 도량으로 정화해냈다.
쉼없이 일을 만드는 스님, 그 희열에 푸욱 젖어서 생을 보람차게 이끄는 일연스님에겐 여전히 건져올려 복원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동학사를 전문성 있는 연구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어요. 21세기에 걸 맞는 수행자상을 만드는 연구원이랄까요. 제 꿈은 사실 멀리서 나그네로 살더라도 동학사가 좋은 스님 많이 배출하고 양성하는 도량으로 자리잡은 걸 기쁘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는 거구요. 세월이 흐르면서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크거든요. 제 공부를 잘 회향하는 게 큰 꿈이지요.”
하지만 스님의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벌써부터 일주문 안에 자리한 휴게소를 동학사 문화센터로 만들기 위한 고민을 시작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상설 불교 도서관을 만들고 녹음 법문을 멀티미디어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서 모두에게 영상으로 보여 주고, 사진과 미술 작품을 통해 부처님의 한평생 그 걸음걸음을 이해하는 전시실을 만드는 한편, 야외에선 작은 산사 음악회가 끊이지 않는 대중적인 문화예술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발원이 그것이다. 적어도 지역 주민에게는 더불어 함께 존재하는 불교로 인식시키는 발판을 만들 것이며, 국립공원 계룡산을 찾는 이웃들에겐 불교가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게 하는 현장으로 만들고 싶다는 스님의 ‘역동적’인 원력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생에 활기를 전해 주고 있지 않은가. 스님이 지닌 비상飛上의 꿈, 그 원천은 무엇일까?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 속에 동학사 계곡은 투명한 물 위를 유영하는 우리 민물고기들의 청정낙원으로 변모하고 있고, 전통사찰 동학사는 화석화되고 건조한 절 풍경이 아닌,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변모하며 2I세기를 준비하는 도량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어느 스님이 노래했던가? 나의 유산은 봄의 꽃들, 언덕의 뻐꾸기, 가을날의 낙엽이라고. 일연스님은 풀과 꽃들이 춤추고, 바람 소리 들으며 새들어 노래하고, 빛나는 햇살이 품어 안아주는 대자연과 눈 푸르게 정진하는 학인들이 문필봉의 정기를 받아 수승한 인재로서 승가에 우뚝하게 서는 바탕을 후대의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인 ‘땀방울’을 흘려가며 그 꿈을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