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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장춘사 법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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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연정 2001년 04월 230호
법연 스님은 80년대 중반 《해인》지 편집장을 맡았던 분으로,‘호계삼소’ 난을 기획한 장본인이며, 지금까지 《해인》지의 모양과 체제는 당시 스님이 잡아 놓은 틀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당시 신출내기 기자였던 필자와도 인연이 닿았던지라 10여 년이 지난 후에 스님과의 해후는 기대와 설레임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한편으로 순간 놀란 것은 “아니 스님이 벌써 그렇게 되셨나?”하는 뚱딴지 같은 기억의 정체현상 탓이었다.
제 나이 들어 눈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해진 만큼 스님의 수행이력도 쌓이고 쌓여 중진이라 일컬어지게 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건만, 법연 스님에 대한 생각은 아직도 편집실과 필자와의 사이를 소리없이 오가고 있다니….
사이버세상, 인터넷 정보화시대가 도래하기 얼마 전만 해도 활자매체는 상당한 위력과 매력을 갖고 있었다.
거품경제에 힘입어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출판문화의 전성기였다.
불교계에서도 신문과 잡지 뿐 아니라 사찰마다 사보발행의 열기가 대단했던 시기였다.
불교잡지로는 《해인》을 비롯하여 <대중불교> <불광> <법륜> <여성불교> <봉은> 등을 꼽을 수 있고 그 밖에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사보들이 홍수를 이루었다. 이렇듯 달아오르던 인쇄문화의 열기는 IMF라는 찬물세례에 잦아들었고 곧 이어진 정보화시대에 퇴색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특히 잡지의 위세는 불교계 안팎을 막론하고 내리막길이다.
그래도 우리의 정서는 아직 활자의 매력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고 있기는 하나,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들 한다.
《해인》이 학생회 회보에서 출발해 잡지로서의 위상을 굳히고 단연 돋보이기 시작한 것은 보수적이던 불교계가 자체정화와 사회참여 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하던 80년대 중반으로, 법연 스님이 편집장을 지낸 시기와도 일치하니 스님의 공로를 인정치 않을 수 없다.
《해인》은 일단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에서 시선을 끌었다. 지금까지 10년 넘게 유지해오고 있는 《해인》의 외양은 전혀 꾸미지 않은 듯하면서도 품위와 격조가 있다. 이후 4×6판 크기 사보의 전형이 돼 비슷한 모양의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으나 《해인》과 비교될 만한 것은 없었다.
애초 《해인》의 모양을 만든 것은 ‘끄레’라고 하는 디자인 회사였는데,이 곳을 선택했다는 것은 법연 스님의 탁월한 감각을 말해 준다. 법연 스님은 끄레의 실력을 상당히 신뢰했으며 상대 역시 마찬가지여서 사이가 무척 돈독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끄레와의 인연은 스님이 해인편집실에 머문 동안 내내 (출판부장까지 포함) 계속되었다고 하니, 스님의 무던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잡지라는 것이 모양만 예쁘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이 중요한데 《해인》에서는 듣기 어려운 방장 스님 (당시 성철 스님)의 법문을 실었음은 물론이고, 불교계 잡지에는 얼굴을 잘 내밀지 않는 신경림 씨나 문순태 씨 등 유명 필자들의 글을 척척 받아내는가 하면, 스님들이 필자로 등장했으며, 사회문제도 등한시 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진보적인 의견을 담아내기도 했다.
편집자는 타인의 입을 빌려 제 말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편집자의 의도에 맞는 글을 받아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스님은 필자를 세 번 찾아간다는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원고 청탁하러, 원고 받으러, 원고료 갖다 주러 이렇게 꼬박 세 번 씩을 찾아갔다니 일반 기자들도 그리 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요즘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청탁은 전화로, 원고는 이메일로 받으면 되니까. 당시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전화는 있었지만 팩스도 대중화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필자를 만나 원고청탁을 하고 다시 청탁 원고를 받으러 필자를 찾는 것이 예의긴 했지만,그래도 세 번까지 만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게다가 일반 기자도 아니고 스님이 직접 찾아와서 청탁을 하는데 아무리 도도한 사람이라도 이를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해인》의 위상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발품은 많이 팔았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스님은 말한다.
물론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번 원고 청탁했다가 두 번 다시 찾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이름을 말하면 누구나 알 만한 불교학계의 모 인사는 어렵게 원고청탁을 수락해 받으러 갔더니 하는 말이 “정말 받기 힘든 원고니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스님이 웃으며 말했단다.
“해인지에는 성철 스님 말씀과 사진도 실립니다.” 그래도 그 양반은 글을 써 주기나 했지만, 어떤 교수는 원고 찾으러 갔더니 조교가 쓰고 있으면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는 데는 뭐라 할말이 없어지더란다. 이런 이들의 원고는 다음에는 절대 청탁하지 않았지만, 그네들이 우리 불교학계를 대표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기에 앞날이 걱정스러웠다고.
유명한 소설가인 모씨는 한 번 만나면 하루종일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서울 북아현동으로 이사 오기 전 스님은 끄레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자거나 아니면 여관을 전전하는 날이 많았다.
법연 스님은 그 때를 회고하면서도 한 번도 고생스러웠다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라는 기쁨에 만족했다.
북아현동에 있던 해인 편집실은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는 점만 빼고는 전망이 그럴 듯한 아담한 기와집이었다. 《해인》이 서울에 편집실을 마련한 것은 《해인》은 더 이상 해인사보라는 성격 안에 묶여 있지 않는 대중잡지로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 같다.
이는 승가가 더 이상 사회참여에 무관심할 수 없다는 분위기와 맞물려 필자도 내용도 진보적으로 내달렸다. 한 때 《해인》은 상당히 진보적인 승가그룹을 대변하는 수위 높은 글들이 실렸는데, 덕분에 스님은 어른스님들께 혼쭐이 나고 출판부장으로 물러앉게 되었다. 그런데 묘한 것이 《해인》은 두드러져도 편집장 법연 스님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스님은 소리가 없다. 소리없이 걷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며, 잘 웃는 편인데도 웃음소리는 기억에 없다.
어떤 인쇄물에서도 아니 편집장을 맡았던 《해인》지에서조차 스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어떤 주의주장을 편 적이 없다.
유일하게 스님의 글을 접할 수 있던 부분이 표지글 바로 시였다.
그것은 법연 스님이 어렵게 토해낸 스님의 유일한 속내라 할 수 있다.
그래 어차피 육시헐 놈의 시대 이미 죽었다 하자 땡볕 붉은 고추처럼 올망졸망한 열망들 온몸에 신나뿌린 불꽃으로 세종로 한복판을 달려 외쳐보지만 여기저기 개떼처럼 쫓기는 젊음들 피흘려 끌려가지만 우리것이라기엔 벅차고 길어라 짐짓 무망한 노릇 아닐진대 어허 춤으로 가세 몹쓸 역사의 녹은 녹 다 문질러 치렁치렁 요령 흔들며 쌍으로 흔들며 죽음의 세상 삶은 차라리 욕됨이 아니더냐 대낮 어둠이 아니더냐 <스님의 시 ‘요령’> 법연 스님은 자신을 드러냄에 무척이나 인색하다.
시인은 절제된 시어로만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인가.
그렇다고 시가 다작인 것도 아니다.
모모 문예지에 등단한 적도 없지만 《해인》지 외에는 그 허명을 드러낸 적이 없다.
지난 屠2년 현담 스님과 함께 그나마 2인 시집을 낸 것이 유일하다.
스님의 오랜 벗인 현응 스님은 법연 스님을 일러 “은하수 중 맑고 밝은 별 하나가 사정이 있어 사바에 잠시 의탁하러 온 경우”라고 한 적이 있다.
너무 맑아 현실에 선뜻 발을 들여놓기 힘들었음일까.
《해인》 편집장을 맡을 때만 해도 주위에서는 ‘소극적인 움츠림과 홀로의 자신없음으로 물러앉곤 하던’ 법연 스님이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법연 스님은 누구보다 멋지고 완벽하게 그 일을 수행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러면서도 늘 초보자인 양 겸손한 미소를 잃지 않았었다.
함안에 있는 옛절 장춘사의 주지로 계신 법연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걷기까지 해야 했으니.
마을에서 그리 먼 길은 아니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산속으로 한참을 가야 하고 중간에 무덤이 곳곳에 있다보니 대낮에도 부녀자들은 겁을 내 걸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란다.
장춘사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상당히 아늑한 절이었다.
다른 시골절과 다른 것은 별로 없지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무릉산장춘사’라 쓰여진 작은 문이 무척 기억에 남고 친근감을 주었다.
문을 들어서며 기대와 설레임 한편으로 예상치 못한 변모에 당황하지 않으려 마음의 준비를 서둘렀다.
그렇게 격의없던 스님들도 세월과 함께 몹시 무게가 느껴져 마주하기 부담스럽게 된 모습을 익히 보아온 터이기에.
그러나 역시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
스님은 여전히 어눌한 듯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맑은 눈으로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반겨 주신다.
6년 전 10년 동안 머물던 해인편집실을 정리하고 이 곳 장춘사에 온 스님은 이제는 시골절의 주지일에 푹 젖어 있는 듯 했다.
대체로 스님들이 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한적한 시골절을 스님은 스스로 원해 온 것이다.
“스님은 왜 이 곳에 오고 싶어한 것일까?” 스님은 공양주와 단 둘이 이 절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스님이 얼마 전까지도 있었는데 다시 떠났다.
젊은 스님들은 이런 절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단다.
시를 쓰고자 함인가? 그런데 그거 접어둔 지 오래 되었단다.
그러면 뭐 따로이 계획한 거라도? 그러자 오히려 되묻는다.
“꼭 무엇을 계획하고 살아야 하느냐?”고.
내심 장춘사에 오면서 과거 한 번도 듣지 못한 스님의 지나온 세월이며 혹시 있을지도 모를 말 못할 속사정이며, 앞으로의 계획 등을 밤새워가며 듣고 싶었다.
그러나 스님에게 장광설을 바란다는 것이 과다한 욕심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도심 한복판에서 스님을 보았을 때 스님은 가슴에 뭔가를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불기 없는 구들장 한 구석에서 똬리 틀고 있는 뱀 같다고 할까, 그늘진 툇마루 기둥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 같다고 할까.
그러다 《해인》지가 나온 어느날엔가 아름다운 명주실을 힘겹게 뽑아내고 있는 누에고치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장춘사에서 스님은 더 이상 웅크리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똬리 풀고 텃밭에 접어든 듯, 몸 풀고 기지개 켜고 있는 듯.
산사에도 봄이 왔나보다.
잔뜩 물오른 목련이 카운트다운을 외치고 아지랑이 저만치 노란 나비가 날아오를 채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