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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녕사 묘엄(妙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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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철순 1991년 05월 111호
묘언스님께서 주석하고 계시는 봉녕사는 수원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곳이다. 낮은 야산에 둘러싸여 오롯이 자리잡은 산사에 한낮의 따사로운 봄볕이 찾는 이를 더욱 정감 있게 맞아준다.
봉녕사 승가대학.
이곳에서 주지 소임과 학인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학장 소임을 동시에 맡고 계사는 분이 묘엄스님이다.
스님께서는 이곳에 온 지도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하시며,
“지금은 제법 규모가 짜여졌지만 처음에 왔을 때는 약사전 건물과 요사채 한 동밖에 없었어요.
앞, 옆이 모두 논밭이어서 여름에는 파리, 모기떼가 밥을 먹으면 숟가락을 따라서 입으로 들어갈 정도로 많았어요. 그런 곳을 매립하여 선방을 만들고 강당을 짓느라 고생도 많이 했어요.”하라고 초창기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말문을 열으셨다.
현재의 정갈한 비구니 도량으로서의 모습과 어엿한 승가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까지 스님의 노고가 얼마나 컸는지는 짜임새 있게 꾸며진 건물 하나하나에서 무언으로 읽을 수 있었다. 이제 곧 개원식을 앞둔 ‘소요삼장(消遺三藏)’이란 이름의 돌로 지은 도서관 건물이 유난히 멋져 보여 스님의 안목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따름이다.
요즈음 스님께서 노심초사 가장 골똘히 연구하시는 일은, 어쩌면 학인들에게 보다 많은 것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가르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일이다. 이 일은 사내에서 가장 조용한 곳에다 제일 크고 넓게 도서관을 지어 놓은 스님의 깊은 뜻과도 일맥상통하는 일이리라.
스님께서 그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고 가르친 지도 벌써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렸다. 스님께서 공부하실 때만 해도 옆에서 누가 꼬집어도 모를 정도로 공부에 열중했다고 하시며, “요즈음 학인들은 우리 때만큼 공부에 대한 열의와 노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우리들이 한창 공부할 때는 면지가 와도 망상이 될까 봐 서너달이 지나서야 묻어봤어-요 사실 출가생활에 있어서 급한 일이 공부 외에 또 뭐가 있겠어요”라고 오히려 반문하신다.
스님께서 강단에 서신 지 강산이 세번 이상 바뀌는 동안 승려들이 의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그 동안 일선에서 학인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것은 한문 경전에 대한 올바른 독해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에요. 경전을 봤다고 해도 그것을 소화해서 남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어요 애초에 한문이 외래어라는 난점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번역된 것만으로 공부하기에는 뭔가 제대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또 있어요. 경전의 한글화 작업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문경전을 통해서 맛보는 진미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강원에서는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사상 전달이라는 차원에서 한문을 통한 흑판강의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가르치면서 느낀 스님의 평소 생각을 토로하신다.
결국 우리가 부처님의 법을 배우는 것도 궁극에 가서는 ‘참나란 무엇인가’를 실천 수행하기 위함이 아닌가. 그런데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단순히 지식 그 자체에만 너무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래서 학생은 많지만 진정한 제자는 없다고 개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묘엄스님의 고향은 진주이다.
스님께서 불가와 인연이 맺어진 것은 이미 교계에도 잘 알려진 사실이 되어버린 아버지 청담선사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보다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해 준 분은 바로 성철스님이시다.
“큰스님께서 절에 와서 사는 것이 가장 옳게 사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당시 큰스님께서 머물고 계시던 문경 대승사에서 보름 동안 있으면서 큰스님께서 불교에 대한 근본 뜻을 가르쳐주려고 여러 가지를 문답식으로 일러주셨어‘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그때 큰스님께서는 ‘부자가 죽은 것과 가난한 거지가 죽은 것이 죽음의 가치가 어떻게 다르냐’고 질문하셨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부자가 죽어서 호화롭게 장사 지내는 것과 거지가 죽어서, 가마니에 말아서 초라하게 버려지는 것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죽음 그 자체는 다를 바가 없다’고 대답한 것이 기억나요. 큰스님께서는 이처럼 인생무상에 대한 이야기를 비유를 들어 자세히 설해 주셨어요 큰스님의 법문을 듣는 동안 학교공부보다 불교공부가 훨씬 훌륭하고 차원이 높을 거라는 확신이 생겨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어요”
성철스님께서는 출가의 직접적인 길을 열어주셨을 뿐 아니라, 스님께서 승려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정신적인 가르침과 지도를 아끼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스님께서는 15세 되는 오월 단오날 대승사에 이웃한 윤펼암에서 월혜(月慧)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은사스님께서는 발심출가(發心出家)한 분으로 앉으나 서나 정전에 힘쓰셨어요. 매사에 철저하셔서 항상 사중물건을 아껴쓰라고 거듭 강조하셨고, 잠시도 쉬지 않고 선방 수좌들의 뒷바라지에 헌신적이었어요”라며 25여 년 전에 업적하신 은사스님을 회고하신다.

묘언스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대한 원대한 꿈과 남다른 의욕을 갖고 계셨다. 스님의 그런 배우고자 하는 의지는 학문적 스승인 운허스님을 좇아 스승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 않고 좇아가는 학문이 행로에서도 잘 나타난다.
“처음 출가하여서는 막무가내로 참선만 하였어요. 사실 참선공부는 무조건 하면 되는 것이고 교리를 의지해서 되는 것은 현상적인 파악만 할 뿐인데, 그 당시에는 그저 벽만 조고 낮아 있는 것이 답답하기도 하고 남에게 일러주고 싶어도 어떤 표현을 써야 적절한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부처님의 교리나 조사어록을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성철큰스님께서 운허스님게 편지를 써 주셔서 동학사로 찾아가서 그 아래 미타암에서 자취를 해 가면서 경전공부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은허 스님께서는 속서을 알아야 문리가 난다고 해서 논어, 맹자 등 사서삼경부터 가르치셨다고 한다. 스님께서는 동학사에서 1년 남짓 배우고 나서, 운허스님께서 부산 금수사로 가시게 되어 그 뒤를 좇아 다시 부산으로, 또 통도사로 가시게 되자 근처 보타암에서 지내면서 큰 절로 공부하러 다녔다.
그 당시만 하여도 비구니는 가르치지도 않았거니와 비구니 강원도 없었던 시절이었고, 비구니가 강사를 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내던 때였다. 뜻이 있으면 언제, 어느 때인지 길은 이미 열려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뜻이 그 길에 못 미치기 때문이 아닐까.
스님께서는 운허스님께서 통도사에서 다시 해운사로 가시게 되어 거기서 또 사교를 배우고, 다시 동학사에서 경봉스님으로부터 화엄경 삼현을 보는 도중, 경봉스님께 전강을 받고 그곳에서 2년간 더 공부했다.
그러다가 다시 통도사로 가서 운허스님께 화엄경 십지품을 마저 배웠다.
요즘이야 공부에 뜻을 두었다고 하면 스승을 똑같이 닮아가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가리지 않고 배우러 다니는 일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스님께서는 절집에서의 경전공부를 어느 정도 마치고 학문의 시야를 넓혀야겠다는 생각에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2학년에 편입하여 그곳에서 3년 과정을 마쳤다.
그 후 청도 운문사로 내려가 처음으로 강원을 개설한 것이 비구니 강원의 효시가 된 셈이다.
“그 일은 벌써 25년 전의 일이에요. 운문사에서 4년 정도 지내면서 학인들을 가르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달라졌어요 가르치는 일은 내가 안해도 다른 기회가 많을 것 같았어요 그때 생각에는 이제 이론적으로 앞 뒤를 가릴 수 있으니까 참선공부를 하면 금방 성불이라도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와 버렸어요”
그런데 그때 같이 나온 절집 식구들이 40여 명이나 되었는데 아무 대책도 없이 나와서 한 동안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1971년 지금의 봉녕사에 정착하면서 선원을 개설할 요량으로 맨 처음으로 선방을 지어 정진에 힘썼다.
그러던 것이 자꾸 새로 출가하는 젊은 스님네가 생기게 되어 또다시 가르치는 직분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집에 있는 식구들만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 자꾸자꾸 불어나서 지금은 대중이 150여명이나 되어 버렸어요 스님 노릇 하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신섬만 있으면 되지 무슨 자격을 붙여서 거절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평등사상에 어긋나는 일처럼 여겨졌어요”
그래서 스님께서는 또 다시 자연발생적으로 봉녕사 승가학원을 개설하게 되어 버렸지만 거기에는 후학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함께 그들을 사랑하는 스님의 하해와 같은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가스ε했던 일일 것이다.
평소에 스님께서는 자상한 어머니 같으시지만 학문에 임할 때는 엄격하시다. 그것은 방향을 잘 잡아서 정확하고 바르게 배워야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스님께 요즘 같은 혼란한 시대에 올바른 가치관을 세우는 일이 중요할 것 같아 여쭈었더니, “우리 출가자들은 부처님의 인생관이 곧 자신의 인생관이 되어야 해요 부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부처님 말씀을 믿고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생활인이 되어야 존경 받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가 부처님을 본받는 사람이기에 적어도 이만한 계율을 몸과 마음에 익혀서 습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즉 몸과 마음에 일종의 신사도 정신을 배게하는 것과 같아요. 계율의 의미를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해서 타율적으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부처님이 되려면 이만한 계율의 신사도는 지켜야 한다는 공정적이고 자율적인 마음 자세로 생활해야 해요”라고 하시며, 덧붙여서 옛날 승조법사께서 죽음 직전에 임하여 남기신, 법을 위하여 몸을 잊어버린 구도 정신을 담은 게송을 후학들에게 자주 인용하여 설명 한다고 하시면서 일러주셨다.
“사대원비유(四大元非有)
요오온본래공(五鐘本來空) 이라
신두임백인(伸頭臨白刃)
하니유여참출풍(獲如軟春風) 이로다.

사대는 원래 있는 것이아니요
오온이 본래 공한 것이로다
머리를 펴서 환 칼날에당도하니
오히려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구나.”
스님께서는 올해로 세수 60세를 맞으시지만 그런 세속적인 숫자는 별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듯 모든 일에 의욕적이시고, 건강한 동안의 모습을 간직하고 계신다. 그 동안 너무나 모법적인 삶을 살아오시면서 후학들을 지도해 오셔서 그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아오신 묘언스님께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넓은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졸업생들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주고 아울러 장학사업도 펼치고 계신다.
그러한 일들이 실효를 거두어 앞으로 이 땅의 불교가 어머니의 넓고 포근한 품안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대해 보며 바쁜 시간에도 불구하고 대담에 용해주신 스님께 두 손 모아 감사의 합장을 드리며 돌아서려는데 스님께서는 기자에게 예쁜 단주를 선물로 주셨다.

글/이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