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눈발 흩날리듯 고개를 떨구니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이달의 이야기 - 한연주 2001년 04월 230호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몇 년 만의 통화일까? 아마도 한 3, 4년은 됐음직하다. 잊고서 지내버린 세월 동안에 쌓인 숨가쁜 이야기를 헐레벌떡 끝내고 만날 약속을 했다. 피천득 님의 “인연”이란 글이 문득 떠오른 것은 왜일까? 언제였지? 재미없는 국어 교과서에서 발견한 그의 글을 읽으며 꿈꾸어 보던 막연한 인연이라는 것… 그렇다. 그녀와는 인연을 많이 얘기했던 것 같다. 우리는 만날 운명이었다면서 그런 갸륵한 마음으로 서로를 만난 것을 기뻐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맘에 맞는 친구를 하나 만난 기쁨은 모든 우연을 필연으로 꾸미고도 떳떳함이 있었던 것 같다. 통화를 끝낸 그 야심한 밤에는 마지막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날은 아마도 새 학기가 시작하고 얼마 안 된 설계 시간이었던 것 같다. 3년 내내 들어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외국의 유명하다는 건축가들의 작품을 2시간 내내 어두운 강의실에서 슬라이드로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은 일종의 고문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만그만해 보이는 건물들을 보며 뭔가를 느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며 예술가도 될 수 없고 기술자도 될 수 없는 어정쩡한 공과대학 건축공학도로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막간의 휴식시간, 강의실의 검은 커튼을 걷어내며 헤어졌던 햇살들과 조우하는 시간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3년 내내 같은 강의실을 드나들고 옆 동아리방을 다니면서도 변변한 인사조차 나누지 않던 데면데면한 대학 동기생이었다. 연못에 잘못 흘러든 폐유처럼 알 수 없는 심각한 이질감으로 대학생활이 참 재미없고 따분한 채로 졸업할 일만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던 나는 정작 내게 필요하거나 부족한 것이 뭔지를 모른 채 20대 초반을 보내고 있었다. 아직 여학생이 담배 피는 것이 낯선 그 때에 곧잘 마주치게되던 흡연하는 모습이 난 왠지 좋게 보이질 않던 그녀였다. 일체 남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던지라 그냥 그렇게 그녀와의 동석도 무관심하게 지나칠 찰나, 그녀가 내 관심을 끌고야 말았는데 그건 그녀의 낙서였다. 당시에 약간 유행이 지난, 당근을 사러 약국에 가던 토끼 얘기를 만화로 그린 그녀의 연습장. 두 시간 내내 지루했던 나에 비해서 그녀는 사뭇 보람찬 생산활동에 전념했던 게 분명하다. 별 말도 않고 지내던 내게 그걸 보여주며 뭔가를 기다리는 그 표정이란… 난…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그 후로 짧은 몇 학기를 난 내내 그녀와 붙어 다녔다. 사람들은 ‘둘이 사귀냐’고 놀리기 일쑤였고 지방 대학에 다니던 탓에 서울로의 등하교가 좀 힘들었던 그녀는 자취를 시작했고 난 이미 근처의 친척집에서 다니던 참이어서 핑계 김에 우리 둘은 학교에서 밤을 지새우며 온 캠퍼스를 다 휘젓고 다녔다. 과제를 한다는 구실로 밤을 새우던 우리는 새벽 안개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올 때까지 얘기를 하다가 푸른 안개를 뚫고 해가 퍼지는 소小 운동장에서 산을 향해 소리지르거나 헤매기 일쑤였다. 그동안 그렇게 지낼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살았을까 싶도록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받아들였다.

참 오랜만에 만나기로 한 그녀만큼이나 강남역도 오랜만이다. 작은 분식점들과 유행하던 커피전문점들이 들어서 있던 국기원 도서관의 언덕길을 오르며 그가 말한 ‘지오 리코’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찾았지만 초입에 비슷한 것을 발견했을 뿐 정작 그 음식점은 찾을 수 없었다. 이 뒷골목 풍경의 낯섦 혹은 새로움이란… 무슨 유행처럼 번져 버린 이탈리아 음식점들의 즐비함이 먹어보기도 전에 질려 버릴 것 같다. 매일 전화를 하고 한밤중에 같이 드라이브를 나가곤 하던 시절에 발견한, 그 때는 흔치 않던 분위기 좋은 새문안길 뒤 골목 안에 숨듯이 자리한 이탈리아 레스토랑 생각이 난다. 회벽을 하얗게 칠한 지중해풍의 건물에 작은 안마당이 있고 나무를 정감 있게 깐 계단을 따라 이층에 오르면 마주치는 테라스와 맛있는 스파게티. 그 때를 생각하면 그녀와 꼭 갔음 직한데 정작 기억은 희미하다. 추억이란 같이 되새김질을 할 상대가 있어야 유지되는 법, 아마도 단지 장소만 기억하는 걸로 봐서는 그와 함께 갔었을 것이다. 망각이란 이렇게 사람도 시간도 동기도 다 묻어 버렸지만 난 그 시절의 개연성으로 그 때의 기억을 조립해냈다.

몇 번을 오르내리던 끝에 결국 전단지를 뿌리던 근처 나이트클럽 청년에게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어이없어 함뿐이다. 그런 레스토랑이 한두 개여야지… 그렇지, 이미 희소성이 사라진 것이란 대뜸 그거 하면 대꾸해 줄 수 있을 이유를 잃고 만다. 짜증이 좀 나기 시작했다. 벌써 30분이나 늦어 버렸지만 그보다는 내게 제대로 장소를 알려 주지 못한 그가 짜증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냥 좀 전의 그 레스토랑이 같은 업종이니까 손해보는 셈치고 한 번만 묻고 여차하면 그냥 가버릴 심산으로 그 곳으로 들어갔다. 그게 행인지 불행인지 그건 바로 이름만 바꾼 같은 레스토랑이었는데, ‘프로메사Promesa’, ‘약속’이었다. 드디어 찾아간 그 레스토랑의 한쪽 구석에서 그녀와, 나와 또 다른 인연이 있었을지 모를 B양이 너구리굴처럼 담배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희미한 조명과 가득한 담배 연기가 흐릿한 내 기억만큼이나 아스라한 추억을 키워내며 그 몇 년 전과 어이없게도 비슷한 풍경을 만들어 냈다. 찾아오기 고단했던 짜증을 누르고 그 간의 안부와 살아온 얘기와 여느 때와 같은 장황한 수다들이 난무했다. 내가 가져간 청첩장은 4월이다. 그녀는 5월에 신부가 된다고 했다. 며칠 후면 프랑스로 떠날 것이고 그 곳에서 약혼자와 그의 식구들과 결혼을 한다고 했다. 4월과 5월이라… 그 때쯤이면 진해에, 경주에, 그리고 매일 토끼 눈으로 밤을 새우던 교정에 벚꽃이 만발할 것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화사하고 눈부신 벚꽃이 만개하고, 그리고, 눈발이 흩날리듯이 고개를 떨구겠지. 나도 그녀도 이 땅에서 그 새 천년의 첫 벚꽃을 보지 못할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내 반쪽을 찾은 나도 역시 벚꽃이 피기 전에 이 곳을 떠날 테니까. 그렇게도 믿었던 인연이란 게 그리도 허무하게 무너지더니 악담을 하고 돌아서서 다시 보지 않으려던 그 악연이 이렇게 또 다른 정서적인 우연을 낳게 될 줄이야….

식사 한 끼 그리고 차 한 잔을 뒤로 하고 바쁜 작별인사를 나눴다. 아직은 겨울이라 옷깃 새로 스미는 바람이 무척 차다. 서로 등을 보이며 헤어지는 그 거리에서, 어스름한 땅거미에 묻혀 만개한 벚꽃이 마치 수많은 작은 등처럼 빛을 발하던 어느 봄에 그 지방대의 공과대학 앞의 벤치에서 술에 취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린 만날 인연이었어. 네가 여자라서 정말 다행이다. 안 그랬음 우리는 연인戀人이 되었을 거야. 그럼 헤어지기도 했겠지. 하지만 친구라서 다행이야. 친구는 헤어질 일이 없을테니….” 봄빛처럼 나른한 그녀의 목소리, 아직 쌀쌀한 2월의 마지막날 그 목소리가 매운 바람에 섞여 환청처럼 들린다.

난 나의 아사코를 다시 만난 것을 후회했을까…? 오늘밤만 지나면 봄이다. 꽃이 만발하고 햇살이 따습겠지…. □